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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4)_배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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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2-24 18:52 조회8,581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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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건너
 
1927년 진주교가 가설되기전까지는 남강의 곳곳에 나루터가 있어 배를 이용하여 왕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2년 지금의 장어집거리에서 망경동까지 배를 서로 연결하여 부교를 만들어 걸어서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다리를 배를 엮어 만든 다리라 하여 배다리라 하였고 현재의 칠암동 강남동 망경동일대를 배건너라고 하게 되었다.
배다리는 평소에는 연결되어 있다가 홍수가 지거나 큰물이 나면 풀어서 양쪽강가에 붙여 놓았다가 다시 연결하곤 하였으며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진 것에 대한 무마책으로 진주교를 1927년에 가설하고 나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칠암동(七岩洞)
 
본시 진양군(晉陽郡) 섭천면(涉川面) 천전동(川前洞)지역으로 남강(南江)의 앞쪽이 되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에는 내동면천전리(奈洞面川前里)라고 하였다.
1918년 5월 1일 진주면(晉州面)으로 편입되고, 차츰 도시화 되면서 1932년에는 일본에 의해 일본식 이름인 소화정(昭和町)으로 칭해지기도 했다.
지금의 칠암동은 1949년 8월 15일 동명변경에 의해 개칭되었는데, 이는 지금의 경상대학교 병원과 산업대학교 사이에 일곱개의 바위가 있어 『치리미』라고 불리어지던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갓골 : 동리 입구에 있는 마을, 곧 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검바웃골 : 이 골에는 검은 바위와 험상굿은 바위가 많으므로 옛날부터 검바우골이라 한다.
▶독제골 : 옛날에 이골에는 산돼지가 많아서 독제골이라고 불러왔다.
▶돌깨비 : 이 동네 골짜기 이름인데 아득한 옛날 돌과 같은 갑옷이나 왔다는 전설이 있다(깨비-갑옷)
▶못골 : 옛날 이 골짜기에 큰 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못은 메이고 없어졌으나 못골로 불리고 있다.
▶빼애골 : 골짜기가 협소하다는 뜻에서 빼애골이라고 일컬어 왔다.
▶삐따골 : 동리가 삐딱(비스듬) 하다는 뜻으로 이 골을 삐따골이라고 불러왔다.
▶에오개 : 산고개인데 인가가 없어 외치고 빼앗고 살인을 해도 모를 정도로 외딴 고개라는 뜻이다.
▶제앵골 : 옛날 이곳에는 많은 뫼꼬리가 살고 있어 뵈꼬리 우는 골짜기로서 제앵골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은 수목이 적으므로 꾀꼬리가 잘오지 않는다고 한다.
▶중골 : 옛날 신라시대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 하여 중골이라고 불리고 있다.
▶치리미 : 현재 경상대의과대학교와 진주산업대학교 사이에 일곱개의 큰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바위들이 있던 곳을 치리미라고 하였다. 현재 바위는 없으나 칠암동으로 명명되고 있다.
▶큰샘 : 진주산업대학교와 남강 사이에 있는 이 샘은 수근이 좋기로 유명하였고 인력으로는 샘을 칠 수가 없었다 한다
▶가는여울 : 칠암동 동남쪽에 있는 내를 이르는 말이다.
▶새동네 : 칠암동 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다.
▶진양교 : 칠암동 남쪽에 있는 다리로 1969년에 준공되었다.
▶치암이 나루터 : 칠암동 동쪽에 있는 나루터로 진양교가 생긴 후 없어졌다.
 
