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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1)_진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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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2-22 20:39 조회9,385회 댓글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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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 대한 자료를 간략히 정리하여
시리즈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도 자료가 있으시면 올려 주시고
진주에 대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무엇이던 질문해 주시면 자료를 찿아
성심껏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주의 역사
 
요악
 
진주지역에는 중기 구석기시대(약 12만 년 전~3만 5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성립된 삼한시대에 진주시는 변한에 속하고, 삼국시대 전기인 기원 후 42년에 성립된 가야시대에는 가락국의 6가야 중 고령가야로 추정되고, 삼국시대 후기에는 백제에 영속되어 거열성이라고 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문무왕 3년(663) 2월에 거열성을 빼앗아 거열주라고 했다. 신문왕 5년(685) 봄에는 처음으로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높여 정주라 하고, 대아찬 복세로 정주총관을 삼았다. 그리하여 정주는 지금의 도 단위인 전국 9주 중의 하나의 주가 되어 11군을 소관했다. 경덕왕 16년(757) 12월에는 전국 지명에 대한 개명이 있었는데, 이때 정주는 강주로 개칭되어 1주, 11군, 27현을 주관했다. 정주의 속군은 한다사군(하동), 전야사군(남해), 고자군(고성), 아시량군(함안), 상군(거제), 궐지군(단성), 속함군(함양), 거열군(거창), 대량주군(합천), 대가야군(고령), 일이군(성주)이다.
고려 태조 19년(936) 9월에는 후백제의 신검이 강주도독 양검과 무주도독 용검과 함께 왕건에게 항복함으로써 강주는 고려에 영속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는 전국 주부군현의 지명 중 일부를 개명하였는데, 이때 강주는 진주로 개칭되었다. 진주의 속군 9군으로 하동군, 남해군, 고성군, 함안군, 거제군, 궐성군(단성), 천령군(함양), 거창군, 강양군(합천)이다. 조선 세조 12년(1466)에는 종래의 병제를 5위도총부로 개편하였는데, 그 결과 진주에 경상도우부진주진관을 두고 진주병마첨절제사는 5군, 8현을 소관했다. 진주진에는 병마첨절제사, 합천군·초계군·함양군·곤양군·거창군에는 병마동첨절제사, 사천현·남해현·삼가현·의령현·하동현·산음현·안음현·단성현·거창현에는 병마절제도위가 주재하였다.
고종 32년(1895)에는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 336군으로 구분하여 부에는 관찰사를 두고 군에는 군수를 두었다. 이때 진주에는 지금의 도 단위인 진주부가 설영되어 21군을 주관했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개칭되어 군수를 두었다. 진주부의 속군은 진주군·고성군·진해군·사천군·곤양군·남해군·단성군·산청군·하동군·거창군·안의군·함양군·합천군·초계군·삼가군·의령군·칠원군·함안군·창원군·웅천군·김해군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전국 317군을 218군으로 하고, 4,315면을 2,517면으로 지방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이 때 진주군은 19면 148리동을 소관했다. 당시 진주군에 속한 면은 진주면·평거면·도동면·명석면·문산면·정촌면·내동면·집현면·대곡면·미천면·금산면·진성면·일반성면·이반성면·대평면·수곡면·금곡면·사봉면·지수면이다. 1925년에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지고 1931년에는 종래의 지정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진주군 진주면은 진주읍이 되었다. 그리하여 진주군은 1읍 18면을 소관하였다.
해방과 정부 수립 후 1949년에는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어 시장을 두고 38동으로 개편되었다. 1995년에는 구 진주시와 구 진양군을 통합하여 도농 통합형 진주시가 되어 1읍 15면 21동을 두고 있다. 오늘날 진주시는 문산읍과 내동면·정촌면·금곡면·진성면·일반성면·이반성면·사봉면·지수면·대곡면·금산면·집현면·미천면·명석면·대평면·수곡면, 그리고 망경동·강남동·칠암동·성지동·중앙동·봉안동·상봉동동·상봉서동·봉수동·옥봉동·상대1동·상대2동·하대1동·하대2동·상평동·초장동·평거동·신안동·이현동·판문동·가호동을 포괄하고 있다.
 
