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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6)_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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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3-02 17:36 조회7,61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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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전승되는 설화를 소개한다.
진주지역에는 운돌전설(鳴石傳說)과 같은 지명전설과 정온전설·강목발전설 등의 인물전설이 타지역보다 유난히 많이 전승되고 있다.

「가난한 정승집 이야기」
딸만 여덟인 한 정승이 있었는데 매우 가난하였다. 부인과 딸들은 그 정승을 남편이나 아버지 대신 대감으로 불렀다. 어느 날 배가 너무 고파 하소연하니, 대감은 다음 날 아침에 들에 나가서 바깥 구경을 하고 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식구들이 나가보니 까마귀, 까치와 같은 새들이 놀고 있었다. 대감이 구경한 소감을 물으니 식구들이 별로 볼 것도 없고 새들이 날고 장난치며 놀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대감이 또 딸을 불러 배가 그렇게 고프냐고 하자 딸이 많이 고프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대감은 딱지에 글을 써서 주면서 대문에 붙이라고 하였다. 딸들이 바깥의 큰 대문에다 딱지를 붙인 후 활짝 열어놓고 마당을 깨끗이 쓸어놓으니 벼가 풀풀 날아서 들어왔다. 벼가 가득 차자 대문을 닫으라고 하였고 그 벼를 찧어 딱 두 끼를 해먹었다. 이튿날 또 딸 여덟 명을 들에다 내보냈다. 딸들이 들에 나가니, 신나게 울던  까마귀는 문에서, 까치는 논에서 비실거리고 있었고 다른 새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집에 와서 이렇게 변한 사실을 대감에게 말하자 식구들이 배불리 먹으니까 날짐승들이 먹을 게 없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짐승들을 죽여야 되겠느냐고 물었다. 딸들은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자 집에 있던 벼를 풀어 날짐승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까마귀도 까치도 그 전처럼 날고 기고 하면서 즐겁게 뛰어놀게 되었다.

 「가마못 구렁이」
비봉산(飛鳳山) 대룡골 동편 능선을 지나 집현면(集賢面)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못재이고, 그 아래 지금의 봉원중학교 자리에 가마못이 있었다.
옛날부터 이 못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하여 누구나 못 가까이에 가기를 꺼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못 둑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고기를 낚고 있었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무언가가 담배 연기를 향해서 연기같은 것을 내뿜곤 했다. 한참을 그렇게 하더니 갑자기 짚단만한 구렁이가 가마못에서 나타났다.
구렁이를 본 노인은 너무 놀라서 낚싯대를 버리고 정신없이 달아나 봉곡동(鳳谷洞) 타작마당까지 도망을 쳤다. 그런데 뒤에서 구렁이가 꿈틀대며 따라오고 있었다. 마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달려오던 노인 뒤를 따라온 구렁이를 보고 타작하던 사람들은 도리깨를 들고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구렁이를 타작하듯이 두들겨 구렁이를 죽였다.
구렁이가 피를 흘리며 죽자 사람들은 보릿대로 덮어놓고 불을 질러 태워버린 후 집으로 갔는데, 그날 밤에 모두들 꿈에 구렁이가 나타나서 “너희들이 나를 죽여 저승으로 보내 황천으로 가게 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갈마정 이야기」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올라가는 길에 속사마을(옛 사월마을)을 지나다 목이 말라 마침 갈마정 우물에서 물을 긷는 처녀에게 물을 청했다.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을 훑어 물 위에 띄워 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나뭇잎을 후후 불어가며 천천히 물을 마신 후 그 연유를 물으니, 처녀는 “선비님이 너무 목말라하는 것 같아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두려워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다.”고 대답하였다. 이성계는 처녀의 지혜에 감탄하여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 건국 후 진주가 진양 대도호부로 승격된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이 일로 인해 그 처녀는 태조의 왕비(강비)가 되었다고 하며, 왕비의 내향이어서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갈봉이 보따리 털어먹을 놈」 
옛날 이반성면 한골에 한 여인이 살았는데, 이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 ‘갈봉이 바위’라는 큰 바위 아래서 백일 기도를 드려 아기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갈봉이가 태어났다.
갈봉이의 집은 가난하여 어머니가 엿장사로 생활을 꾸려나갔는데, 어머니는 엿방에 가서 엿을 만들어 와 일부는 집에다 남겨 놓고, 나머지는 엿판에 담아 머리에 이고 엿을 팔러 나가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먹을까 싶어 일부러 시렁 위에다 두었던 엿이 날마다 몇 개씩 없어지는 것이었다.
집에는 어린 갈봉이만 있고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엿을 팔려고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엿이 자꾸 없어져서 갈봉이 어머니는 늘 누가 묵었을까 궁금해 하면서 골치아파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어머니가 장사를 하러 나가면 키가 작은 갈봉이가 어머니 몰래 쇠를 달구어 시렁 위에다 얹어 놓은 엿그릇에 집어넣어서 엿이 쇠에 달라붙으면 내려서 먹었던 것이다.
이랬던 갈봉이가 자라서는 많은 부하를 거느렸다. 하루는 건너 마을 가산리(佳山里)에 그날 짠 명주 베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을 보내어 명주를 훔쳐오게 하였다. 그러나 부하들은 명주를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 그냥 돌아왔다. 그러자 갈봉이가 빈손으로 돌아온 부하들에게 방법을 일러 주었다. 쥐가 든 것처럼 베틀을 건드려 달그락 소리가 나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명주가 없는 집이고, 달그락 소리에 명주 둔 곳을 살펴보면 명주가 있는 집이라고 하면서 다시 부하들을 보내어 명주 베를 훔쳐오게 하였다.
또 하루는 갈봉이가 동네 양반 부잣집을 털었는데, 그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둔 백동(白銅)으로 만든 제기를 훔쳐갔다. 그러자 부자는 갈봉이의 소행인 줄 알고 제기를 찾아 나섰다. 갈봉이를 찾으려고 고개를 넘어 가는데, 그럴 줄 미리 알고 갈봉이가 누워있었다. 갈봉이는 제기의 값을 이백 냥에 흥정하였다. 그러나 그 돈을 집으로는 한 푼도 가져가지 않고 길을 다니다가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갈봉이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해오는 말로는 조정에서 체포령이 내려서 대구 감영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으며, 갈봉이를 죽인 대구 감영의 영장도 그 다음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입에는 이런 말이 전해졌다고 한다. ‘갈봉이 죽이고 대구 영장 죽고, 강목발이 죽이고 진주 영장은 죽었다.’
 
  「강씨 문중의 역장(逆葬) 유래」 
 
진주 가자촌에는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혹시 뛰어난 인재가 나면 나라를 탈취하는 역적이 배출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벼슬이 높고 재주가 출중한 사람이 나면 오히려 나라 임금이 걱정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나라의 명풍수(名風水)인 지관(地官)을 보내어 그 인물의 고향에 가서 왜 그런 인물이 나게 되었는지 풍수를 보게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나라에서 국풍(國風)을 보내어 강씨 문중을 조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지관이 진주 가자촌으로 내려와서 강씨 조상의 묘를 보니 과연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지관이 서울로 올라가서 임금님께 그 사실을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다시 명을 내려 그 안의 묘를 역장시키도록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일 웃어른의 묘를 가장 아래로 내리고 제일 아래 있던 묘를 제일 위로 올리고 해서 웃어른부터 차례로 위로 써올라 갔다고 해서 역장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설에는 「용두혈 자리설」이라는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원래 그 명당은 용두혈(龍頭穴)이어서, 윗대 어른의 묘를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 제일 아래에다 써야 된다고 해서 아래에서부터 용의 몸통 쪽으로 해서 위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주 지역의 강씨 문중에서는 용두혈 자리설을 믿고 있고, 나라에서 국풍을 보내어 역장을 하게 했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고 한다.

  「강함 선생의 효행」
 옛날에 강함이라는 외자 이름의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문인으로 경학에도 밝고, 학문을 한 큰 선비였다. 그러나 시세가 불우하여 임진왜란 때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열두 살에 어머니가 병이 나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강함 선생은 항상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다가 반찬을 해드리곤 했는데, 하루는 고기를 잡다가 날이 저물어 밤이 되었다. 밤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데, 앞에서 호랑이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강함 선생이 서 있으면 호랑이가 길을 비켜주거나 집으로 바래다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죽을 무렵 강함 선생을 불러놓고 말했다. “너는 참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효자다. 내가 죽으면 그 날 옥상에서 효자 강함이라꼬 세 번을 외치마.” 실제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옥상 위에서 소리가 “효자 강함아.”하고 세 번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생전 평소에 어머니는 꿩고기를 좋아하여 어머니 3년 상을 지내면서 꿩고기를 한 달에 두 번씩 꼭 구하여 올리곤 하다가 한 번은 구하지 못하여 걱정을 하고 있는데, 꿩 한 마리가 지붕에서 날아 내려와 빈소 앞에 툭 떨어지는 것이었다. 강함 선생은 그 꿩을 잡아서 빈소에 전을 올렸다고 한다.
그 후에 마을 사람 하지명당이 그 효행을 적어 나라에 상소를 해서 나라에서 강함의 효행을 잊지 말라고 정려(旌閭)를 내렸다고 한다.
 
  「개가한 어머니 찾기」 
옛날에 아들 삼형제를 두고 개가한 어머니가 있었다. 팔자를 고치겠다고 다른 데로 다시 시집가서 살았지만 거기서도 여전히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참다못해 다시 자식들에게 돌아왔으나 아들들은 모두 냉담했다. 큰아들도 싫다, 작은아들도 싫다, 모두 보지 않으려고 하자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다시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집을 나가면서 젊은 시절에 시집올 때 입었던 명주 저고리의 시침을 모두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원한을 맺듯이 그 시침 떼어낸 것을 맺고 또 맺고 창창 꿰매다시피 하여 집을 나섰다.
그 뒤에 아들들은 장성하여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답답한 나머지 점쟁이를 찾아가서 원인을 물어보았더니 부모가 원수를 맺고 가서 자식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점쟁이는 이제라도 어머니를 찾아다 모시면 삼형제가 모두 자식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삼형제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어머니를 찾으러 다녔다. 마침내 다른 고을에 살던 어머니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머니가 입고 있던 저고리의 맺힌 시침은 풀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어 삼형제는 다시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점쟁이는 성냥 한 갑이면 다 해결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삼형제는 명주 저고리를 성냥으로 불살라버렸다. 그 뒤로 아들 삼형제는 소원대로 아들을 줄줄이 낳았고, 어머니는 손자를 안고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잘 살았다고 한다.
또 옛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다섯이나 낳았으나 다시 시집을 갔다. 자식들이 울며불며 매달려도 매정하게 떼어내고 집을 나갔다. 그러나 다시 시집가서도 못살아 결국 거지가 되었다.
어느 눈 오는 겨울, 큰아들 집에 동냥 온 늙은 거지가 있어 보니, 뜻밖에도 자기 어머니였다. 큰아들은 아무 말 없이 늙은 어머니를 사랑방에 모셔놓고 안채로 가 부인에게 “눈도 설설 오고 우짠지 오매가 보고 젚다. 이럴제는 오매가 찾아오머 우리가 아무 말 없이 뫼실껀데.” 하고 말하니, 부인도 “그렇지요. 어무이가 계시머 참 좋지요. 어디 있는 줄만 알먼 내가 벼락같이 뫼시러 가겄어요.”하고 답했다.
그런 식으로 큰아들이 동생 부인들을 모두 만나 말을 걸어봤는데, 다행히 며느리 다섯 모두 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큰아들이 사실대로 말하자, 동생과 제수들은 버선발로 사랑방으로 뛰어가 다시 찾은 어머니에게 절을 하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다음날 소와 돼지를 잡고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잔치 도중 큰아들이 패랭이를 손에 높이 바쳐 들고 동네 어른들에게 “제 어무이가 살러 갔다가 이 참에 제 집으로 돌아왔입니더. 제가 이랬이니 어디 넘캉같이 번들한 갓을 씨겠습니꺼? 피랭이를 쓰겠습니더.” 하고 말하니, 동네 어른 중 나이 많고 학식 깊은 분이 손을 들어 말리다가 키가 모자라 담뱃대로 큰아들의 패랭이를 벗겨내며 “자네가 참 효자네. 효잔데 피랭이는 당치 않은 말이네.” 하며 패랭이 대신 갓을 억지로 씌웠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동네 어른들도 큰아들의 행동을 칭찬하고 어머니를 다시 모시는 데 찬성하였다.
 