 
강남동(江南洞)
 
본시 진주군(晋州郡) 섭천면(涉川面) 천전동(川前洞) 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에는 내동면(奈洞面) 천전리(川前里)라 하였다. 1918년 5월 1일에 진주면(晋州面) 으로 편입되었고, 차츰 도시화되면서 1932년에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식 지명으로 개칭되어 대정정(大正町)이라 하였다.
1949년 8월 5일에는 강남동(江南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 앞 : 강남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천전이라고도 한다.
▶육거리 : 강남동 옛 동양염직공장 옆에 있는 도로로써 여섯 갈래가 나 있다.
▶장승배기 : 옛날 강남동 소재의 못이 있을 때 그 옆에 있던 표지판 자리가 진주목 당시의 이정표(里程表)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진주역 : 강남동 245-110번지에 있는 역으로 1927년 6월 1일에 세워졌으나 역사확장계획으로 현 역사(驛舍)로 이전하여 1956년 12월30일부로 폐쇄되고 현재 광장만 남아있다.
▶죽림(竹林) : 천전둑 북쪽에 있는 덩소(망경양수장에서 진양교까지)로 대나무숲이 수백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 진주12경(晉州12景)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촉석루(矗石褸)원운(原韻)에 보면 총죽방란 녹영주(叢臨芳蘭錄映洲(대숲과 향기로운 난의 푸르름이 강물 가장자리에 비치니 물빛이 더욱 푸르러라.) 의 구절과 같이 이 대나무 숲에 저녁 노을에 까치, 까마귀 등 조류(鳥類)의 서식처로서도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그 수가 극히 적다.
▶탱자나무골목 : 현재 한국주택아파트(구 초기 해인대학앞 골목, 전 남강 유지 공장)뒷골목 100m 길이에 탱자나무로 담장을 한 골목길을 이름하 였으나, 지금은 탱자나무는 없으며 블록담장으로 개수되었다.
▶천전둑 : 남강변에 동서로 길게 300m로 뻗어있는 둑으로 예전에는 아베크의 산책길로 유명하였다.지금은 없어진 중안초등학교 옆 둑과 장대동 벚꽃둑 다음가는 이름난 둑으로 알려졌다.
▶큰육거리 : 진주교에서 서남쪽으로(하동방면 쪽) 300m(망경동 새마을금고 부근) 지점에 있는 여섯갈래의 도로를 말한다.
▶작은 육거리 : 큰 육거리에서 동남쪽으로 약100m에 위치한 역시 여섯갈래의 도로를 말한다.
▶메기통 : 천전양수장 아래에 웅덩이가 아래 위로 두 개가 있는데 그 웅덩 이에 메기가 많이 서식한다 하여 위쪽 큰 웅덩이를 큰 메기통, 아 래쪽 작은 웅덩이를 작은 메기통이라고 한다. 지금은 메기를 볼 수 없다.
▶둑시장 : 천전둑 중 약200m의 길이로 2일, 7일 진주장의 새벽 벼룩시장으로 장꾼과 인근 농민이 모여 둑시장을 1987년부터 형성하여 아침 일 찍부터 오전까지 반짝시장으로 개장하고 있으나 지금은 진주역사 옆 럭키한주아파트 서쪽 도로변으로 옮겨졌다.
천전양수장 : 망경동209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1960년 12월 1일에 만들어 졌다. 1일 960톤의 물을 생산하여 천전지구 일부에 공급하 였으나 진양호 정수장 확장으로 1989년 8월부터 가동이 중단되었다.
▶임내골 : 숲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둑밑의 마을로 임내동이라고도 한다.
▶뽕밭 : 천전둑 서남쪽에 수천평의 뽕밭이 있었다.
▶닥목새미(닭목샘이) : 법장사 입구에서 하동선 5m지점에 닥목골 입구에 샘이 있었다. 심한 한발에도 고갈되는 일이 없어 상 수도가 천전지구에 공급되지 않을 당시의 유일한 식수원이기도 하였다.
▶밀레니엄광장(천년광장) :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맑고 푸른 남강을 배경으로 역사와 예술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우수한 문 화 유적과 자연환경으로 천년고도의 얼을 되살리 며 주민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망경동(望京洞)
 