 
1. 선사시대
 
진주지역에는 중기 구석기시대(약 12만 년 전~3만 5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진주지역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은 세 곳인데, 이 가운데 한 곳은 발굴 조사되었으며, 다른 한 곳은 1점의 깬 석기만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곳이 구석기시대의 유적인지 아닌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먼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대평면 내촌리 유적이다. 진주지역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대평면 내촌리 유적은 남강댐 건설공사로 수몰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1997년 2월부터 여름까지 긴급하게 조사했다. 이곳은 잔디밭 조성을 위해 능선을 중장비로 깎아 긴 단애가 형성되었는데, 다행히 구석기시대의 홍적세 제4기층이 노출되어 있어서 이 지역이 구석기시대 유적지임이 증명되었다. 주변에서는 구석기시대 석기로 추정되는 석영암제의 수많은 석기들이 발견되었고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석기만 가지고는 유적의 시기와 성격을 밝혀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구석기 유적의 다른 한 곳은 대곡면 마진리 유적이다. 이곳은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확인만 되었을 뿐 아직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유적은 마진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남강을 가로막듯이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야산의 정상부에 있으며, 채집된 유물은 대체로 몸돌석기들이다. 따라서 이 유적은 구석기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석기의 형태만 가지고 연대와 성격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이 유적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루어질 발굴조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또한 지수면 청계리 임계마을의 야산에서도 짜르개가 1점 채집되었다. 그러나 남강을 사이에 두고 마진리 유적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마진리 유적을 남겨 놓았던 구석기인들이 이곳에까지 활동하면서 석기를 남겨놓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결국 진주지역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남강변에 자리하면서 진주시의 동과 서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의 넓은 지역에서도 더 많은 유적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진주지역의 구석기인들은 어느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살면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며,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옮겨 다니면서 살았던 흔적만 몇 군데 남겨 놓았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형태의 집에 살았으며, 가족의 수는 몇 명이었고,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채집된 자료를 가지고 이 유적의 구석기문화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자료가 미흡한 편이다.
 
 
2. 삼한시대
 
삼한 중 변한에 있었던 12개 소국은 지금의 경상남도 전역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산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중 고순시국의 위치를 진주 지역으로 비정했던 이병도의 견해와는 달리 정인보는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 지역으로, 천관우는 경상남도 사천 지역으로 각각 비정했다. 대체로 낙동강 본류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남도의 진주, 고성, 사천 등지로 위치가 비정된다. 또한 각종 사서에 등재된 가야의 소국들 중에서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거타국(居陀國), 상치이국 등이 지금의 진주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다양한 주장도 있다.
고순시국(古淳是國)은 중국의 사서 『후한서(後漢書)』와『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기원전 3~2세기경부터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북쪽에서 온 유이민들과 토착민이 혼합된 사회에서 초기국가 형태를 형성하여 낙동강유역과 남해안지대에서 농경과 제철을 기반으로 분립되어 있었는데 그 중 고순시국은 지금의 진주지방에 있었다고 한다.
 

3. 가야
 
가야는 자체적인 역사기록을 남기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각종 문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기되고 있는데, 가야(伽倻·加耶·伽耶), 가라(加羅·伽羅·迦羅), 가락(駕洛·伽落), 구야(狗耶·拘耶), 임나(任那) 등이 그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반도 남쪽에서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삼한(三韓)의 부족국가들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연맹으로 성장하였다. 가야연맹은 변한 12국가 연맹체가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42년경에 6가야로 발전하였으나, 통일된 고대국가의 정치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동서쪽에서 팽창하는 신라와 백제에게 영속되거나 정복되어 6세기 중반 562년에 멸망하고 만다.
6가야의 명칭과 중심지는 문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오나, 대체로 본가야(本伽耶, 김해) 또는 금관가야(金官伽耶, 김해)·아라가야(阿羅伽耶, 함안)·대가야(大伽耶, 고령)·성산가야(星山伽耶, 성주)·소가야(小伽耶, 고성) 그리고 고령가야(古寧伽耶, 진주)로 정리되고 있다.
가야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데, 기원 전후기부터 3세기까지를 전기가야시대, 4세기부터 6세기까지를 후기가야시대라고 하며 전기에는 낙동강 하류의 본가야[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6가야 중 고령가야의 위치에 대하여 『삼국유사』에는 함창(咸昌,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으로 나와 있어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병도(李丙燾) 박사의 설이나 『한국사통론』(변태섭, 삼영사, 1986)에는 지금의 진주로 정리되어 있다. 함창을 고령가야의 중심지로 보는 이유는 변한 12국을 이은 가야의 강역의 넓이로 보아 지금의 함창을 중심한 지역에 성립된 가야로 보아야 타당하다는 것이고, 진주를 고령가야의 중심지로 보는 견해는 진주의 옛 이름 거열(居列)이 고령과 음이 비슷하다는 것을 판단의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시기의 진주지역 유적으로는 진주 옥봉 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 가좌동 고분군, 중안동 고분군, 신당리 죽산고분군, 우수리 유적, 내동리 고분군, 엄정동 고분군, 무촌리 고분군, 평촌리 고분군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과 발굴된 유물을 통하여 살펴보면 진주지역은 위치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수장급의 정치체제가 있었다고 보이며, 이후로도 계속하여 경상남도 지역의 교통·문화·행정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된다.
 