  「개구리바위와 용설터」
옛날에 어떤 스님이 마동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았다. 어느덧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차례가 되어 그 집 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렸다.
바깥주인은 마침 출타 중이었고, 안주인만 있다가 목탁소리를 듣고는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는 남루한 차림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하는 스님이 있었다. 안주인은 줄 것이 없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스님은 계속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하였다. 그러자 안주인은 쇠똥을 한 바가지 퍼서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안주인이 떠 준 쇠똥을 받아서 돌아섰다. 이때 마침 바깥주인이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안주인의 잘못을 정중히 사과하고 쌀 한 말을 시주하였다.
시주를 받으며 스님은 바깥주인의 안색을 살펴보더니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바깥주인은 부친이 병으로 누워 계시는데 아직 묏자리를 못 잡았다고 하자 스님은 재물이나 자손이 번성할 명당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명당 아래에서 멱을 감지 말라고 재삼 당부를 하고는 스님은 떠나갔다.
얼마 후 부자는 부친이 죽자 그 명당자리에 묘를 썼다. 그러자 집이 날로 흥하게 되었다. 어느 날, 탈상을 한 안주인이 더위를 참지 못하고 강으로 내려가 몸을 씻었는데, 그 순간 부인은 그 자리서 돌로 변하여 마치 개구리 모양이 되었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부터 그 집안에는 여자만 얻으면 미치거나 악녀가 되어 날뛰었다. 그런 날이 지속되자 가산은 기울고 주인은 답답한 마음에 지관을 불러 묏자리를 보였다. 지관은 묏자리는 좋은데 강 가운데 있는 개구리가 죽은 용의 허리에 파리 떼가 엉긴 것처럼 알을 까놓은 형국이라 아깝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개구리 바위 근처에서 멱을 감으면 빠져죽는다는 말이 전하고, 용설터에 산죽(山竹)이 나면 난리가 난다고 하는 말이 전해졌는데, 6·25때 산죽이 났다고 한다.
 
  「개똥밥과 효부」
옛날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갔는데 시집이라는게 말이 집이지 지옥이었다.
시어머니는 봉사고 남편은 앉은뱅이라. 집이라고 있는 건 비가 오면 방바닥이 흔건히 젖어 물난리를 겪는 게 예사고 먹을 건 좁쌀 한 톨도 없었다.
시집가는 날부터 남의 집 이를 해주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데 여자 몸으로 벌어 봐야 시어머니와 남편 뒷바라지도 어려웠다. 하루는 남의 집 방아품을 가려는데 장대 같은비가 내려 이나마 어렵게 됐다. 하루라도 일을 안 나가면 세 식구가 굶어 죽을 판이라 비가와도 방아를 찧나 하고 길을 나섰다.
길을 가다 보니 방앗간 집 개가 변을 보는 데 채 삭지도 않은 보리쌀이 가득 섞여 있었다. 방앗간 집 개가 찧어 놓은 보리쌀을 실컷 먹고 길에다 변을 갈기는 모습을 보고 며느리는 절로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양식이 없어 굶어 죽을 판인데 개는 무슨 복이 많아 저렇게 먹는가?”
그러다 그는 방앗간 가는 것을 그만두고 남들이 안보는 새 개똥을 긁어모아 빗물에 씻고 우물물을 떠다 또 씻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 보리쌀이 바가지에 반쯤 찬다.
그길로 곧장 돌아와 보리밥을 지어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드렸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만날 죽만 먹다가 보리밥이나마 먹고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이웃에서 모심기를 한다며 좀 도와 달란다. 어느새 하늘이 개고 별이 나자 서둘러 모를 심어야 하는 게 장마철 농사다. 막 모를 심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면서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런데 모를 심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소리를 지른다.
“여기 누구 중에 죄지은 사람이 있다. 하늘이 노해서 저러니 죄지은 사람은 빨리 나서라.”
이때 며느리가 모춤을 던지면서 나섰다.
“죄를 지은 것은 나예요. 세상에 개똥 속에 섞인 보리쌀로 시어머니 밥지어 드린 년이 죄지었지 누가 죄를 지었겠어요?”
하면서 울상을 짓는다.
다른 사람이 말을 잇기도 전에 하늘이 쩍 갈라지면서 번개가 치면서 불칼 같은 벼락이 며느리 앞에 떨어지는데 모드 논에 넘어지고 자빠지며 혼이 나갔다.
벼락맞아 죽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며느리는 지은 죄가 있어서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가 돼 있었던지 꼼짝도 안하고 그대로 서 있는데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뜻밖에도 이상한 궤짝이 하나 놓여 있었다. 모내기를 하던 사람들이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궤짝이 하나 있는지라 논 주인이 먼저 나선다.
“이건 우리 거야. 우리 논에 떨어졌으니......”
하면서 궤짝을 열려고 했으나 꼼짝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차례대로 열려고 해 봤으나 아무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며느리가 손을 갖다대니 저절로 열렸다.
그 안을 보니 쌀이 가득했다. 모인 사람들은 며느리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내린 선물이라고 궤짝을 주었다. 며느리는 궤짝을 집에 모셔 놨는데 쌀을 퍼내면 그만큼 생기고 또 쓰고 나면 쓴 만큼 채워져 그 식량으로 불쌍한 시어머니와 남편을 극진히 모셨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삼년상을 마치자 며느리는 궤짝을 마당 가운데 놓고 촛불과 정화수를 준비해 기도를 했다.
사림도 어느 정도 윤택해진 마당에 계속해서 공것에 의지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다.
“내가 부모를 위청해서 하늘이 내려준 복이지 나를 위청해서 주신 복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거두어 가소서.”
그리고 나서 조금 있으니 하늘에서 무지개가 서더니 정화수에 닿아 궤짝을 달고 올라갔다.
그런 후 열심히 일하여 많은 후손을 두고 잘살았는데 나라에서 그 며느리에게 효부 정문을 내렸다.
 
 
  「개로 환생한 시어머니」 
옛날에 큰아들과 딸을 둔 어느 할머니가 살았는데, 딸은 고개 너머 가까운 곳에 출가시켰다. 그 할머니는 세상 구경도 잘 하지 않고, 사람 많이 모인 곳에는 가지도 않으면서 늘 목화솜의 실만 빼내며 살다가 죽었다.
저승을 가니 할머니에게 이승에서는 뭘 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구경도 안 하고 집에서 늘 목화솜 실 빼내는 일만 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시 세상으로 가서 개가 되어 도둑이나 지켜 주라고 하여, 전에 살던 집의 개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며느리가 임신을 하여 어느 날 개고기가 먹고 싶었다. 며느리는 집의 개를 잡아먹자고 몇날 며칠 동안 남편을 졸랐다. 남편이 집의 개를 어떻게 잡아먹느냐며 남의 개를 잡아먹자고 해도, 며느리는 그냥 집의 개를 잡아먹자며 남편을 졸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남편도 그러자고 했다.
이렇게 아들과 며느리가 이튿날 아침에 개를 잡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대청마루 밑에 있던 개는 눈물이 났다. 그래서 그날 밤 딸의 꿈에 나타나, 네 올케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새벽에 가서 그렇게 못하도록 하라고 시켰다. 딸은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함께 친정집으로 왔다.
친정에 와 보니 정말로 오라버니가 개를 잡기 위해 개의 목을 끈으로 묶었고, 올케는 부엌에서 물이 펄펄 끓도록 장작을 때고 있었다. 딸은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고함을 지르며 그 개는 죽은 어머니가 환생한 것이라고 했다. 며느리와 아들은 그 즉시 짚으로 곡식을 담는 용기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개를 그 안에 앉혀 짊어지고 여러 날을 다니면서 곳곳을 구경을 시켜 주었다.
마침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구 밖 큰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산이 웅성웅성하더니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마구 내리면서 뇌성벽력이 쳤다. 아들은 얼른 옷을 벗어 개의 눈만 조금 나오게 머리에 씌워놓고는 자신은 그냥 비를 맞았다. 곧 벼락이 그치고 하늘이 맑아졌다. 그런데 용기 속에 있던 개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때 하늘에서 함이 하나 떨어졌는데, 함 속에는 돈뭉치가 들어 있었다. 아들이 효자라고 하늘이 내려준 것이었다. 아들은 그 돈을 기반으로 하여 잘 살았다고 한다.
 
  「거짓말 잘 하는 하인」
옛날 어느 마을 부잣집에 거짓말을 잘 하는 하인이 있었는데 어찌나 거짓말을 잘 하는 지 속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서방님이 나들이를 하는데 저쪽에서 거짓말 잘 하는 하인이 오고 있었다. 서방님은 속으로 절대 속지 않겠다고 생각하고는 하인에게 거짓말을 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하인은 지금은 심부름 중이라 안 되고 내일 찾아뵙겠다고 했다.
다음 날 새벽에 서방님이 일어나기도 전에 하인이 큰 잉어를 한 마리 잡아 왔다. 서방님이 놀라서 무엇인지 물었더니, 하인은 서방님께 드리려고 고개 너머 개울에서 잉어를 잡아왔다고 했다. 하인이 개울에 잉어가 가득 차있다고 하여 서방님은 하인과 같이 족대를 가지고 고개 너머 냇가로 갔다. 냇가에 도착해서 서방님이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가니 물이 제법 깊었다. 그것을 보고 거짓말 잘 하는 하인이 “서방님, 양반 체면에 옷을 베리마 우짭니꺼. 옷을 벗지예.”라고 말했다.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은 것 같아서 옷을 홀랑 벗고 물에 들어가 족대를 잡고 섰다.
하인은 잉어를 몰아온다며 위로 올라가서 집으로 휑하니 돌아왔다. 그리고는 안방마님께 “마님, 큰일 났십니더. 서방님이 정신이 돌아서 옷을 홀딱 벗고 개울을 매고 있십니더.”라고 다급한 듯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개울로 쫓아 와서 서방님께 집에 불이 났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서방님은 물에서 나와 옷을 찾느라 혼비백산이 된 가운데 “이? 행랑에 불이 났나? 몸채에 불이 났나?”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때 안방마님과 식구들이 도착하여 이 광경을 보니 영락없이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마님이 서방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을 하자 옆에 있던 하인이 “마님, 서방님을 묶어서 매달아 놓고 소주를 멕이고 집에 눕혀놓으마 최고 약입니더.”라고 얼른 대답하였다. 안방마님은 그 말을 믿고 하인들을 시켜 서방님을 묶어 매달아 놓고 소주를 먹였다. 그러자 서방님은 죽은 듯이 뻗어버렸다.
잠을 자고 난 서방님은 하인을 불러다가 나무라며 화를 냈더니, “아이고, 서방님. 거짓말 안 하마 혼을 낸다고 한 사람이 누굽니꺼?” 라고 하인이 말하였다. 그 이후로는 주인이 하인더러 거짓말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건네몰과 매방골과 배골」 
예전에 황씨 문중에서 게의 형상을 닮은 게 명당에 묘를 썼다. 그 후 가문에 좋은 일이 생기고 살림이 제법 일어났다.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온 도사를 푸대접하고 그냥 돌려보내니, 섭섭한 도사가 게 명당을 보고는 황씨 문중에 해코지할 마음이 생겼다. 그때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저 건너 골짜기가 매를 닮았으니 매방골이라 하시오.”라고 소문을 퍼뜨리니,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매방골이라 부르기 시작해, 결국 골짜기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그때부터 황씨 가문은 살림이 기울기 시작했다. 게가 매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에 명당의 기운이 쇠했기 때문이다.
황씨 가문에서 그 사실을 알고 해코지를 피하기 위해, 게 명당 자리 밑에 큰 돌을 하나 갖다놓고 배[船]라고 하였다. 마침 그 아래 골짜기가 침수동(沈水洞)이니, 물위에 배가 떠있고, 그 밑으로 게가 매를 피해 숨을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한 덕분에 명당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 황씨 가문은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침수동 아래 골짜기를 배골, 그 아래 들판을 배골들이라고 한다.
 