망경동(望京洞)은 본시 진주군(晋州郡) 섭천면(涉川面) 천전동(川前洞) 지역으로 1914년 3월 1일에는 내동면(奈洞面) 천전리(川前里)라 하였다. 1918년 5월 1일에는 진주면(晋州面)으로 편입되고, 차츰 도시화되면서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식 지명으로 개칭되어 명치정(明治町)이라 하였다.
1949년 8월 15일에는 망경남·북동(望京南·北洞)이 되고, 1990년 4월 1일에는 이를 통합한 망경동(望京洞)이 되었다.
▶관장골 : 망경산 등성이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골짜기로 산세가 좋고 물이 많이 옛날에는 관가의 높은 벼슬아치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관장못골 : 관장골 하단 부에 진주역이 세워지면서 기관차에 이용할 물을 저장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못이다. 지금은 진주역 부근의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그 부근은 일제시대에 일본군경이 사격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망경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금선암(金仙庵) : 섭천 남쪽에 있는 절로서 1947년에 세웠으며 단성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내리수 : 약새미골의 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망경산의 중앙부에 서 뻗어있으며 하단부의 관장골 못에 연해 있고 계곡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암반위를 맑은 물이 항상 흐르고 있어 빨래터와 여름철의 목욕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겨울철엔 많은 고드름과 얼음이 아주 두껍게 얼어 옛날 진주시내의 돈 많은 부자들은 이곳의 얼음을 떼어다가 저장하여 여름에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단성석조여래좌상(丹城石造如來坐像) : 금선암에 있는 미륵으로 높이 136m이다. 본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묻혀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물 371 호로 지정되어 있다.
▶덤 밑 : 망경산 북쪽 남강과 연해 있는 (지금의 망경양수장) 벼랑(덤)을 말 하는데, 내동면 독산마을로 통하는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국토개발계획에 의하여 진주~순천간의 철도가 놓여지고 진주~하동간의 자동차 도로가 되어 있다.
▶망경대 : 망경산에 있는 대(臺)인데 옛날 국상 때에 이 곳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고 망곡(望哭) 하였다.
▶망경산 : 망경동과 내동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옛날부터 서울로 연락하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봉수대는 1995년에 복원하였다. 방송국중계소가 세워져 있다. 정상 주변에는 무궁화 꽃동산을 가꾸어 두고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망운암 : 망경산에 있는 절이다.
▶망진산 : 섭천 서쪽에 있는 산이다.
▶미륵골 : 내리수 계곡 하단부의 북쪽 언덕에 연대미상의 1.5m 높이 미륵불이 서 있는데, 이 미륵으로 인하여 내리수 계곡을 미륵골이라고 한다. 50여년 전까지도 미륵불이 전각속에 들어 있었으나 정해진 관리자가 없어 관리의 소홀로 전각이 허물어져 없어지고 미륵불만 남아 있다.
▶박석거리 : 망경산의 제일 북동쪽에 있는 계곡으로 순 암반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흘러내려 빨래터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암반지대를 파 일구어 농토와 주택지로 변하고 그 흔적만 조금 남아있다. 계곡 너머가 남강이다.
▶반장못 : 반장골에 있는 못으로 1927년에 준공되었다.
▶산 정 : 망경산의 산주(山主)가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산막 겸 피서용 별장과 같이 건축한 한식가옥 한 채가 있는데, 이것을 산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산주의 후손이 살고있다.