 
4.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신라의 건국(서기전 57년), 고구려의 건국(서기전 37년), 백제의 건국(서기전 18년)에서 시작하여 백제의 멸망(660년), 고구려의 멸망(668년)까지의 약 700여년을 말하며
이 시기 진주는 처음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어 거열성(居列城)이라 불렸다. 백제는 475년(개로왕 21) 9월에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왕이 죽임을 당하자 웅진(熊津: 공주)으로 천도하였고, 한강 유역에서 상실한 영토를 가야지역에서 확장하게 되는데 512년(무령왕 12) 지금의 진주를 위시한 경상남도의 서부지역 4현을 영속하게 된다. 또한 백제는 무왕 6년(605) 2월에 사천에 각산성을 쌓아서 신라 침공의 거점을 확보하게 되는데, 6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이 지역의 지배층 무덤인 횡혈식 석실고분(백제묘제)이 지금까지 진주시 옥봉동 수정봉에 남아 있어 당시 진주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진주가 백제의 거열성이었다는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에서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 지리지의 진주목 건치연혁조에 쓰여 있다. 진주지방에 백제가 각산성을 쌓고, 백제 의자왕이 항복한 후 진주지역의 백제 잔여세력을 소탕 평정하였다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서 알 수 있다. 또 각산이라는 지명은 각종 지리지의 진주목 봉화봉수·역원·고읍조의 기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여 멸망하였으나 백제부흥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경상남도서부지역에도 백제의 잔여세력이 남아 있어 신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4월 신라군이 각산성을 함락하고, 2년 뒤인 663년(문무왕 3) 2월에는 진주지방인 거열성도 토벌하여 비로소 신라가 서부경상남도일대를 평정하게 된다.
이후 신문왕 5년(685)에 거열주를 뽑아내어 청주(菁州)를 설치하고 총관(摠管)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는 다시 전국의 지방조직을 9주, 5경으로 정비하고 명칭을 고쳤는데, 이때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신라는 지금의 진주지방에 9주의 하나인 강주를 설치하고 총관(도독)을 두었으며, 속령으로 1주, 11군, 27현의 넓은 지역을 관할하면서 행정·군사·치안·조세 등의 통치역할을 수행하는 지방의 중심지로 진주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당시의 관할구역을 정리하면, 남해군의 난포현(闌浦縣)·평산현(平山縣), 하동군의 성량현(省良縣)·악양현(嶽陽縣)·하읍현(河邑縣), 고성군의 문화량현(蚊火良縣)·사수현(泗水縣)·상선현(尙善縣), 함안군의 현무현(玄武縣)·의령현(宜寧縣), 거제군의 아주현(鵞洲縣)·명진현(溟珍縣)·남수현(南垂縣), 궐성군(闕城郡)의 단읍현(丹邑縣)·산음현(山陰縣), 천령군(天嶺郡)의 운봉현(雲峰縣)·이안현(利安縣), 거창군의 여선현(餘善縣)·함음현(咸陰縣), 고령군의 야로현(冶爐縣)·신복현(新復縣), 강양군(江陽郡)의 삼기현(三岐縣)·팔계현(八谿縣)·의상현(宜桑縣), 성산군(星山郡)의 사동화현(斯同火縣)·계자현(谿子縣)·도산현(都山縣)·신안현(新安縣)이었다.
『고려사』 지리지 및 『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등에는 신라 혜공왕 때 강주를 청주로 개칭하였다고 하지만, 『삼국사기』 혜공왕 2년(766년)조에 강주라는 지명이 있으며, 또 『삼국사기』(권 제44 열전 제4) 김양(金陽)조와 『동국여지승람』(권3 진주목) 명환(名宦)조의 김흔(金昕) 기사를 보면 강주가 나온다,
이와 같은 문헌기록을 근거하면 혜공왕이 강주를 청주로 개명하였다는 기사는 잘못된 것이며, 소성왕 때 청주로, 헌덕왕 때 강주라고 고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러 지리지의 진주목 연혁에서 고려 태조 때 강주로 개명하였다는 기사도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며,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진주 연혁에 고려 태조 때 진주로 개명했다는 기사가 옳은 것 같다.
 