  「고려 충신 정씨」
사봉면(寺奉面)에 진양정씨(晋陽鄭氏) 가문의 사당이 있는데, 사당 주인공 정씨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사당 옆의 비석에 정씨의 사적(事績)이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정씨는 조선 태조의 등극을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신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정씨가 방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성계가 보낸 특사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실제로 아파서 내려갔는지 조사를 해 오라고 보낸 것이었다. 이에 정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보자마자, 갑자기 눈 뜬 소경 행세를 하여 사람이 온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특사가 확인을 위해 “대감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말씀은 들리는데 누구십니까?” 하고 보이지 않는 척했다. 옆에 있던 손님도 정씨가 눈뜬 소경이 되었다고 했다. 그걸 본 특사는 불과 몇 달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눈 뜬 소경이 되었다고 하니, 이상하게 여겨 솔잎을 한 주먹 떼어 와서 눈을 갑자기 찔렀다. 하지만 정씨는 정말 보이지 않는 듯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에 특사는 정씨를 틀림없는 눈뜬 소경으로 인정하고 임금에게 사실 그대로 복명(復命)을 했고, 정씨는 이성계(李成桂)의 의심에서 벗어나 화를 면했다고 한다.
 
 
  「공들인 보람 이야기」
옛날에 복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 살았다. 일을 해야 벌어서 어린 아이들과 아내를 먹여 살리는데, 일을 하려고 해도 일거리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놀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남편이 일을 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애가 타서 채근을 하자, 남편은 하는 수 없이 외삼촌이 평양감사로 내려온다는 거짓말로 아내를 안심시켰다.
아내는 남편이 거짓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 말을 믿고 평양감사가 내려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 매일 저녁 뒤뜰에다가 정화수를 떠놓고 축원을 하였다. 매일 같이 축원을 올리는 바람에 정말 평양감사가 바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을 했는데 정말로 김 아무개 감사가 내려온다니까 남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편 아내의 정성은 더욱 지극했고, 마음은 들떠만 갔다.
평양감사가 부임을 하고 나서 식구들은 평양감사가 조카를 부를 거라고 믿고 기다렸다. 마침내 평양감사가 고을 안의 유명한 인사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는 날이 되었다. 남편도 부잣집에 부탁해서 새 옷과 갓을 빌려서 차림새를 바꾸고 평양감사를 뵈러 갔다. 말도 빌려 타고 하인도 빌려서 고삐를 잡혔다. 식구들은 모두 믿고 배웅을 하였다.
남편은 평양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면서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 기가 막혀 다리에서 빠져죽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하인이 그를 붙잡고 말리자 승강이가 벌어졌다. 멀리 누각에서 잔치를 벌이던 평양감사가 다리에서 사람들이 승강이 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졸을 보내 데려오게 하였다.
평양감사는 잡혀 와서 꿇어앉아 있는 남편과 하인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 양반이 평양감사를 외삼촌이라꼬 거짓말을 했다민서 죽을라 해서 소인이 말릿습니다요.”라고 하인이 대답했다. 남편은 이제 죽었구나 싶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평양감사가 아는 체를 해주었다. 남편은 기쁘기 한량없었으나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감사가 “네가 못 본 사이에 모습이 많이 달라졌구나. 여봐라, 내 생질에게 쌀을 몇 섬 내어 보내라. 그리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상을 내오너라.”라고 다시 말했다.
남편은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잔칫상을 잘 먹고 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면서 그래도 아내가 정화수를 떠놓고 축원을 하고 이때까지 선하게 살아온 덕분이라 생각하고 착하게 일을 해서 잘 살게 되었다.
 
 
  「공북당」
진주성 안의 충의당(忠義堂)은 옛날 공북당 자리인데, 이곳은 고려 시랑(侍郞) 하공진(河拱辰)의 태실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 관아를 세우려고 공역(公役)에 붙여 낮 동안 집을 짓는데, 관아를 지은 뒤 하룻밤만 지나면 계속 건물이 무너졌다. 지으면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자, 급기야 방백이 나졸들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한밤중에 한 장군이 나타나 “여기는 내가 태어난 자리인데, 너희들이 무례하게 집을 지을 수가 있느냐? 헐어도 또 짓고 헐어도 또 세우니 다시 헐어버리도록 하라!”하고 호령하자, 장군을 옹위하고 있던 군사가 달려들어 건물을 무너뜨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나졸들은 자신들이 본 이야기를 방백에게 보고하였고, 그제야 연유를 깨달은 방백은 “거란군이 침범하여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 가실 때 자신을 볼모 삼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하게 하여 나라를 구하신 어른의 태지에 우리가 집을 지으려 했다니 우리의 잘못이다.”하고 ‘하공진의 집’이라는 뜻에서 ‘공북당’이란 이름을 붙여 건물을 지었다. 왜냐하면 북(北)은 북극성이란 뜻이며, ‘진(辰)’과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뒤로는 별다른 탈이 없었다 한다.
 
 
  「곶감 이야기」 
아주 오랜 옛날 호랑이 한 마리가 소를 잡아먹으려고 어느 집 외양간으로 숨어들었는데, 마침 그 집에는 소를 팔아서 외양간이 비어 있었다. 그러자 사람이라도 잡아먹으려고 외양간에 엎드려 방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방에서는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고 부모가 애를 먹고 있었다. 자꾸 울면 호랑이가 잡아먹는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기가 곶감을 준다고 하니까 신통하게도 울음을 뚝 그치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그 말을 듣고 ‘곶감이란 놈이 나보다 더 무서운 놈이구나.’하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곶감이란 놈이 어떤 놈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때 소도둑이 살금살금 들어와 외양간 소를 훔치려고 더듬기 시작했다. 미끈한 털이 만져지고 제법 큰 소가 있었다. 캄캄한 밤에 소도둑이 손으로 어루만지니 호랑이가 벌떡 일어섰다. ‘어이쿠, 이놈이 곶감이로구나.’라고 호랑이가 생각하며 겁을 먹고 달아나는데, 소도둑은 엉겁결에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는 소인 줄로만 알고 등에 올라타서는 꼭 잡고 놓지 않았다.
호랑이는 놀라서 번개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도둑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더욱 힘을 주어 움켜잡았다. 그럴 때마다 호랑이는 곶감을 떼려고 더욱 달리고, 소도둑은 더욱 힘주어 놓지 않았다. 그래서 호랑이는 ‘야, 정말 곶감이란 놈은 무섭구나.’라고 생각했다.
호랑이가 달리는 바람에 소도둑은 온몸이 나무에 긁히고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결국 소도둑은 손을 놓아 떨어졌으나, 재빨리 속 빈 고목나무로 들어가서 숨었다. 겨우 소도둑을 떨어뜨리고 달아난 호랑이는 기진맥진하여 산등성이에서 쉬고 있는데, 곰이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말도 마라. 내가 오늘 밤에 곶감을 만났는데, 정말로 무섭은 놈이데.”라고 호랑이가 말하니, “곶감이라이? 네보다 더 무서운 놈이 어데 있노? 보기 전에는 몬 믿것다.”라고 곰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호랑이는 보여준다며 앞서고 곰이 뒤따라 온 길로 되돌아갔다. 곶감을 떨어뜨린 장소에 가보니 곶감은 없었다. 곰은 코를 벌름거리며 고목나무 쪽으로 갔다. 고목나무에 꼬리를 집어넣고 곶감이 있는지 더듬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소도둑은 이리저리 피하다가 이판사판으로 곰의 꼬리를 꽉 움켜잡았다. 곰은 갑자기 당하자 고목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걸터앉는 모양이 되었다. 호랑이가 이 광경을 보고 “거 봐라. 곶감이란 놈이 무섭다고 안 카더나?”라고 말했다.
호랑이는 놀라서 다시 도망을 쳤다. 곰도 놀라 도망치려고 힘을 주는데, 소도둑이 곰 꼬리를 말아 쥐고 잡아당겼다. 한참을 힘을 쓰다 보니 곰의 꼬리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꼬리가 끊어진 채로 곰이 도망을 치며 ‘곶감이란 놈은 정말 무섭구나.’라고 생각했다. 이 때부터 곰은 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과객 제사 지내주고 얻은 복」 
옛날에 어느 부잣집의 사랑방에 과객이 끊이질 않았는데, 주인의 인심이 후해서 길손을 그냥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과객이 들었는데, 저녁 밥상을 차려주어도 먹지 않고 밀어 놓는 것이었다. 주인은 하도 이상해서 과객을 살펴보니 아주 시장해 보이는 모습인데도 밥을 먹지 않고 있어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과객은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이유를 말하지 못하다가 주인이 연거푸 묻자, 마지못해 그 날이 부모님 제삿날이라는 사연을 말하면서 밥상이라도 놓고 고유(告由)를 하려고 놔뒀다고 사정을 말했다. 주인이 듣고 보니 과객의 정성이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과객에게 다시 제사상을 봐 줄 테니 우선 저녁은 먹으라고 했다. 과객은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주인은 큰며느리를 불러서 연유가 이러저러 하다고 말을 하고 제사상을 차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큰며느리는 너도 나도 와서 제사상을 차려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거절을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작은 며느리를 불러 사정 이야기를 하고 제사상을 봐 줄 것을 부탁했으나 둘째 며느리도 형님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제사상을 봐주겠노라고 과객에게 큰 소리를 쳤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난감해져서 하는 수 없이 막내며느리에게 다시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뜻밖에도 막내며느리는 선뜻 제사상을 차리겠노라고 승낙을 하며 “그 사람 제사가 부친입니꺼? 모친입니꺼? 부친 제사라모 사랑방에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마는 모친이라모 사랑에서 어떻게 운감(殞感)을 하시겠십니꺼.”라고 말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과객에게 물어보니 모친 제사라고 했다. 그래서 막내며느리네 집 안방에다 제사상을 차려놓고 과객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도와주었다. 지방(紙榜)도 쓰고 축문까지 준비해 정성껏 제사를 모셨다.
그날 밤, 막내며느리가 잠을 자는데 꿈에 선녀들이 내려오더니 그 중의 한 선녀가 다가와서 며느리의 손을 잡으며 “내가 돌 볼 능력이 없어서 자식이 유리걸식을 해도 돌보지 못했으나, 오늘 저녁에 이리 제사밥을 묵었은께 그 정성에 보답을 할라모 아들 셋을 모두 정승으로 만들어야 될 낀데 아들 이름에 ‘창성할 창(昌)’자를 넣어갖고 지이소.”라고 말했다.
뒤에 과연 막내며느리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정승이 되었다고 한다.
 