▶섭 천 : 해새미 주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연하여 있는 마을로 천전지구에서 가장먼저 취락이 형성된 곳이며, 남동쪽으로 기울어진 등성이에 주택지를 이루고 있고, 북쪽은 대밭(竹林)으로 강을 건너 진주성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기에 섭천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현재 망경북동과 망경남동의 망경산 동편 산자락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섭천골 : 섭천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섭천못 : 섭천 마을의 동남쪽 어귀에 위치한 자연 못으로 연꽃이 장기간 만발하여 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현재는 완전 매축되어 현 망경초등학교 운동장과 주변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섭천못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화에 옛날 진주에 철도가 놓이지 않던 시절에 섭천못 가에 철길이 놓일 것이라는 어느 지관이 섭천못에 세 [쇠(鐵) 또는 소(牛)가 진주지방의 사투리로 세(牛)라 하며 쇠(鐵)를 세 또는쎄라 하였다]가 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진주에 철도가 놓여져 기적소리가 울리게 되니, 쇠가 울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소가 운다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솔밭등 : 관장못골의 북방에 들러져 있는 조그만 등성이로 옛날엔 송림이 울창했으나 지금은 고목 20여 주가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주택지가 되어있다.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진주의 제2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했었다고 하며, 日人들이 세운 재봉기술학원이 이 등성이의 정상에 있어 재봉학교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으나 광복후 학원은 없어져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고 그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수원지 : 섭천 북쪽에 있는 상수도 수원지이다.
▶숭솔박 : 섭천 남쪽에 있는 바위이다.
▶숭솔백이 : 일명 식송암(食松岩)으로 섭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새미골 : 관장골의 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계곡으로 옛날 이 계곡의 중간지점에 약물이 솟는 약샘이 있었다고 한다.
▶양 달 : 섭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은곡(魚隱谷) : 일명 에엔골로 섭천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옴 달 : 섭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총림사 : 섭천 서쪽에 있는 절로서 1939년 심경재(沈鏡宰)가 세웠다.
▶큰새미 : 솔밭등의 북쪽 등성이 너머 하단부에 섭천마을의 남쪽 중앙지점에 위치한 인공우물로 만든지가 60여년 되었으며 우물의 직경이 2m, 깊이가 10m의 큰 우물이다.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해새미 : 박석거리 계곡의 맨 하단부에 수백년 묵은 고목 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둘레가 4m가되는 홰나무(회화나무의 준말로 진주지방 사투리로 해나무로 발음함)뿌리 쪽에 맑은 물이 나와 샘(우물)을 만들어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하였으며 이 물을 마시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홰나무에 해(害)를 끼치는 사람은 생명의 위험이 닥친다는 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둘레 50cm 정도의 새끼 홰나무와 같이 우물이 남아있으나 식수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닭 목 : 내동면 독산으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마을의 생긴 모양이 닭 목과 같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처음에 닭목 골짜기에 모여 살게 된 것이 망경동의 시초이다.
▶망경대 : 망경산의 꼭대기이다. 진주 명승지의 하나로서 고려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와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늘 이 산에 올라와 멀리 북쪽(서울에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제 방 : 남강변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둑으로 수차 보수하여 안전하게 되어져 있다.
▶죽 림 : 남강 남쪽 연변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대숲으로 제방과 아울러 여름철 유원지로 좋은 곳이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을뿐 “문화거리”로 명명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주약동(株藥洞)
 