5. 고려시대
 
진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후백제를 거치면서 강주(康州)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년)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고려 초의 장군으로 거란군 격퇴에 공을 세운 강민첨(姜民瞻)을 비롯하여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하륜(河崙), 조선 초의 무신 하경복(河敬復) 등이 모두 이 진주향교에서 수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995년에는 전국이 10도로 개편될 때 진주는 산해도(山海道)에 소속되면서 절도사를 두어 정해군(定海郡)이라 불렀다. 1012년(현종 3년)에는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按撫使)를 두었으며, 1018년에는 안무사 제도를 폐지하고 진주목으로 환원하였다. 1232년(고종 19년)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소실되자 강화도에 천도해 있던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판 재조에 착수하여 강화에 본사(本司)를, 진주에 분사를 두고 8만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이 동안 진주목은 1310년(충선왕 2년)에 일시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940년(태조 23년)에 전국의 주·부·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강주는 진주로 개칭되면서 하동·남해·고성·함안·거제·단성·거창·함양·합천 등 9개의 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1018년(현종 9년)에는 전국에 8개 목을 두면서 진주목으로 환원하고, 지금의 단성과 하동을 속군으로 두었다. 한편, 고려는 지방 통치의 한 방법으로 지방 대읍의 수령을 계수관(界首官)에 임명하고 주위의 소읍을 통할하게 하였는데, 진주는 고려 전기에 합천·고성·남해·거제를 담당하는 계수관이 되었다. 1106년(예종 1년)에는 종전의 영남도·영동도·산남도 등 3개 도를 통합하여 경상진주도(慶尙晋眞州道)라 하고, 1171년(명종 1년)에는 경상진주도를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晋陜州道)로 나누었는데, 진주는 진합주도에 속하면서 감영 소재지가 되었다. 1186년에는 이를 다시 통합하여 경상주도로 고쳤으며, 1204년(신종 7년)에는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로, 1298년(충렬왕 24년)에는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라 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년)에 5도가 설치되면서 경상도(慶尙道)로 된 후 지금까지 이 명칭이 내려오고 있다. 이때 경상도는 1경, 2목, 30군, 92현을 거느렸는데, 진주목의 관할 구역은 4군 26현이었다.
고려의 군사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었는데, 지방군은 주현군(州縣軍)이라고도 하였다. 지방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군사도라는 별도의 구역으로 나누고 군사를 배치하였는데, 진주는 진주목도(晋州牧道)로서 약 1,5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중앙의 지휘를 받았다.
고려시대에는 물가조절기관인 상평창(常平倉)과 빈민구제기관인 의창(義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진주에도 이들 기관이 설치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고려는 성종 때 교통체계의 하나로 22역도 525역의 방대한 역조직을 완성하였는데, 진주는 산남도로서 평거역 등 4개의 역을 두고 직접 관할하였다. 한편, 각 지방에는 조세의 보관과 운반을 위한 조창(漕倉)이 설치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에는 마산과 사천에 설치되어 있었다. 진주의 조세는 사천의 통양창(通陽倉)에 보관되었다가 5월까지 해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수도로 운송하였다.
1186년(명종 16년)에 진주목사 김광윤(金光允)이 백성들을 심히 착취하자 민란이 일어났는데, 조정에서 목사를 귀양보내고 민심을 수습하여 무마되었다. 그 뒤 1200년(신종 3년)에 공사노비의 폭동에 편승한 정방의(鄭方義) 일당의 반란이 일어나 인근 지역을 휩쓸며 기세를 떨쳤으나 진주민들의 슬기로운 대처와 협력으로 난을 진압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진주가 위치하였던 남해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왜구의 출몰이었다. 기록에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약 500회의 왜구 침략이 있었고, 진주의 인근 해역에만도 31회나 침입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진주에서는 이와 같은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379년(우왕 5년)에 토성이던 진주성을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6. 조선시대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를 두었다. 1416년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었는데, 이때부터 진주는 경상도에 속했다. 1519년(중종 14)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진주목은 경상우도에 영속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7년여의 참혹한 전란 끝에 황폐화된 지역이 많아지자 농촌의 말단 조직인 이(里)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는데, 진주지역은 전란 전의 108개에서 전후 62개로 통합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가운데 진주는 진주부의 영(營)이 설치되어 관찰사를 두었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고쳐져 군수를 두었다.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의 진주군이 되어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하동군, 고성군 진해군, 함안군, 남해군 등에 일부 면이 편입되면서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마무리되면서 대전 체제로 중앙과 지방의 국가조직 정비되었다. 이 당시 진주는 전국 20목(牧) 중 하나로 경주, 상주, 성주, 안동과 더불어 경상도에서 가장 유력한 지방 거점도시였다. 진주목에는 목사가 파견되어 행정권, 경찰권, 군사권을 통제하며 지방 정치의 핵심으로 기능하였다.