  「광진교와 피리장수」
집현면 장흥마을에 '광진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제법 사람의 왕래가 많은 다리였는데, 광진교 아래 강은 매우 깊어 해마다 사람이나 가축이 빠져 죽거나 사고를 당했다. 마을 노인들은 대책을 세우기로 뜻은 모았으나 뚜렷한 방책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마을 노인의 꿈에 광진교에서 빠져 죽은 귀신이 나타나서 노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풍물패를 만들고 있다. 북치는 사람, 장구 치는 사람, 꽹과리 치는 사람 다 있는데, 피리 부는 사람이 없다. 내일 합천에서 한 사람이 올 낀께네 그 양반을 포함시키면 되것네.” 하였다.
이튿날 그 촌로는 꿈이 하도 이상하여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하니, 마을 사람들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함께 광진교로 가보자고 했다. 마을사람들이 반신반의를 하면서 기다리니, 과연 합천 쪽에서 짐을 메고 걸어오는 봇짐장수가 보여, 혹시 하는 마음에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 물어 보니 봇짐장수는 합천에서 오는 길이라 답했다. 봇짐 속의 짐에 대해 묻자, “나는 피리 맨그는 사람인데, 내일이 기제사라서 물건 좀 하로 가요.”라고 답했다.
그 말에 귀신 꿈을 꾼 노인이 어젯밤에 꾼 꿈의 내용을 자세하게 들려주며 오늘은 광진교를 지나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피리장수는 진주로 가려면 광진교 밖에 없는데 어디로 돌아가라고 하느냐며 버럭 화를 내고는 광진교를 건넜다. 그런데 그 봇짐장수는 실랑이를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다리 옆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더니 그 자리에 고꾸라져 결국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노인의 꿈에 다시 그 귀신이 나타나 “인자 풍물패 인원이 다 찼은께, 마실 사람이 죽는 일은 없을 끼라. 우리는 인자 멀리 길을 떠난께 편이들 사이소.”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봇짐장수가 죽어 귀신풍물패의 피리 부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고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광진교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일은 없어졌다.
 
 
  「구렁이 된 진주 자리 꼼쟁이」 
꼼쟁이 할머니는 무엇이든 모았다. 어디를 나갔다 오면서 무른 개똥이 있으면 그것을 오목한 돌에 담아 와 거름을 만들었고, 된 개똥이 있으면 풀이나 이파리에 싸서 가지고 와서 거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콩나물 국밥만 3년 동안이나 먹고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던 꼼쟁이 할머니가 죽을 때가 됐는데, 점점 몸에 비늘이 돋기 시작하더니 구렁이가 되어 갔다. 자식들이 의원을 집 안으로 들이고 하인들에게 감추었어도 소문은 계속 퍼졌다고 한다.

  「굴바위」
옛날 굴바위에는 신령한 영험을 가진 영물이 살고 있었다. 영물은 구름과 비를 부르고 농사의 흉·풍년을 좌우할 만큼 재주를 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마다 풍년이 들면 사람들은 마을 처녀를 하나 굴 앞에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면 이듬해에 또 풍년이 들지만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마을에 어느 가난한 처녀가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처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집 앞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녀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두꺼비를 잡아다가 밥도 주고 물도 주고 해서 키웠다.
그런데 그 해에 마을에서는 굴바위 영물에게 바칠 제물로 성년의 나이를 앞둔 처녀를 지목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처녀는 두꺼비에게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 그러자 두꺼비가 마치 처녀의 하소연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드디어 처녀가 굴 앞에 바쳐지는 날이었다. 두꺼비는 주인의 위기를 아는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를 굴 앞에 두고는 서둘러 내려가 버렸다. 잠시 후 굴속에서는 천 년 묵은 지네가 독 연기를 뿜으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처녀는 놀라 기절을 하였다. 지네가 처녀를 먹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두꺼비가 나타나 독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지네와 두꺼비는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처녀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굴바위 앞에는 커다란 지네와 두꺼비가 죽어있었다. 처녀는 두꺼비를 고이 묻어주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굴바위 동굴 앞에서 불을 때면 진주시 명석면(鳴石面) 남성리(南星里)에 있는 석방(石防)에서 연기가 난다고 한다.
 
 
  「귀신 퇴치하고 잘 산 이야기」 
고기를 낚고 배질하며 사는 뱃사공이 있었다. 하지만 평생 살아 봐야 모이는 돈이 없어, 살 희망이 없어진 뱃사공이 하루는 신통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가 복채로 천 냥을 내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다짜고짜 산의 바위 밑에 배를 매어 놓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또 천 냥을 냈더니, 이번에는 어떤 날에 귀신을 만나거든 목침으로 물리치라는 말뿐이었다. 다시 또 천 냥을 내놓으니 밤에 기름 종지를 만나면 샘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돈이 없어 더 묻지 못한 뱃사공은 산 밑에 배를 매어 놓고 지향없이 갔다. 한 골짜기에 들어가니 기와집이 있었는데, 대청마루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조그만 머슴아이가 하나 나왔다. 뱃사공이 날이 저물어 재워 달라고 하니, 여기서 자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했다. 밤에 귀신들이 오는 집이라 놀라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뱃사공은 죽어도 괜찮으니 자고 가겠다며 차려주는 저녁을 배불리 먹고, 창호지 서너 권과 엽초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대밭에서 큰 대를 가져와 담뱃대를 만들었다. 밤중이 되자, 뱃사공은 종이에 화상을 그려 팔랑개비를 붙여놓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담배를 심하게 피웠다.
드디어 대문이 열리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나더니, 귀신들이 들어왔다. 한 귀신은 뱃사공을 보고 대인이 하나 앉았다 하고, 또 한 귀신은 오늘 저녁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하고, 또 한 귀신은 못 잡겠다고 하고, 마지막에 들어온 열두 번째 귀신은 대인이 앉았다 하였다. 뱃사공은 점쟁이가 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깔고 앉았던 목침을 집어던졌다. 그제야 귀신들이 그것을 받아 나가면서 “우리 물건을 이제야 찾았네. 이걸로 괜히 애석한 목숨만 많이 보냈네.”라고 하였다.
그 목침은 기와집의 윗대 조상 중 한 사람이 소나기 때문에 황토밭에 떠내려 오는 것을 주워 온 것인데, 본래 주인이었던 귀신이 찾으러 오자 기와집 사람들이 그 귀신들을 보고 놀라 죽은 것이었다. 귀신이 모두 가고 난 뒤에 뱃사공이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여자가 기절해 있었다. 뱃사공이 여자를 주물러 깨워 여자가 살아나 뱃사공과 여자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삼 년이 흐른 뒤, 뱃사공은 옛집이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뱃사공의 아내는 바가지를 긁으면서 기름등잔을 뱃사공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뱃사공은 눈을 뜰 수가 없자, 얼굴을 씻으려고 샘으로 갔으나, 기름 종지를 만나면 샘을 보지 말라는 점괘가 생각나서 샘을 보지 않았다. 사실 샘 속에는 아내의 새서방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새로 얻은 새서방을 샘 속에 숨겼다가 남편이 얼굴을 씻으러 가면 남편을 끌어당겨 죽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계획이 실패하자 아내는 새서방보고 나오라고 했다. 이 모습을 본 뱃사공은 아내와 사내를 죽이고 다시 골짜기에 있는 기와집으로 돌아가서 기와집 여자와 잘 살았다고 한다.
 
  「금호지와 청곡사」
아주 오랜 옛날 하늘에서 청룡과 황룡이 한데 엉겨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싸움을 본 한 용사가 용을 향해 싸움을 멈추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함 소리에 놀란 청룡이 아래에 있는 용사를 내려다보는 사이 황룡이 청룡의 목에 치명상을 입혀 청룡은 땅으로 떨어졌다. 청룡이 땅으로 떨어지면서 꼬리가 쓸려 그 자리가 움푹 파이게 되었고, 그곳에 물이 모여 못이 되었는데 이 못이 금호못이다. 이 못은 청룡에 의해서 생긴 못이기 때문에 물 색깔이 항상 파랗게 보인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심판을 하면서 금호못을 한 번 봤느냐고 묻는단다. 이때 안 둘러 봤다고 대답을 하면, 염라대왕이 게으른 사람이라면서 벌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승까지 이름난 못이라고 한다.
이 금호못에는 살던 청룡이 어느 날 밤 월아산에서 달이 뜨는 것을 보고 달을 여의주로 잘못 알고 껑충 뛰어오르면서 달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월아산에 받혀 떨어졌는데, 그때 움푹 팬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하여 그 절 이름이 청곡사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다른 일설에 의하면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남강(南江)에서 청학이 날아와 서기가 충만한 것을 보고 도선국사(道銑國師, 827~898)가 청곡사의 절터를 정했다고 하며, 학이 날아왔다고 해서 청곡사 입구의 다리 이름이 방학교(訪鶴橋)가 되었다고 한다.

  「글풀이 재판」
어느 사람이 일흔이 넘어 아들을 하나 낳았다.
딸만 줄줄이 낳은 후에 대를 이을 아들을 봤으니 그로서는 여한을 푼 셈이다.
재산은 무척 많았던 탓으로 자칫 딸과 아들간에 재산 싸움이 생길 것이 틀림없었다. 아들을 낳은 지 얼마 안있어 영감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눈을 감기 전에 유서를 남겼는데 내용이 이러하다.
‘七十生男 非吾子 吾之財産 附之女? 外人勿關’
이렇게 유언장을 써 놓고 아들이 크면 보라고 일렀다.
어느덧 아들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아들과 딸.사위들이 모여 유언장을 뜯어 봤다. 사위 중에 똑똑한 사람이 있었던지 유언장을 해석하는데 재산 분배에 있어 아들 몫이 없고 모두 달에게 주란다
七十에 生男하니 非吾子라(칠십에 아들을 낳으니 내 자식이 아니다)
吾之財産을 附之女?하노니(내 재산을 여서한테 부치노니)
外人은 勿關하라(외인은 간섭말라)
틀림없이 재산은 딸의 몫이다. 아들이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늦둥이지만 아들임이 분명한데 아들이 아니라니 어처구니없어 말도 안나왔다.
딸과 사위들은 유언장을 해석한 대로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하고 아들은 속절없이 당해야 할 판인데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관가에 소송을 했다. 사또는 유언장을 유심히 읽어 보더니 판결을 내린다.
“이 글은 그런 뜻이 아니니라. 해석을 잘못한 것이니 재산은 모두 아들에게 주라.”
사또의 해석은 이렇다.
七十에 生男인들 非吾子리오(칠십에 낳았던들 어찌 내 자식이 아니리오)
吾之財産을 附之하노니(내 재산을 부치노니)
女參는 外人이라(여서는 남이니)
勿關하라(간섭하지 말라)
똑같은 글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정반대의 뜻이 되는 게 한자(漢字)다.
 
