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지식1( 정조에 대한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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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자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2-11 10:23 조회9,4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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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를 과연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올려 정조대왕으로 불러도 좋은가?
이번에 발굴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을 살펴보면, 정조는 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徐龍輔. 1757-1824)에 대해서도 “호로자식”(胡種子)이라 하는가 하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金邁淳)에게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자,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으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고 했다.
나아가 황인기(黃仁紀)와 김이수(金履秀)라는 신하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라고 했다.
심지어 한문 편지 중간에 난데없이 한글을 쓰기도 했다.
1797년 4월11일에 보낸 편지 끝부분에 ‘뒤죽박죽’이 발견된다.(사진3 참조)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뒤죽박죽’을 썼을 가능성도 있으며, 격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다가 마땅한 한문 표현을 생각하지 못해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현모 교수도 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를 평하기를 “진실한 선비의 전형이라기보다는 국왕지지 세력조차도 당혹스러워 할 정도로 기만과 독단을 자주 사용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우리는 이번 비밀편지를 통해서 정조가 ‘정치 쇼’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1798년 9월18일,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심환지에게 첫 번째 사직상소를 언제 낼 것인지를 물었으며, 그에 대한 답변과 사직상소 문안이 도착하자 “사흘 후(9월24일)에 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고 사직상소 문안도 직접 손을 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편지들 중 하나에는 심지어 “내일 어전 회의에서 이런 사안을 논의할 터이니, 심환지 당신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 놓으면 내가 승인하겠다.”고 입을 맞추는 내용도 있다.
또한 정조는 극히 쫀쫀한 인물로서, 비밀편지 앞부분에 편지를 보는 즉시 없애버리라고 매번 당부하였다.(사진4 참조)
편지마다 “此紙卽卽丙之”(이 편지는 즉시 불태워버려라), “此紙卽扯之”(이 편지는 즉시 씻어버려라), “覽卽扯去”(보는 즉시 씻어버려라), “此紙卽洗之或還送如何”(이 편지는 즉시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가 하라), “此紙覽後卽扯之”(이 편지는 보고난 후 즉시 씻어버려라), “切勿暫留”(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 “此紙勿留”(이 편지는 남기지 말라), “卽扯之”(즉시 씻어버려라) 등의 문구가 발견된다.
◇정조는 과연 독살되었는가?
1800년(정조 24) 1월17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릉원(顯隆園)을 찾았다. 그 자신에게는 마지막 현릉원 방문인 이날 정조는 아버지 무덤을 둘러보다가 설움이 북받쳐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신하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두 사람이 정조 좌우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 사람이 좌의정 심환지였고 다른 사람은 우의정 이시수(李時秀)였다.
이로부터 5개월가량이 지난 1800년 6월28일 정조는 타계했다.
이 날짜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는 새로 승지에 임명한 김조순(金祖淳) 등을 접견하다가 병세가 위중해졌고, 심환지가 다시 만났을 때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다급해진 심환지가 정조의 입에다가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 인삼차, 청심환을 넣어주려 했지만 정조는 전혀 삼키지를 못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심환지는 정조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고, 나아가 정조가 죽을 때 그 옆에서 약을 들도록 했다는 이 기록에 주목해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돼 왔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정조의 비밀편지들은 심환지가 정조의 정적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그의 심복이었음을 입증한다.
나아가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 자신의 편지에는 정조가 말년에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정조는 이미 말년이 되면 돋보기안경을 쓰고도 글을 읽지 못할 정도였으며, 토사곽란이나 다른 병으로 며칠 동안 앓아눕는 일이 종종 있었다.
죽기 두 달 전인 4월17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르네. 눈곱이 짓무르지 않을 때 연달아 차가운 약을 먹으면 짓무를 기미가 일단 사라진다. (중략)번갈아 (온몸이) 통증을 일으키니,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
사망 13일 전에 쓴 편지는 더욱 악화한 병증을 호소한다.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 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 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 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體貌)를 세우고자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榻敎)를 써 주었다. 올 한 해 동안 황련을 1근 가까이나 먹었다. 마치 냉수 마시듯 하였으니 어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밖에도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 이만 줄인다.”
정조의 병은 이미 회복불능단계에 돌입했던 것이 확실하다. (2009.02.09. 연합통신)
사진3.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끝부분에 뒤죽박죽이란 한글이 들어있음)
사진4.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보는 즉시 태워버리라는 내용이 들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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