조선 초기의 군제는 1464년(세조 10)을 전후하여 정비되었다. 이때 중앙은 5위로 구성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은 용양위(龍驤衛)에 소속되었다. 용양위는 중부에 경동부(京東部)와 대구 군사(軍士), 전부에 김해 군사, 후부에 상주·안동 군사, 좌부에 경주 군사, 그리고 우부에 진주 군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후 군제는 명칭과 제도가 변화하다가 진관(鎭管) 체제로 정비되었다. 이때 진주진관의 진주목사는 경상우병영에 소속되어 합천·초계·함양·곤양 군수를 통솔하고, 그 아래로 진주판관과 거창·사천·남해·삼가·의령·하동·산음·안음·단성 현감을 통솔하였다. 이렇게 진주는 경상도의 중요한 거점도시였고, 호남으로 들어가는 요충지로서 연안지역 왜구 방비에도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후 진관체제가 유명무실화되고 5군영이 차례로 설치되어 숙종 때 정비되었고, 지방에는 속오군(束伍軍)이 설치되었다. 이때 진주에는 경상우도 우영장이 배치되어 진주·하동·함양·거창·곤양·합천·초계·사천·남해·단성·산청·의령·삼가 등 의 속읍을 거느렸다. 이처럼 진주는 전기와 마찬가지로 후기에도 그 중요한 군사적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을 기간으로 하면서 상업, 수공업 등의 산업을 발달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진주목의 땅이 기름지다고 하고 있는데 당시 진주목의 간전(墾田)은 1만 2천 7백 30결로, 논이 조금 적은 편이었다.
진주에서 생산된 주요 농산물은 오곡과 조·메밀·감·배·석류·뽕나무·삼[麻]·목면(木綿) 등이었고, 꿀·밀[黃蠟]·녹포(鹿胞)·문어·은구어·표고버섯·석이(石茸)·송이버섯·지초·작설다(雀舌茶)·자리[席]·죽피방석(竹皮方席)·가는대[篠]·왕대[簜]·칠·종이·돼지털·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수달피(水獺皮)·산달피(山獺皮) 및 약재인 천문동(天門冬)을 공물로 바쳤다. 우무[牛毛]·세모(細毛)·청각(靑角)·미역·해삼 등은 이 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김양촌(金陽村)과 강주포(江州浦) 두 곳에 어량(魚梁)을, 곤양(昆陽) 경계에 염소(鹽所)를, 목제리(目堤里), 중전리(中全里), 월아리(月牙里)에 자기소(磁器所)를, 유등곡(柳等谷)과 반룡진(盤龍津)에 도기소(陶器所)를 갖추어 지역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16세기 이후로 농지가 확대되고 상업이 발달하는 등의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지역에서는 새로운 관개기술인 보의 축조 및 이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강변 저지지역에 새로운 경작지가 확장되어 가고, 이앙법에 의한 농경이 어느 지역보다도 앞서서 이루어졌다.
상품경제의 발달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은 예외가 아니었다. 19세기 초 진주목 지역에도 장시가 번성하여, 진주관아 근처의 읍장을 비롯해서 덕산장, 문암장, 수곡장, 대야천장, 안간장, 북창장, 소촌장, 반성장, 엄정장, 만가장, 영현장, 사일장 등 13개의 장이 섰다. 진주지역 내에서는 거의 매일 장이 설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여기저기 장이 겹쳐서 섰다.
또한 진주목 관하에는 서부경상남도 지역 일부 고을의 조세를 모아 전라도·충청도의 앞바다를 통해 서울까지 운반하는 가산창(右漕倉: 진주 남쪽의 부화곡리, 현재 사천군 축동면 가산리)이 있었다. 가산창은 영남 지역 3개의 조창(좌·우·후 조창) 중의 하나로서, 진주·곤양·단성·사천·고성·의령 등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거두어 들여 서울로 운반하면서 물산의 출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 1477년(성종 8년) 공조판서 양성지가 올린 차자를 보면 우리나라의 만가지읍(萬家之邑)을 운위하고 있는데 경주, 평양이 으뜸, 나주, 남원이 다음이며, 전주, 진주가 또 그 다음이라고 되어 있다. 성종 당시에도 진주 호수는 10,000호를 상회하는 전국 6대 거읍 중 하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주의 토성(土姓)으로 정(鄭)·하(河)·강(姜)·소(蘇)를, 입주(立州) 후(後)의 성으로, 유(柳)·임(任)·강(康)을 거론하고 있다. 이후 성종대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러한 성씨 구성은 거의 변동이 없어 이 시기까지는 새로운 인구 유입에 따른 지역사회의 변동이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편찬된 『진양지』에서는 전체 호수가 3,620호로 기재되어 인구의 급감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진주지역이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의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국권이 안정되고 지방에 향약(鄕約)이 실시되자 유향소(留鄕所)가 점차 유력한 향촌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지방 사족과 유림을 중심으로 서원(書院)과 사우(祠宇)가 다수 건립되면서 향촌지배체제는 더욱 안정되어갔다. 진주지역에도 창렬사·남악서원·동산재·충의사·도통사·용강서당·은열사 등 20여개의 중요한 사우들이 건립되어 선현의 충렬과 학덕을 기리고 있다.
조선 초기 진주목 관내 역들은 역승(驛丞)이 관할하던 소촌도(召村道) 소속이었다. 이 당시 진주와 관련된 도로는 제6로인 서울-통영 간 도로로, 그 경유지는 수원, 직산, 성환, 천안, 공주, 은진, 삼례, 전주, 남원, 진주였다. 이 경유지에는 여관 역할을 하던 원(院)을 두었는데, 진주에는 17개소의 원이 있었다. 조선은 후기에 들어오면서 세미(稅米)의 양이 크게 증가하여 조운을 위한 조창(漕倉)이 설치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에는 창원의 좌조창, 밀양의 후조창, 그리고 진주의 우조창이 설치되었다. 진주의 우조창에는 20척의 배가 배치되어 8개 읍의 세미를 관장하였다.
통신 기능의 봉수제(烽燧制)는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국 5개의 직봉(直烽) 중 진주는 동래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직봉에 속하였으며, 2개의 간봉이 있었다. 이 중 하나는 고성-진주-충주-서울 목멱산(남산)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해-진주-사천-단성-삼가-충주-서울 목멱산(남산)이었다.
조선시대 진주는 영남학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특히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남명 조식이 활동한 근거지로서 남명학파의 본산지로 자리 잡았다. “敬(경)”과 “義(의)”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의 남명학은 이후 경상우도의 학문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각재(覺齋) 하항(河沆)과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이들의 뒤를 이은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과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이 조식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진주 지역에서는 의병장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이 때 활약하였던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도 조식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조식의 학문에 나타나는 실천성이 국난을 맞아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사건]
 