 
  「기러기마을」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있는 오동마을은 풍수학적으로 보면 기러기가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오동마을은 상습 수몰 지역이었는데, 남강댐이 건설되고 나서는 옥토가 되어 시설채소 재배 등으로 부촌이 되었다. 그러던 중 마을에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였는데, 그때 이후부터 젊은 사람들이 연례행사처럼 일 년에 한두 명씩 갑자기 죽는 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후 약 칠년 동안 계속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을 떠나자 오동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재앙이 내렸다며 불안에 떨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이한 일들이 계속되면서 마을의 민심은 흉흉해 졌는데, 어느 날 병마에 시달리던 마을의 한 집에서 굿을 하던 무당이 마을의 간이 상수도를 설치한 곳이 풍수학적으로 볼 때 기러기의 목 부분이어서 이와 같은 재앙이 끊이질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마을에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면서 암반관정을 뚫는 바람에 날아오르는 기러기의 목 부분에 구멍을 내어 마을의 기(氣)를 끊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뒤 오동마을 사람들은 간이 상수도를 옮겼고, 기존의 암반관정을 폐공시켰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을에는 더 이상의 재앙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른 정 낳은 정」 
옛날 어느 부잣집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데 딱 한 가지, 아들이 없는 것이 걱정인 부자 영감이 있었다. 그는 늘 아들을 한번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자신에게 탈이 있어 아들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그는 비장한 각오로 많은 아들을 둔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였다. 부자 영감의 말을 들은 친구는 처음에는 펄쩍 뛰다가 친구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마지못해 영감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승낙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부자 영감은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모레 합방을 하면 틀림없이 아들이 생긴다쿠네. 그런데 합방할 때 불을 키거나 말을 하거나 눈을 떠모 안 된다 쿤께네 이 점을 머리에 두소.” 드디어 그 날이 되자 부탁을 받은 친구가 영감의 말대로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합방을 하고 조용히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어두운 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합방을 했으니 누군지 몰랐다. 이후 태기가 있고 열 달이 지나 귀한 아들을 낳았다. 부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 아이가 헌헌장부로 자라도록 훌륭하게 키워놓으니 부러울 데 없는 인물이었다. 아들의 나이가 열댓 살이 되었을 때 부자 영감은 그만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다.
한편, 합방을 했던 부자 영감의 친구는 살림이 더욱 쪼그라들고 식구는 많고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감의 아들을 다시 찾는다는 구실로 부자 영감의 재산을 취할 생각으로 그 영감의 부인을 찾아가서 아들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친구는 합방하던 날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억하여 말해주었다. 그리고 정 아들을 내놓지 않으면 송사를 벌이겠다고 했다. 부자 영감의 부인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아들은 어머니께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쉽게 입을 열지 않던 어머니는 한참만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정을 알게 된 아들은 내가 다 해결할 테니 어머니에게 걱정을 하지마시라고 안심을 시켰다.
두 집 사람들이 관가 동헌에서 재판을 받았다. 영감의 친구가 먼저 사정과 경위를 설명하면서 부잣집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이 맞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잣집 아들이 말했다. “사또 나으리, 한 말씸 올리것십니더. 큰 밭하고 작은 밭이 나라이 있십니더. 돌로 박아서 밭두렁을 삼아 농사를 짓십니더. 작은 밭에서 무 씨를 철철 흩어가면 씨가 우짜다가 이 쭉 큰 밭에 하나 널찌몬 이 쭉 우리 밭에서 합니꺼? 저쭈 작은 밭 주인이 임잡니꺼? 이 쭉 밭 임자가 키아 노은 무를 작은 밭에서 가꼬 가야 됩니꺼?”
이 말을 들은 고을 원님은 정신이 번쩍 들어 부잣집 아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영특한 그를 사위로 삼고 글공부를 하여 입신양명을 하게 되었다. 송사에 이기고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를 하면서 잘 살았다.
 
  「김덕령이 진주를 지킨 까닭」 
전라도 광주 일대에서 효자로 소문난 김덕령(金德齡)이 스물두 살 때였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었는데, 당시 경상도 진양땅 자매실(지금의 수곡면 자매리 자매 마을)에 명의(名醫)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김덕령은 밤새 삼백 리 길을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러나 명의는 “광주로 가려면 닷새나 걸리는데 당신 어머니는 워낙 위중해 내일이면 죽을 것이오.” 하면서 도와주기 어렵다고 하였다. 김덕령은 그 말에도 명의를 계속 설득했고, 김덕령의 효심에 감동한 명의는 결국 같이 가겠다고 했다. 김덕령은 명의를 안고 말을 타고는 호랑이처럼 달려 다음날 정오에 집에 닿았다. 명의의 처방을 받은 김덕령의 어머니는 중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명의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진주로 달려왔다. 그리고 자매실 앞산에 진을 치고 왜구를 무찔러 은혜를 갚았다. 자매마을 서쪽 문서골에는 그 명의의 의서(醫書)와 침을 감추어 둔 것으로 전해지는 당새기 바위가 있다. 그 명의의 이름은 김남(金楠), 혹은 유이태(劉以(爾)泰)라고 한다.
자매마을의 복지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쌓은 성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금산면 월아산 장군대에도 목책을 쌓아 진을 친 곳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도 없고, 1978년 월아마을 입구에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다.
 
  「까치의 보은」
옛날에 한 총각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걸어가고 있었다. 산길을 가는데 까치집에 구렁이가 들어가서 까치 알을 먹으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총각이 얼른 활을 들고 구렁이를 쏘아 구렁이는 떨어져 죽었다. 까치는 총각을 보고 고맙다는 듯이 깍깍 울어댔다.
그러고는 한참을 걸어가는데, 수양버드나무 아래서 어떤 미인이 빨래를 하며 앉아 있었다. 미인을 본 총각은 마음에 욕심이 생겨 그냥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미인이 빨래를 다 하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따라가서 하루 저녁 머물기를 청했다. 미인이 허락하여 총각은 일이 제대로 된다 싶어서 그 집에서 자기로 했다. 미인이 저녁밥을 차려 주는데 반찬이 입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잘 만들어 주었다.
저녁 후에 곱게 단장을 하고 바느질을 하고 인두질을 하는데 총각이 가만히 보니 입에서 혀를 두 개 날름거리는 것이었다. 총각은 낮에 죽인 구렁이가 번뜩 떠올랐다. 총각이 꾀를 내어 변소에 갔다 오겠다고 말했더니 미인이 나가지 말고 방안에 둔 요강에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총각은 “병든 사람이 아인데 우째 요강에 볼일을 보것십니꺼. 갔다 오겠십니더.”라고 말하며 살짝 나와서 담을 뛰어넘어 도망을 치려고 하는데 사방에는 뱀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방금 그 여자가 뱀으로 변하여 소리쳤다. “네 이놈! 네가 내 가장을 잡아 묵고 네 놈이 잘 살 줄 알았더나? 네는 오늘 여어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 장안에서 종소리가 세 번만 나면 네는 산다.”고 하면서 뱀이 담장 위에 딱 올라앉는 것이었다.
총각이 생각해보니 사방에 구렁이가 있어서 살 길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가는데 멀리서 종소리가 ‘땅-, 땅-, 땅-’ 세 번 들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뱀은 원통해하며 약속한 대로 종소리가 세 번 울렸으니 살려주겠다고 말했다.
구렁이는 스르르 사라지고 있던 집도 자취가 없이 사라졌을 때, 먼 산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총각은 다시 서울로 걸음을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총각이 서울에 도착하여 종을 찾아가서 보니 종각에서 까치 세 마리가 종을 치다가 떨어져 죽었더란다. 까치가 갚은 은혜로 구렁이로부터 목숨을 건진 총각은 과거를 보아 급제하여 잘 살았다고 한다.
 
 
  「꼬마 호주」
옛날에 아들이 여덟이고 딸이 둘인 가난한 집이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 근근이 목숨만 부지할 정도로 가난했는데 어느덧 막내아들이 열두 살이 되었다.
어느 날 막내아들이 식구들 앞에 썩 나서면서 호주를 시켜주면 식구를 모두 먹여 살리겠다고 말했다. 부모와 형제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장난기가 동해 호주가 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에 막내는 “내가 호주가 됐은께 모두 내 말을 따라야 합니더.”하고 가족들의 다짐을 받고 호주가 되었다.
이튿날 어머니에게 몸에 맞는 두루마기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니, 어머니가 있던 헌 옷으로 꼬마 호주에게 맞는 두루마기를 만들어 입혔다. 그러자 꼬마 호주는 두루마기를 입고 삼십 리 떨어진 부잣집 김동지를 찾아가 김동지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러댔다. 하인들은 어이가 없어 그 사실을 주인에게 알리니, 김동지가 나와서 보고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으나 나이 많은 자기를 이렇게 부르는 걸 보고 장차 크게 될 인물임을 알아보고 혼내지 않고 들어오라고 했다.
막내는 자신이 호주가 된 연유를 자세히 말하고, 김동지에게 보리 열 섬, 나락 열 섬만 빌려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에 김동지는 어린 아이가 예사롭지 않아 빌려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꼬마 호주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가져온 곡식으로 밥을 짓게 하여 식구들을 배불리 먹였다. 그리고는 이튿날부터 각자 맡은 일거리를 주었다. 아버지는 나무를 해 오게 하고, 어머니는 빨래하고 밥을 하고 남의 집 방아를 찧게 하고, 누나들은 남의 집 밭을 매게 하고, 형들도 남의 집 품을 팔러 나가게 했다. 식구들은 약속한 것도 있고, 또 배불리 먹었으니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해온 나무를 내다 팔고, 모두가 일을 해서 번 돈과 곡식을 알뜰하게 모았다.
그러던 하루는 아버지가 나무하러 가서 다리를 다쳐 일을 못하게 되자, 일을 안했으니 밥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아버지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산에 가서 삭정이를 한 짐 해 와야 했다.
이렇게 식구들이 열심히 일을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가 되었고, 빌린 곡식을 모두 갚고 식구들이 모두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꾀 많은 노인」
옛날에 자수성가하여 삼백 석 재산을 모았으나, 돈이 있어도 치장을 잘 하지 않아 행색이 초라한 자린고비 같은 영감이 있었다. 그것을 본 막내 사위가 부산까지 나가 좋은 밀짚모자를 하나 사주었다. 영감은 그 모자를 쓰고 딸네 집에 가다가 주막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걸 본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한 사람이 남루한 치장과 어울리지 않는 새 밀짚모자를 쓴 영감의 모습을 보고 빼앗을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영감의 밀짚모자를 보고 자신의 것이라고 우겼는데, 도리어 영감은 그 양복쟁이의 멱살을 붙잡고 “네가 모자도 내버리고, 우리 집 팔만 원짜리 농사 부리는 소를 몰고 갔지? 요놈, 네 모자 가져가고 농우(農牛) 내놓아라.”하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
그 서슬에 놀란 양복쟁이는 영감에게 삼백 냥을 주면서, 우선 이것을 받고 있으면 오백 냥을 더 가지고 오겠다고 하며 도망쳤다. 영감은 그 삼백 냥만 받아 가지고 와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꾀 많은 총각 머슴」
 
농사를 많이 짓는 부잣집의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에 걱정이 태산 같은 처녀의 아버지는 결국 아무데나 돈 다섯 마지기를 주어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웃 머슴은 다음날 아침 우물로 가서, 그 집 처녀가 물을 길으러 오는 시간에 맞춰 울었다. 처녀가 그 모습을 보고 왜 우느냐고 묻자, 머슴은 자기 아버지가 장가를 가라고 하는데 장가가기 싫어서 운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처녀는 자신도 아버지가 시집을 가라고 하는데 시집가기 싫다고 말했다.
뜻이 통한 두 사람은 저녁에 산 위에 있는 약물 샘에 가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저녁에 만난 두 사람은 약물 샘에 갔다. 머슴은 처녀에게 약물을 먼저 마시라고 했다. 처녀가 경계하지 않고 약물을 마시려고 엎드리자 머슴은 달려들어 처녀와 성교를 했다. 처녀는 머슴을 좋아하게 되었고, 머슴은 그 처녀와 결혼해 논 다섯 마지기를 타서 잘살았다고 한다.
 