본래 진양군(晉陽郡) 섭천면(涉川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천전리(川前里)라 하여 내동면(奈洞面)에 편입되었다가 1939년 일제시대 명치정(明治町)으로 천전동(川前洞)에서 분할되었고, 1949년 망경동(望京洞)으로 개칭되었으며, 1954년 망경남·북동으로 분할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망경동으로 통합되었다.
주약동(株藥洞) 본시 진주군(晋州郡) 섭천면(涉川面) 약동(藥洞) 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에는 나동면(奈洞面) 주약리(株藥里)라 하였다. 1938년 7월 1일에는 진주읍(晋州邑)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 8월15일에는 주약동(株藥洞)으로 개칭되었다.

▶갓 골 : 동구 들머리에 있는 마을로 바깥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갓(變)골이라 이름하여 동민 소유의 마을회관이 있어 야학교의 역할도 하였고 음력 섣달 그믐에는 동민들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내고 골짜기의 고개는 당산이라 하여 여기서 제(祭)도 지냈다고 한다. 300년 묵은 포구나무가 있어 동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있으며 특히 297번지에는 박현주(朴賢柱) 스님이 세웠다는 보덕암(普德庵)이 있다.
▶나장골 : 애골 건너편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입구에는 200년이 넘는 느티나 무가 개울가에 있었으나 큰 수해가 있은 후 자연 고사(枯死)되어 없어졌다.
▶망진산 : 약골 서쪽에 있는 산이다.
▶법수골(法首谷) : 갓골 다음 골짜기인데 옛날 절골에 있었던 봉명암(鳳鳴庵) 을 드나드는 절 입구에 수호신 역할을 한 벅수(長丞)가 세워진데서 유래되었다.
▶새벼리 : 본도의 참새밋골과 다릿골에 걸쳐 있는 절벽(두원중공업 남단과 석류공원 북편 남강변)을 일컫는다.
▶구석다리 : 새벼리 입구에 있는 교량이다. 망성교라고도 함.
▶야싯골 : 지금의 한보은빛마을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짝마을로 옛날에는 이 골짜기에 숲이 짙어 여우가 아주 많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왜앵골 : 본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 골 : 본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여기에 절이 있었다. 옛날 산 중턱에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명암(鳳鳴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목탁소리가 새벽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고 하였으며, 암자가 위치한 자리가 명당이라 신도도 많았고 번창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도둑의 무리가 득실거려 약탈을 수없이 당하여 견디지 못하여 조선 말엽에 없어졌다고 하는데 몇 년전만 하더라고 약간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빈대가 많아서 절간을 없애버렸다고 하기도 하지만 도둑의 무리들을 빈대에 비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1938년에 박현주(朴賢柱)란 스님이 넓게 덕을 베푼다는 뜻에서 보덕암(普德庵)이란 암자를 이곳에 창건하여 운영하여 왔으나 6?25 동란을 전후하여 많은 수모를 겪다가 1956년경에 지금의 주약동 297번지로 옮겼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점쟁이가 세웠다는 조그마한 약선암이란 암자가 있을 뿐이며 골짜기 입구에는 나병도 고치고 땀띠도 없앤다고 하는 찬 약수터가 있어 옛날부터 시내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 주민들의 생수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애골(기왓골) : 본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여기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지금도 주약동 265번지 강수탁씨 집 뒤편에 기와가마가 있었는지 기와조각이 많이 나온다.
▶지시골(智水谷) : 가지막골 건너편 골짜기로 내동면 지수마을로 넘어가는 골짜기라 하여 지수골이라 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예부터 칡덩굴이 무성하여 칡덩굴 기둥감도 생산되어 촉석루의 건축자재의 일부로도 활용되기도 하였을 정도로 칡덩굴이 울창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최영세씨 소유 대밭속에는 이름 모를 장군의 묘라고만 전해지는 묘 1기가 있는데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 때 어느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진터골 : 본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청 골 : 애골 건너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입구에 수령 500년을 전후한 느티나무가 있어 주약동의 역사를 한 몸에 간직한 듯 두루 50m를 넘게 가지를 뻗어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골짜기의 개울은 맑은 물과 검은 바위 반석이 깔려 있어 청골이라 하였다. 골짜기 안쪽에는 작은 절이 있는데 장홍권(법명:장종천)의 꿈에 희고 큰 수염을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흰 종이에 내천사(內泉寺)란 글을 써 주어 절을 세우라는 선몽이 있어 삼부신앙(三部信仰)으로 절을 세워 1989년 4월 8일 창건(創建)하여 개원식(開院式)을 가져 조계종 158-160호로 등록 승인되었다.
▶가지막골 : 공동묘지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울가에는 가재가 많아 어린이들이 잡으러 다니기도 한 곳으로 지금은 가재를 발견하기 힘들다.
▶봉화골(烽谷) : 망경산 남쪽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망경산에 봉화대가 있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봉화를 올렸다는 골짜기라 하여 봉화골이라고 한다.

 

댓글목록

이인섭님의 댓글

이인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경황이 없을텐데 연일 고생이 많소.하나 집고 가야할 것 같아서...
강남동편 죽림의 설명 중 <촉석루 원운에 ......  물가에 비치네.>까지, 촉석루 맨 앞줄 기둥에 청천(菁川 ) 신유한(申維翰)이 지은 촉석루 주련에 있는 구절인데 총죽방란록영주(叢竹芳蘭綠映洲)라 하고 총죽방란이 물 가장자리에 비치니 물빛이 더욱 푸르러라.어떨지 모르겠다. 벽수(碧水)는 그냥 물이 푸르다고 할 때를 말하고 녹수(綠水)는 푸른 나무 그림자가 비쳐서 더 푸르게 보이는것을 말해. 그리고 총죽과 방란은 명사(名詞)로 글자를 풀어서 번역을 해서는 안돼.한시(漢詩)는 그 자체를 음미하는게 좋은데. 참고가 되었으면....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사장 말이 맞아.