1) 임진왜란과 진주
1592년 조선은 일본의 침입으로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초유의 전란을 맞게 되었다. 관군의 활동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였다.
진주는 경상우도의 핵심지역으로 이 지역 병마의 주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고, 당연히 일본군의 조선 공략의 표적이 되었다. 1592년 9월에 일본군이 진주성에 침입하자 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지휘 하에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적을 격퇴하였으나 김시민은 적의 유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이듬해 왜군이 지난해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다시 진주성에 침입하였는데,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 여러 장수와 읍민들이 왜군과 끝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당하여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때 의기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으니 촉석루 옆에 서 있는 의기사(義妓嗣)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임진왜란 후 160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을 창원에서 진주로 옮기고 절도사가 목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2) 진주농민항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향촌질서는 점차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지방 수령들의 착취와 탐학으로 날이 갈수록 그 폐해가 심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특히 봄철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는 환곡의 폐해가 심각하여 1862년 마침내 진주민란이라는 대대적인 농민항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862년 진주에서는 단성에 이어 2번째로 농민항쟁이 발생했다. 진주 농민들은 점차 무력봉기를 일으키면서 각지의 양반, 무단토호, 보수적 요호부민(饒戶富民)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조정에서는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晋州按逆使)로 임명해 수습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른 지방의 농민을 자극해 이 해에 전국에 걸쳐 30여개 지역에서 농민이 봉기하였다.
 
3) 진주을미의병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에 세력을 뻗친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이른바 을미의병이 형성되었는데, 진주에서는 안의 출신의 노응규(盧應奎)가 1896년 1월 동지를 규합하여 진주성을 공격, 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진주부민들은 정한용(鄭漢鎔)을 진주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진(義陣)을 조직, 노응규 의 진에 합세하였다.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 부대는 이후 단성, 고성, 하동, 함안 등지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고 김해까지 갔으나 노응규와 정한용을 대표로 하는 수뇌부의 의견 불일치로 포기하고 진주로 돌아왔다. 결국 이 무렵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에 의해 진주성은 점령되고 3개월여에 걸쳐 펼쳐졌던 진주의 한말 의병투쟁은 막을 내렸다. 진주의 을미의병은 비록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희생을 낸 채 해산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항일정신을 면면히 이어오면서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진주인의 애국정신을 과시한 의거였다.
 