  「나막신쟁이날」 
옛날 옥봉동 말티고개 언덕바지에 마음이 착하고 유순한 나막신장이가 살고 있었다. 나막신이란 나무를 깎아 만든 밑이 높은 나무신을 말하는 것으로,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주로 신었던 신인데, 살림이 구차하고 식구가 많은 나막신장이는 나막신을 만들어 팔아서 먹고살기가 너무 힘겨웠다. 이미 계절은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 다 가고 있는데, 장날이라 나막신장이는 신발을 가지고 나가기는 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신이 팔리지 않아 양식도 못 사고 빈손으로 탈래탈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주막 앞을 지나던 나막신장이는 부자가 매품 팔 삯군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돈 석 냥에 몸을 팔아 관가에 가서 매를 맞기로 작정하였다.
부잣집을 물어서 찾아가 말을 하자, 부자는 불쌍히 여겨서 저녁을 먹이고 관가의 호출장을 들려서 관가로 보냈다.
평소에 제대로 먹지 못한 나막신장이는 관가에서 매 서른 대를 맞고 돈 석 냥을 받아 말티고개를 넘어 집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영양실조가 심했고 못 먹어 허약했던 나막신장이는 고개에서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나막신장이가 죽자 겨울이 다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이상하리만치 매섭고 모진 바람이 불고 추워졌다.
가족들은 밤이 되어도 나막신장이가 오지 않자 찾아 나섰으나 나막신장이는 말티고개에서 돈 석 냥을 손에 쥐고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그 뒤로 해마다 나막신장이가 죽은 날로부터 일 년이 되면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는데, 그 날이 동지섣달 스무 이튿날이었다. 이날을 진주 사람들은 ‘나막신장이의 날’이라고 불렀다.
 
  「남명 조식」 
남명 조식은 두류산(현 지리산)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명망이 높았고, 이에 여러 차례 임금이 벼슬을 내려 등용하려 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조식이 탕춘대(蕩春臺) 북쪽과 무계동(武溪洞) 남쪽에서 한양(漢陽)으로 간 적이 있었다. 마침 남명의 인품을 사모하던 여성위(礪城尉:왕의 사위에게 주는 품계)가 그걸 알고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어, 장의문(藏義門) 소나무 숲 속에 장막을 치고 남명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여성위는 길가에서 공수(拱手: 공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개어 잡음)하고 서 있었고, 하인은 말 앞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러나 남명은 여성위가 높은 지위의 사람임을 알고,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술에 취한 것처럼 하면서 ‘이렇게는 어른을 맞이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여성위의 술을 받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렇게까지 속세의 권위에 대해 초탈한 조식의 모습이 여성위의 눈에는 아득히 천 길 높이 나는 봉황 같이 보였다고 한다.
 
  「남명과 상사 구렁이」 
진주 덕산(德山)에 살던 조식이 서울로 유람을 갔다. 한 오십 리를 걸어가니 해는 다 졌고 자야 될 판인지라 한 여관에 들어가니 처자 하나가 있었다. 남명 선생이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냐고 물으니, 외가에 날 지내려고(소상(小祥)이나 대상(大祥)을 지내는 일) 갔다 하였다.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서 자고 가야겠다고 하니, 그 처자는 저쪽에 자는 방이 있다며 처소를 정해 주었다. 두 사람은 동침을 했다. 이튿날 처자는 서울로 올라가면 며칠 만에 우리 집에 당도할 거냐고 물었고 남명 선생은 보름 만이라고 했다.
남명 선생은 서울로 올라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보름 만에 내려와 처자 집에 가지 않고 자기 집으로 갔다. 처자는 상사병이 나서 그만 구렁이가 되었다. 처자 부모가 와서 그 이유를 물으니, 남명 선생과 동침하여 변상(變相)을 했다고 대답했다.
처자 아버지는 남명 선생을 데리고 왔다. 그랬더니 구렁이는 혀를 내어 남명 선생 입을 핥고 친친 몸을 감아 누워 잤다. 이튿날 남명 선생은 큰 궤에 구렁이를 넣어 짊어지고 덕산으로 가서 자기 집 벽장에 넣어 두었다.
남명 선생에게 글 배우는 사람이 셋인데, 하루는 남명 선생이 내가 오늘 놀러가니 너희들 모두 놀러가라고 했다. 그래 둘은 놀러가고 하나가 남아 있다가 벽장 구렁이를 꺼내 몽둥이로 모가지를 패서 죽여 묻어 버렸다. 구렁이가 없어진 것을 안 남명 선생이 물으니 때려죽인 놈이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남명 선생은 여기 있지 말고 속히 네 집으로 가라고 하였고 그는 자기 집에 갔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식구가 칠팔 명 되는데, 그가 자기 집에서 담배 한 대 피울 시간 앉아 있으니, 하늘이 뇌성벽력을 하더니 식구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남지에 나타난 괴이한 새」
신라 헌강왕(憲康王) 14년(822)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부당하게 임금이 되지 못했음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은 웅천(지금의 공주)에서 거사를 하여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청주(菁州, 지금의 진주)에 있던 김헌창의 조직도 행동을 같이 하여 삽시간에 세력이 규합되었다. 반군 세력이 청주로 들어오자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피해 밀양으로 달아나 변변히 항거를 해보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다.
이 해 2월, 반란이 나기 한 달 전에 서라벌(徐羅伐, 지금의 경주)에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라 죽는 이변이 일어났으며, 청주에서도 괴변이 일어났다. 태수가 집무하는 관아의 남지(南池)에 이상한 새[異鳥]가 나타났던 것이다. 몸길이는 다섯 자에 빛깔은 검었으며, 머리는 다섯 살 쯤 되는 어린 아이의 머리만 하였고, 주둥이는 다섯 치에 눈은 사람의 눈을 닮았는데 먹통이 다섯 되 들이 그릇 크기만 하였다.
이 괴상한 새는 나타난 지 사흘 만에 죽었는데, 이때 진주 사람들은 괴이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반란군 김헌창이 곧 패망할 징조라고 예언을 하였는데, 과연 얼마 후 김헌창은 패망하였다. 관군이 출동하여 반군은 모두 토벌되었고, 김헌창은 웅주성에서 자결하였다.
당시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의령)은 적지에 인접하여 있었으나 끝까지 반군에 맞서 대항하였으므로 난이 평정된 후 7년 동안 세금을 면제 받는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반군에게 점령당하여 변변히 항거하지 못한 진주의 백성들은 반군에게 시달리고 신라 조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다.
 
 
  「노총각과 구렁이」 
옛날에 나이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노총각이 있었다. 노총각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장가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여 세상 구경이나 하자며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녔다. 밥은 얻어먹고 잠은 헛간이나 처마 밑에서 잤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골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춥고 무서워서 인가를 찾았다. 마침 커다란 바위틈에 집이 하나 보여 그 집으로 들어갔더니 수염이 허연 노인이 혼자서 노총각을 반겼다. 노인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더니 밖에서 떠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노총각과 노인은 서로의 처지를 설명한 뒤, 계속 함께 지내다가 친구처럼 가깝게 되었다.
식사 때가 되면 노인은 꿩이나 노루의 다리를 내놓아 노총각이 배불리 먹게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노총각은 노인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영감님은 늘 육(肉)고기만 드시는데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나? 담뱃진이 가장 싫어.”라고 대답하였다.
노인은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했으나 노총각은 그 때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옛날에 마을에서 전해오던 뱀은 담뱃진을 제일 싫어한다는 말이었다. 노총각은 그 말이 생각나서 서둘러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이 웅성대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노총각은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람들은 천년 묵은 구렁이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노총각은 자기가 구렁이를 쫓아 주겠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노총각을 극진히 대접하며 이 일이 성공하면 재산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노총각은 마을을 다니면서 담뱃대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담뱃진을 긁어모아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 담뱃진을 가지고 산으로 다시 올라가보니 노인과 함께 잤던 집은 없고 바위틈에 엄청나게 큰 황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노총각이 담뱃진을 꺼내어 구렁이 코앞에 갖다 대었더니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연기를 내뿜으면서 사라져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 고마워서 노총각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결혼도 시켜주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바깥에서 노총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노총각과 친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을 이야기 해주었으니 노총각에게도 싫어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총각이 “나는 세상에서 돈이 제일 더럽고 싫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노인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예끼 고얀 사람. 너도 골탕 좀 먹어라.”하면서 돈 꾸러미를 뿌리고 갔다. 그 덕분에 노총각은 부자가 되어 아내와 함께 오래도록 잘 살았다고 한다.
 
  「논개」
논개가 김천일 장군과 함께 진주로 넘어왔다. 그러나 김천일 장군이 죽고 나자 논개는 너무 기가 막혔다. 논개는 치마에 돌을 싸서 성 위에서 아래로 던지고, 성을 올라오려는 왜병에게 물을 끓여 부었다.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호국사(護國寺)와 의곡사(義谷寺)를 다니면서 몰래 사람들을 만나 왜군을 이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마침내 논개는 김천일 장군과 함께 온 세 사람과 짜고 논개 자신이 술과 안주로 일본 장수를 유인할 때 그들이 옆에서 거들어 주기로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논개는 석산(石山)에서 기생으로 가장하였다. 그러고는 왜군 병사에게 일본 장군과 놀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이를 그들 장수에게 전해주어 왜장이 나타났다. 논개는 지수문(指手門) 아래 바위에 가서 술 한 잔 먹자고 했다. 논개는 미리 짠 세 사람에게 자신이 왜군 장수를 안고 떨어지면 당신들은 바위틈에 숨어 있다가 솟아 올라오는 왜장을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말해두었다. 그리하여 논개와 세 사람은 왜장을 죽이고 자기들도 함께 강물에 떨어져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었을 때 진주 의기(義妓) 논개가 왜군 손에 죽은 최경회 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만취한 왜장 가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文助)를 끌어안고 의암에서 남강으로 투신한 사건이 기본 모티브이다. 그런데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8-3에는 김천일 장군이 등장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진주 기녀 논개가 김천일 장군이 왜군에게 목숨을 잃자 왜장과 함께 의암에서 순국하였다는 충혼을 기린 전승담이다. 그러나 논개가 사랑한 장수는 이 이야기와는 달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한편 장수와 함양에서 전해오는 논개의 일생은 또 다르다. 열네 살 되던 1587년 아버지 주문달이 죽고 숙부에 의해 토호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팔릴 처지가 되자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풍헌이 당시 장수 현감 최경회에게 말해 심문을 받게 했는데, 최경회는 논개 모녀를 무죄로 인정했다.
논개는 18세 되던 1591년 봄에 최경회와 부부 인연을 맺었고,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하자 논개도 왜장과 함께 의암에서 순국했다. 그 후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에 장사지내려고 운구해 오던 중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고 한다.
이처럼 논개와 관련된 이야기는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전승되고 있는 실정이다.
 
 
  「뇌물 먹고 명 연장시킨 저승사자」
예전에 박부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동냥을 얻으러 왔는데,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려 하룻밤 묵기로 했다.
그런데 스님이 저녁 식사를 하더니 “이 댁에 오늘 아홉 살 먹는 외동이 하나 있지요? 조실부모 했지요?”하고 물었다. 박부자는 그렇다고 답하며, “네, 삼촌 시하에서 자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님은 “그 아이는 아홉 살 먹는 오늘 저녁에 절명할 것입니다.”하고 단언하니, 박 부자는 안타까워 삼대독자인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는지를 물었다.
스님은 운명에 달렸으니 어렵다고 하면서도 안주를 잘 장만하고 술을 한 동이 구해서 삼경쯤 동구 밖 당산나무에 갖다놓고 먼 데서 망(望)을 보고 있으라고 했다.
삼경이 되어 박 부자가 당산나무로 가니, 당산나무 밑에서 푸른 도포와 붉은 도포를 입은 두 백발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박부자는 시키는 대로 술 한 동이와 안주를 그 앞에 갖다놓았다. 두 노인은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바둑만 두었다.
박부자가 먼 데 가서 망을 보니, 안주도 없어지고 술도 살살 없어졌다. 바둑을 다 둔 푸른 도포 노인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하였다.
“박부자네 삼대 외동이가 아홉 살 먹는 오늘 저녁이 절명하는 날인데, 그 술을 우리가 먹어 큰일났네.”
붉은 도포 노인이 도포 안에서 치부책을 내어 보니, 틀림없이 그날 저녁에 절명하게 되어 있었다. 붉은 도포 노인은 우리가 술을 먹었더라도 천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느냐고 했지만, 푸른 도포 노인은 명을 고쳐 주자며 구(九)에다 구자(九字)를 하나 더 넣어 박 부자의 외동이를 99세로 명을 이어 주었다고 한다.
 