미안하이. 고쳐 놓았네.

단지 "叢竹芳蘭"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듯 해서 "대숲과 향기로운 란"으로 풀었다.

자료를 복사하다 보니 이상하게 되었다.

이참에 촉석루의 목각 주련에 새겨진

조선조의 청천(靑泉) 신유한(申惟翰)의 시를 소개해야겠다.

이 시는 우리 조부께서도 즐겨 암송 하셨다.
(참고로 육성 녹음 테이프도 있음)


  晉陽城外水東流, 叢竹芳蘭綠映洲

  天地報君三壯士, 江山留客一高樓

  歌屛日暖潛蚊舞, 劍幕霜侵宿鷺愁

  南望斗墟無戰氣, 將壇笳鼓半春遊


  진양성 밖의 물은 동으로 흘러

  대숲과 향기로운 난의 푸르름이 강물에 비치네.

  하늘 땅 사이에 임금에게 보답한 삼장사여 

  강산에 떠돌아 머무는 나그네가 높은 다락에 올랐어라.

  노래는 병풍을 두른 듯 싱그러워 물 속 교룡도 덩달아 춤추건만

  칼의 진영에 찬서리 치면 잠든 해오라비의 수심,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두 별 자리에 싸움의 기운이 없거니

  이 장단에서 것대와 북을 올려 한 봄을 노닐도다.

이인섭님의 댓글

이인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또 몇자 쓰야겠다.
   
                晉陽城外水東流      叢竹芳蘭綠映洲
                天地報君三莊士      江山留客一高樓
                歌屛日照潛蛟舞      劍幕霜侵宿鷺愁
                南望斗邊無戰氣        將壇가鼓半春遊
  가병은 촉석루 및 강변에 병풍처럼 늘어 선 바위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고 남강수가 서입동류하고
  강물에 비친 대숲과 방란의 아름다운 모습, 촉석루엔 풍류객이 있고 병풍저럼 늘어선 바위에
  햇살이 비치니까 물속의 이무기 인들 춤을 출 수 밖에 ...
  검막장단(검막장단)은 임진왜란의 또 다른 이름이야.
  임진왜란을 용사란이라고도 하는데 검막장단은 임진년의 대첩이 아니라 계사년의 참패를
  표현하는 말이야.
  검막은 왜군을 말하는데  왜군에 의해 서리를 맞은 모든 풀들이 시들어 죽듯이 칠만 민관군의
  전멸을 그렇게 불렀어.
  숙로수는 잠든 해오라비의 수심이 아니라 宿**愁가 "으로 하여금 시름에 잠기게 하다"의
  숙어임을 착각한 것 같아.
  우리 모두가 진주의 홍보대사가 아니겠소?
  김대감님이 수고가 크신데 정말 고맙소.
  계속 수고 해 주십사는 부탁 드리고 싶고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면 또 이바구 해도  데거째?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럼 그럼...
이도사가 다시 풀어주니
다른 뜻으로 다시 음미해볼 수 있어 좋네.

난 조부로부터 들은 풀이라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우리 조부의 음성을 답글에서 소개해 줄께.

임금윤님의 댓글

임금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배건네 치리미 섭천 등등
참으로 오랫만에 들어보는 뇌리에 친숙한 말이구나.
닥목(닭목)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당미" 라고 불렀고
진터도 "진티"라고 불렀다.

"섭천 쇠도 웃겠다 !" 라는 말이
이렇게 유래되었음을 너의 글에서 알고
추억의 한자락을 잘 음미해 보겠네.

그나저나 두부부 다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난 아무 도움도 못되 정말 미안하구나.
쾌유하기를 빌고 또 빌마.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KY 고맙다.
전화 도중에 회진이 있어서
제대로 말도 못했네.
덕분에 많이 호전이 되었다.
이번 토요일 퇴원 예정이다.
건강해라.
다음은 나동을 정리해서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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