 
6.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교통·통신시설은 비록 그것이 근대적인 시설이었다 하더라도 설치목적과 그 기능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그리고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에만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정책에 의해 진주지역의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밀려나고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이래 배출된 빈농층과 자본주의 발전 속에서 배출된 노동자층, 그리고 새로 생긴 교육기관에서 배출된 지식인에 의해 진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지방행정제도]
일제는 국권 강탈 후인 1910년 9월 지방관제를 발포하여, 종래의 관찰사를 도장관(道長官)으로 바꾸었으며, 1918년 8월에는 다시 도지사로 개칭하였다. 1917년 지정면으로 지정되었던 진주면이 1931년 진주읍으로 승격함으로써 진주군은 1읍, 18면, 17정을 통할하게 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도동면과 거평면을 통합하여 진주부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1945년 해방 당시 진주부는 2면과 17정을 관할하고, 진양군은 16면을 관할하에 두고 있었다.
[경제]
일제시대 경제정책은 우리나라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일제의 필요에 의한 농업정책·산업입지정책·노동정책이 실시되었다. 일제의 경제운영 목표는 기본적으로 일본경제를 위해 필요한 식량공출과 자원 수탈, 그리고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건설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국가경제의 비정상적인 운영, 전통적인 운영 및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해체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경제정책에 의하여 진주지역의 농민들은 소작농·빈농으로서 이전보다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지역에서 농민들의 토지경작 면적은 일제 전 기간에 걸쳐 계속 영세화해 가고 있다. 또한 진주지역 농민들 중 소작농의 비율이 후대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소작지도 늘어났다.
이와 같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몰락하는 농민이 늘어나면서 일부는 도시로 와서 품팔이나 공장 노동자로 전락해 가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진주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인이 처음 진주에 정착한 것은 1902년의 일이었는데, 이후 그 수가 꾸준히 늘면서 상업·금융업·운송업 등에 진출해서 진주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해갔다. 또한, 일본인들은 많은 자금을 토지 매입에 투자해 진주를 비롯하여 서부 경상남도 일대의 많은 토지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진출에 앞장선 기관은 조선권업회사 진주지점과 청수합자회사로, 진주를 비롯해서 사천·고성·하동·창원 등지에 많은 토지와 산림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진주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일부 한국인 자산가들이 일본인과 합자하거나 단독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영세한 형태의 양조업·정미소 등의 사업이나 상점을 운영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근대적 제도와 시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이루어지면서 행정·교통·교육 등 근대적 제도와 시설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시설의 설치는 편리성을 제공해주는 반면,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진주는 여러 차례의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영역이 축소되고 근대도시로서의 발전의 속도가 인근 부산이나 마산에 뒤지기는 했지만, 경상남도 지역의 수부로서 기능은 유지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진주에는 경상남도 도청을 위시해서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진주헌병대 본부(진주·마산·부산·거창에 분대 설치), 진주우체국, 경남 종묘장, 경남 경무부 등 중요기관이 들어서게 되고 그와 관련된 시설들도 설치되었다.
일제는 또한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하여 도로를 정비하였다. 1900년대에 접어들어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도로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1909년 진주~삼천포간 도로를 개통한 후 1910년에 진주~마산간, 1914년에 진주~하동간, 1915년에 진주~거창간, 1918년에는 진주~합천간 도로를 차례로 개통하였다. 또한 1925년 6월에는 진주~마산간 철도가 개통되어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지인 진주의 교통망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교육시설에 있어서도 조선 말 1895년 7월에 소학교령이 제정되면서 진주에도 공립소학교가 개교한 이후 1910년에 사립 봉양학교와 진주공립실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1925년에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40년에는 진주사범학교가 개교하여 초등학교 교원 양성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교육 차별화 정책으로 인해 학교 증설을 억제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는데,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밖에 가난한 아동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뜻있는 인사들이 설립한 야학회도 많이 생겨났다.
 