 
  「달음산」
 미천면 오방리 상촌마을은 현재 미천(美川)이라 불리고 있는데, 물이 많아서 그렇게 불린다. 옛날 이 지역에는 천지개벽이 일어날 만큼 비가 많이 왔는데, 비가 내려서 산이 다리만큼 남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달음산이다.
 
 
  「대나무열매」
 
산이 봉황새처럼 생겼거나 봉황새가 산다고 생각하여 봉산(鳳山)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봉황새는 오동나무에 깃들고, 성질이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은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竹實)를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는 오동나무를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진양지』의 관기총설(官基總說)에 비봉산을 봉황새로 설정하고 비봉산 둘레에 대롱사(大籠寺), 중롱사, 소롱사를 창건하여 새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봉황새를 보호하는 형국을 취하였다고 전한다.
관아 건물 또한 진주의 진산인 비봉 아래에 있는 금롱(金籠)의 형국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객사의 누각을 봉명루(鳳鳴樓)라 하였고, 비봉산 아래에 죽동(竹洞), 죽전(竹田)마을이 있어 봉황새가 먹는 대나무 열매를 공급토록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작평(鵲坪)이라는 들판 이름도 봉황새가 까치를 보면 날지 않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고, 진주성의 앞산을 망진산(網鎭山)이라고 한 것은 봉황새가 그물을 보면 날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주 지역 사람들은 봉황새가 사는 곳에는 인재가 나고 후손이 번영한다는 믿음으로  대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그 결과 남강변을 따라 많은 대나무가 자라게 되었고, 그것이 조선시대에는 진주 지역의 장관(壯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실제로 대나무 열매가 유용한 양식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으로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들이 곤욕을 치를 때 보리농사마저 흉년이 들어서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거나 송기(松肌: 쌀가루와 함께 섞어서 떡이나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는 소나무의 속껍질)를 벗겨 먹는 등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였다.
사람들이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데, 뜻밖에도 7월과 8월에 산죽(山竹) 수만 대가 돋아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죽실(竹實)은 보리쌀 비슷하게 생겼으나 보리쌀보다는 약간 작고, 밥을 지을 수도 있으며 가루로 빻으면 수제비도 끓일 수 있었다. 죽이나 술 등의 대용식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상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사지와 산청 오일봉」 
옛날 진주성에 봄이 찾아왔을 때, 당시 진주목사가 인근 고을 수령들을 불러다가 북장대(北將臺)에 앉아 연꽃이 피어있는 대사지(大寺池)를 보며 놀고 있었다. 기생에게 노래를 시키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흥이 한껏 달아올랐을 때였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 모였으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지나가기가 어려울 텐데, 산청의 오일봉이라는 사람은 갓끈 없는 갓을 쓰고, 고삐 없는 말을 타고 건드렁건드렁 수령의 연회 자리 아래 못 둑을 지나갔다.
진주목사가 모처럼 봄날 밖에 나와 상춘을 하고 있는데 웬 놈이 겁도 없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자 분기가 치솟아 저 놈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관속이 육모방망이를 꼬나들고 못 둑으로 내달아 오일봉을 잡아서 “니 놈이 말을 탈 데 가서 말을 타야지, 여게서는 못 탄다.”라고 소리를 쳤다. 산청 오일봉이 그 말을 듣더니 화를 내며 도리어 “나라에서 국상이 났다고 하는데, 관장(官長)들이 놀이가 다 머꼬!”라고 소리를 질렀다. 북장대에 앉아 있던 사또가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오일봉은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산청 오일봉이 제 말 제가 타고 가는데, 머슨 잔소리가 이리 많노? 국상이 났는 줄도 모르고 수령이 노는 것은 또 머꼬!”라고 계속해서 오일봉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모여 앉았던 관장들은 후환이 두려워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대사지가 있던 곳은 북장대 아래에서 현 중안초등학교, 진주경찰서 일원까지 넓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이 성을 헐어 못을 메워버리고 그 자리에 건물들을 세우게 하였다. 이 못은 본래 큰 절터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내려앉아 못이 되더니 잉어가 뛰놀았고, 잉어가 점점 커지자 못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못 가운데 석가산(石假山)이 있고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대홍수와 장대산」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되어 사방천지가 다 물에 잠겼다. 중국의 하나라도 이때 홍수를 만나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소식을 들은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고, 부루는 부왕의 명을 받고 중국 한족에게 치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삼한 땅도 홍수로 큰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 낮은 곳은 다 물에 잠기고 윗부분만 남게 되었다. 집현면의 장대산도 예외가 아니어서 낮은 산은 모두 물속에 잠겼고, 장대산도 아랫부분은 모두 물에 잠기고 꼭대기가 되는 윗부분만 남았다. 사방 물바다 속에서 남은 윗부분의 모습이 제사 지낼 때 잔대만큼 남았다고 하여 ‘잔대산’이라 했다.
그 뒤 세월이 흐른 뒤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산꼭대기에서 군사들이 있으면서 적정을 감시하였다고 하여, 마치 군사 요충지의 지휘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하여 ‘장대산’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도깨비 방망이」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과 함께 사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나무를 해다가 식구들을 먹여 살렸는데 비록 어리지만 어른스럽고 효성이 지극했다. 어느 날 산에 나무를 하러가서 나무를 해놓고 보니 개암이 조롱조롱 달린 개암나무가 보였다. 마침 잘 됐다 싶어 가족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개암을 따 모았다.
그런데 개암 따는 데 정신이 팔려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당황한 소년이 사방을 둘러보니 먼 곳에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나무를 지고 허겁지겁 그 집으로 가 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었다. 밤이슬을 피하기 위하여 마루 밑에 들어가 웅크리고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디서 도깨비들이 몰려와 방안에 모여 앉아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리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었다. 방망이를 두드리면 나오라고 하는 음식이 수북이 나왔다.
소년은 마루 밑에서 배가 고파 호주머니에 있는 개암을 한 알 꺼내어 깨물었다.   “딱!” 소리를 내며 개암이 깨지자, 도깨비들이 그 소리에 놀라 음식과 방망이를 그대로 둔 채 모두 달아나 버렸다. 소년은 방으로 들어가서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도깨비 방망이도 챙겨 내려와 음식도 실컷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
이웃집에 사는 욕심쟁이가 그 소문을 듣고는 소년의 집으로 찾아와 부자가 된 까닭을 물었다. 마음씨 착한 소년은 숨기지 않고 욕심쟁이에게 전후 사정을 모두 말해 주니, 욕심쟁이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 그대로 따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산에 올라가서 먼저 개암을 따고,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빈집으로 가 마루 밑에 숨어 도깨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음식을 만들고 잔치를 하면서 웅성거렸다. 욕심쟁이는 마루 밑에서 개암을 ‘딱!’ 깨물었다. 그러나 도깨비들이 달아나지 않고, 도리어 마루 밑으로 달려들어 욕심쟁이를 끌어내어다가 방안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도깨비들은 ‘네가 그때 그 도둑놈이로구나!’하면서 욕심쟁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흠씬 두들겨 맞은 욕심쟁이는 정신이 가물거리면서도 ‘도깨비 방망이, 도깨비 방망이’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도깨비 절교하기」
옛날에 도깨비와 친한 사람이 살았다. 그는 도깨비가 고기를 잡아 달라고 하면 뱀이나 고기를 많이 잡아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도깨비가 너무 자주 찾아왔고, 그는 도깨비가 귀찮아져서 떼버릴 궁리를 하였다.
하루는 그가 도깨비에게 무엇이 제일 무서운 지를 물어 보았다. 도깨비는 개의 피가 있으면 근처에도 가지 못할 만큼 무섭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도깨비가 그에게 무엇이 무서운지 물었다. 그는 누가 사립문 밖에다가 엽전 같은 것을 많이 놔 놓으면 기절할 정도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고 난 뒤, 그는 도깨비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개의 피를 흩뿌려 놓았다. 이에 화가 난 도깨비도 그의 집 사립문 밖에 돈을 줄에 끼어 많이 놓아두었다. 그 뒤 도깨비는 다시 오지 않았고 그는 도깨비가 준 돈으로 잘 살았다.
 
  「독사등과 까마귀등」
 
옛날 진양군 미천면 오방리에 박씨 문중이 살고 있었다. 마을 골짜기에는 봉긋이 솟은 두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독사등은 명당자리였다. 박씨 문중은 그 자리에 묘를 써서 재산이 늘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 날로 번성하였다.
어느 날 한 도사가 찾아왔으나 주인이 홀대하여 돌려보냈다. 도사는 나오면서 괘씸한 생각이 들어 앙갚음을 할 생각을 품었다. 독사등에 있는 무덤이 박씨 문중의 무덤임을 안 도사는 독사등 뒤에 있는 봉우리를 까마귀등이라 부르며 소문을 내고 다녔다. 과연 마을 사람들이 보니 까마귀를 닮아 있어서 그때부터 그 봉우리를 까마귀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름이 생기고 나서 박씨 문중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박씨 문중에서는 백방으로 그 까닭을 알아보니, 봉우리 이름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산봉우리가 까마귀가 독사를 쪼고 있는 형상이니 독사등의 기운이 사라져서 해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까마귀등이란 이름을 사람들이 널리 부르고 있었으므로 이름은 바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궁리하다가 독사등 부근에 있는 천연 동굴을 독사등의 은신처로 정했다. 그 동굴을 굴둥곡이라 부르며 독사가 그 곳에 은신하도록 하고 동굴 앞에 개구리 모양으로 돌을 쌓았다. 독사가 은신처에 있으면서 개구리를 먹으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였더니 그 뒤로 박씨 문중의 형편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돌장석(이정표)」 
마귀할머니는 키가 팔 척이고, 힘은 황소 힘 같아서 감히 누가 접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귀할머니는 냉정 북쪽(지금의 거창과 함양 지역)의 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마을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였다. 특히 정의로운 일이라 생각되면 밤낮없이 성취해 내는 불같은 인품을 가져 정의파로 소문이 자자했다.
냉정이라는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진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써 고을원님이나 암행어사, 사신이 한양을 왕래하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잡다한 도적이나 산적들이 들끓었는데, 마귀할머니가 나타나 불순한 사람들을 몰아냄으로써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진주성을 축조하는데 자재를 구한다는 방이 경상남도 지역  곳곳에 나붙었다. 마귀할머니는 좀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진주성에 찾아가 무엇을 도와주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당시 진주목사는 결이 아름다운 바위를 구하여 진주성곽 주위를 곱게 단장하도록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마귀할멈은 곧 사방을 밤낮없이 찾아 헤매다가 북쪽에서 좋은 바위 두 개를 골라 치마에 싸서 돌 지팡이를 짚고 진주성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바로 냉정마을에 도착하여 쉬고 있었는데, 마침 진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사람에게서 진주성 축조가 완료되어 며칠 후에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마귀할멈은 화가 나서 앞치마의 바위는 논바닥에, 뒷치마의 바위는 옆의 밭에 내팽개치고 돌 지팡이는 지금의 자리에 꽂아놓고 북쪽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 돌지팡이에 한양으로 가는 이정표를 ‘진주 북 20리’라고 새겼다. 한편, 앞치마와 뒷치마의 바위는 경지 정리를 하여 현재는 없다고 한다.
 