 
[구국운동]
1910년 국권상실 이래 진주에서는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우리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알리는 한편,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려는 구국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9년의 삼일운동으로, 이해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진주지역에서도 김재화(金在華) 등에 의하여 의거가 준비되어 진주 장날인 3월 18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으며, 5월까지 약 20회에 걸쳐 3만여 명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는 사회운동가들과 백정사회의 지도자들이 형평사(衡平社) 설립을 위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형평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형평사는 진주에 본사를, 각 도에 지사, 각 군과 유명 마을에는 분사를 두는 전국 조직체계를 갖추어 진주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26년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여파가 진주에도 미쳤고, 이를 계기로 민족운동의 통일전선을 의도하는 신간회(新幹會)가 1927년에 결성되고, 진주에도 10월 19일 신간회 진주지회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확산되자 진주에서도 1930년 1월 17일부터 학생들이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민족독립운동은 지하운동으로 전환되면서 비밀결사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진주지역에도 1931년에 진주농고 학생들의 비밀결사, 1932년에 진주협의회와 진주고보 비밀결사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다가 일제의 경찰에 다수 검거되기도 했다.
이러한 진주지역의 항일구국운동은 전통적으로 불의에 대한 강한 의분과 일제에 대한 뿌리 깊은 저항의식이 어느 지방보다도 강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댓글목록

이균님의 댓글

이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대박에게
낄 자리, 못낄 자리에서 어슬퍼게 보일때
'진주라천리길'이라면 봐주고 넘어가던데
뭘 안다고 자랑했는지 부끄럽습니다
몰라서 용감하다더니.
전문학술지 이상으로 촘촘하고 알찹니다
앞으로 연재될 내용 기대할게요
고마워요! 수구초심(首丘初心) 일깨워줘서
그라고 어부인이신 한선생님의 쾌유를 뵙니다.

구자운님의 댓글

구자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여사 간호하랴, 진주에 관한 역사연구하랴 바쁘기 이를 데 없오.

한문으로 쓰여진  '진양지'를 한글로 옮긴 '진양지'를 참고하시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오.
진주문화원이나, 연암도서실에 가면 구해 볼 수 있을 게요.

형평성 운동 등 진주의 근대사에 관한  자료는 경남신문사 대표 박노정(진중14회)과 ,
대하소설 '단야'를 지은 사천 사람 정동주 (기축생)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오.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균이친구, 회장님 고맙소.

전에부터 자료를 정리해봐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마누라 덕택으로
병원에서 휴양중이라 이리저리 자료를
찿아보고 있다오.

우리집 사람은 퇴원한 다음날 상태가
좋지 않아서 다시 입원하여 언제 퇴원할지
기약 없는 몸이 되었소.

담낭제거 수술에서 최악의 결과가
담즙이 새는 것인데
재입원후 3일동안 온갖 검사 다해본 결과
담즙이 샌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3일동안 담즙으로 인해 내장기관이
상한 것이 제일 억울하고
내장이 상할때 환자의 고통은
엄청난 것으로 계속 진통제로
견뎌왔다.
담즙은 강력 소화제로
자기 내장을 소화시키는 상태이니
최악의 상황이다.

어쨌던 친구들아
건강들 하시게.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구박사 고맙소.
진양지는 이미 보고 있고
다른 자료들도 참고 하고 있다오.
그동안 너무나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가능한한 많은 것을
소개할까 한다.

이인섭님의 댓글

이인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퇴원하면 들릴거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환자나 간병인이나 ...
친구야
병은 시험이야
정과 성이 온통 어부인에게로 향햘 때
시험은 끝난거야
자! 힘내자구!!!

임금윤님의 댓글

임금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대규야
진주의 역사 발굴 정리 기술도 참으로 대작이다만
나에겐 제수씨 수술소식은 참으로 더 큰 대뉴스구나.
난 아직 일면상례도 못했는데 이 무슨 벽력이란 말인가.
이 기회에 그동안 못했던 외조도 한번 멋있게 해서 완치시켜라.
나도 열심히 쾌유의 기도하마 !

누군가 한번은 짚어주면 좋을듯 싶더니만
드디어 대박이 내마음을 안듯 시작을 하였구나.
자신의 뿌리의 역사를 모르고 남의 것만 달달 외워대는
한심한 세태에 참으로 참신한 발상이구나.
위의 시리즈 첫 페이지가 거창한걸로 봐서
연재 다음호를 손꼽아 기대하마 !
여러가지로 대박 화이팅이다 !

이원표님의 댓글

이원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대박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네그랴
한여사  도  고생이많네  담즙으로  엄청  아파을 텐데.......
몸이란 최고의  과학이라  자연 치유도  ㅤㄷㅙㄴ단다 
이왕  어쪄누  지금부터라도  맘편히가져라
빨리쾌유 토록  다같이  한맘으로 기도하자 .
먹는거 잘묵고  항상 건강해라 
그래야  간호도하지

묵고잡은거  얘기해라  해서 같다줄께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KY, 이대표 고맙다.

묵고 잡은 거 많지.
퇴원하면 주문할께.
싫컨 함 묵자.
지금 정리하는 자료는
그냥 있을려니 마음이 심란하여
여기 저기 자료를 모아 보고 있는 것이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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