  「돌팔매꾼 조씨」
함안(咸安)에 조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다른 특별한 재주는 없었으나 돌팔매질은 아주 잘하였다.
매일 밥을 먹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는 나무를 한 짐 해 놓은 뒤, 산에서 돌팔매질 연습을 하곤 하였다. 처음에는 잘 맞지 않았으나 매일 반복하여 연습한 결과 맞히지 못하는 게 없는 실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돌팔매질 실력을 보고는 포수의 경지까지 이르렀다고 칭찬을 하였다. 조씨는 나무를 하고는 돌팔매질로 새나 산짐승을 잡아 홀어머니의 반찬으로 만들어 봉양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씨도 어머니를 모시고 진주성으로 피란을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였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씨는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은 없으나 돌팔매질이 워낙 정확하여 왜군을 향하여 돌팔매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던지는 돌마다 정확히 적군을 맞혔다. 하나둘씩 적군은 쓰러졌고 적들은 그의 돌팔매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돌팔매에 맞은 적군은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왜군을 물리치는 데 조씨도 일조를 하여 유명해졌고, 오늘날까지 조씨의 돌팔매 솜씨가 전설로 전해진다.
 
 
  「두꺼비 배가 부른 연유」 
여우와 토끼, 두꺼비가 있었다. 여우가 토끼와 두꺼비에게 떡을 쪄서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시루떡을 푸짐하게 쪄 놓고는 여우가 가장 술을 못 먹는 자가 떡을 먹자고 말했다. 토끼가 여우에게 어떻게 술을 못 마시느냐고 물었다. 여우는 밀밭 근처만 가도 술이 취한다고 했다. 그 말에 토끼는 당신 얼굴만 봐도 술이 취한다고 했다. 이 말에 두꺼비는 너무 기가 차다고 하면서 자기는 두 사람 말만 들어도 술이 취한다고 하였다. 여우와 토끼는 두꺼비 말에 말문이 막혔고, 내기에 이긴 두꺼비가 포식을 하게 되었다.
부아가 난 여우가 다음날 내기를 한번 더 해 보자고 했다. 이번에는 먼저 태어난 자가 떡을 먹자고 했다. 토끼가 여우더러 언제 태어났느냐고 물으니, 여우는 태고천황시(太古天皇時)에 났다고 했다. 토끼는 천지가 개벽할 때 태어났다고 했다. 그러자 두꺼비는 태고천황시에는 큰 자식이 죽고 천지개벽시에는 작은 자식이 죽었다고 했다. 결국 이번에도 두꺼비가 떡을 다 먹었다. 화가 난 여우는 두꺼비 배를 이리 차고 저리 찼다. 그래서 그때부터 두꺼비 배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둔갑한 이야기」
 
어떤 집에서 세 가지 비밀을 적은 종이를 궤 안에 넣어두었다.
그 집 새신랑이 장가를 가려고 하는데, 근신하는 몸종이 쇠죽을 끓이다가 사랑방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원념이 실린 물건이 화하여 사람을 해칠 잡귀같이 된 것들이었는데, 새신랑이 장가갈 적에 죽이자는 이야기였다. 잡귀 한 놈이, 자기는 청실배가 되어 새신랑이 먹으면 죽게 하겠다고 했다. 또 한 놈은, 옹달샘의 새파란 물이 되어 새신랑이 먹으면 죽게 하겠다고 했다. 또 한 놈은, 그래도 죽지 않으면 새신랑이 장가가서 행례(行禮)하고 방에 가서 앉을 때 송곳이 되어 똥구멍을 쑤시겠다고 했다.
새신랑이 역마 위에 얹힌 가마를 타고 장가가는 날, 몸종은 굳이 자기가 말고삐를 몰았다. 가는 도중 청실배가 조롱조롱 열려 있었고 새신랑이 그것을 따오라고 했다. 종은 그것을 먹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채로 때리면서 말을 빨리 몰았다. 그리고 좀 가니 옹달샘에 새파란 물이 있어 새신랑이 말을 세우고 물을 떠오라고 했지만 종은 또 안된다고 하며 말을 몰고 달아났다. 마침내 장가를 가서 행례하고 청사초롱 들고 방에 들어가 앉으려고 하는데, 종이 새신랑을 떠밀어버리고 송곳을 빼냈다. 방바닥에 엎어진 새신랑은 자기를 창피하게 했다며 집에 가면 종을 죽이겠다고 했다.
어쨌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적에도 종은 혹시 몰라 자기가 말을 몰았으나,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신랑이 다른 종들을 시켜 그 종을 잡아 묶으라고 하자, 종은 상객(上客)과 새신랑 아버지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궤 안을 찾아보니 세 조각으로 적어 놓은 게 있었는데, 종이는 가만히 있고 잡귀가 되어 날아갔다. 그래서 종이를 불살라버렸다.
 
  「들꿩 신랑과 구렁이」 
옛날에 임신한 어떤 여자가 베를 짜다가 기운이 없어 쑥 소쿠리를 들고 들에 나갔다. 쑥을 캐던 중에 논두렁 밑에서 꿩 한 마리가 파닥파닥하고 있는 것을 잡아와서 먹었다. 그 뒤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들꿩을 먹고 낳았다고 하여 이름을 들꿩이라 지었다.
들꿩이가 어여쁜 각시에게 장가 갈 날을 받아놓고 서당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길 도중에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나오더니, “내가 잡아먹으려고 독을 품어놓은 꿩을 네 어머니가 먹었다. 그러니 네가 장가갔다 오는 날, 너를 잡아먹겠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가 간 첫날밤에 들꿩이가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시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근심이 있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들꿩이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각시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각시는 그 말을 듣고, 걱정하지 말라며 들꿩이를 안심시켰다.
다음 날 신행(新行)을 갈 때, 각시는 신랑더러 뒤따라오라고 하고는 자기가 먼저 앞서서 갔다. 길 중간쯤 오니, 정말 짚동만한 구렁이가 신랑을 잡아먹겠다며 혀를 날름거리며 서 있었다. 각시는 구렁이에게 신랑을 잡아먹으면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며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구렁이는 각시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보물을 주겠다고 하였다. 각시는 그렇다면 보물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구렁이는 사각 모양의 쇳덩어리 네 개를 내놓으며, 첫째 것에는 돈이 나오고, 둘째 것은 밥, 셋째 것은 옷이 나온다고 하였다. 각시는 마지막 것에는 무엇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구렁이는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각시가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신랑을 잡아먹을 수 없다고 하였더니, 할 수 없이 넷째 것은 미운 사람 때리면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각시는 그것으로 구렁이를 때렸다. 구렁이가 죽은 후 신랑도 살리고 보배도 얻고, 아들딸 낳고 아주 잘살았다고 한다.
 
  「떡보」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를 귀찮게 하던 시절이었다. 사신이 온다는 소식에 조정에서는 사신을 중도에서 보낼 수 있는 사람을 구하였다. 그래서 장안에서 한다하는 술꾼이 자원을 하였다.
그는 의주 압록강에 가서 사신을 기다렸다. 중국 사신이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별명이 ‘떡보’라고 할 만큼 떡을 즐기던 그는 그것이 ‘네 떡 세 개 먹겠느냐?’ 라고 묻는 줄 알고 다섯 개도 먹겠다는 뜻으로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그러나 사신은 삼강(三綱)을 아느냐는 뜻으로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떡보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자, 사신은 그것을 오륜(五倫)을 안다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였다. 사신은 한 나라에서 뱃사공을 하는 처지에 있는 놈이 삼강을 물으니 오륜을 안다고 할 정도이니 이 나라는 굉장한 문화인들만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놀란 사신은 곧장 자기 나라로 달아나버렸다.
 
 
  「똑똑한 제자」
옛날 어느 시골에 곶감을 무척 좋아하는 글방 선생님이 있었다. 곶감을 벽장 안에 넣어두고 하나씩 빼 먹곤 했는데 아이들에겐 한 개도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이걸 먹으면 죽는다며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다짐을 하곤 했다. 그 글방에는 꾀가 많은 아이 하나가 있었다. 이 아이는 곶감을 먹을 궁리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바깥에 볼일을 보러 가면서 곶감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
선생님이 나가자 꾀 많은 아이는 이내 벽장 속의 곶감을 꺼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평소에 먹고 싶었던 곶감을 좋아라 하고 모두 먹어버렸다. 곶감을 다 먹고 나자 아이들은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꾀 많은 아이는 자기가 다 책임질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선생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자 모두들 누워서 잠을 자는 척 하라고 했다. 자신은 일부러 선생님의 안경을 밟아서 박살을 내고는 자리에 누웠다.
선생님이 볼일을 보고 글방으로 돌아와 보니 안경은 박살이 나 있고, 곶감은 모두 없어진 채 꼬챙이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그 속에서 이리저리 모두 자빠져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가 차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고함을 질렀다.
다른 아이들은 가만히 누웠고 꾀 많은 아이가 부스스 일어나서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않았다. 글방 선생님은 화가 나서 왜 이랬는지 말하라고 하였다. 꾀 많은 아이는 선생님이 나가신 후 아이들과 장난을 치다가 안경을 깨서 죽으려고 곶감을 모두 꺼내 먹었다고 하였다. 선생님은 아이의 지혜에 감탄하여 아무 말도 못했다. 다만 곶감을 혼자 먹으려다가 안경을 깬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고할미 물렛돌」
아주 오랜 옛날에 힘이 장사인 천태산 마고할미가 있었다. 하루는 옷을 만들기 위해 솜을 자아 실을 뽑으려고 물레를 돌렸는데, 팔 힘이 좋아서 자꾸 물레가 흔들렸다. 자기의 팔 힘이 센 것은 탓하지 않고 애꿎은 물레만 탓하였다. 그렇다고 살살 돌리자니 일이 더딜 것 같아 물레를 눌러 놓을 돌을 구하기로 하였다. 주변을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돌이 없어 멀리 동해로 나갔다.
바닷가에서 마침 물렛돌 할 만한 돌을 세 개 찾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머리에 이고, 다른 길쭉한 돌은 지팡이로 삼고, 마지막 하나는 치마폭에 싸서 가져왔다. 그런데 지금의 사천만 쪽으로 오다가 다시 보니 머리에 이고 오던 돌과 지팡이로 짚고 오던 돌은 너무 작아 보였다. 그래서 작은 돌 두 개는 도중에 내버리고, 치마에 싸서 오던 큰 돌 하나만 두문리까지 가지고 왔다.
마고할미가 가져오다가 버린 작은 돌은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의 서쪽에 위치한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의 구암리 구암마을 앞에 있고,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에 서 있는 돌이 ‘마고할미 물렛돌’이다.
 
 
  「말무덤과 선비」
 
옛날에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기 위하여 말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도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늙고 병든 말은 집현면 사촌리 터골에 와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비는 서울 도착 날짜를 다소 늦추더라도 말의 병을 고쳐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현면 사촌리에서 며칠 쉬면서 말을 돌보아 주었다. 선비는 인근에 말을 잘 고친다는 사람을 불러다가 살펴보게 하였으나 너무 말이 늙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선비는 하는 수없이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약초를 뜯어 와서 먹이고 약초를 찧어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점 말의 기운은 쇠약해졌고, 어떤 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치료한 지 사흘이 되던 날 아침 말은 결국 죽고 말았다.
선비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타고 다니던 순한 말이었기에 남다른 정이 있었다. 과거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리겠노라 다짐하고, 마을 앞에 돌로 말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갓 속에 쓰던 탕건 모양의 돌을 얹어 사랑의 정표로 삼았다.
선비는 말무덤을 만든 뒤에 다른 말을 한 필 구해서 다시 서울로 떠나 과거 시험을 보는데 시제(試題)가 말에 대한 것이었다. 선비는 자기 말의 죽음에 대한 글을 애절하게 썼고,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였다. 선비는 다시 내려오는 길에 집현면 사촌리에 들러 말무덤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문을 지어 읽어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망건 훔치기」 
옛날 돈도 없고 잡상스런 사람이 망건을 사러 갔다. 망건을 펴 놓고 파는 장바닥에 가서 망건을 하나 거꾸로 썼다. 그러고는 망건을 어찌 쓰냐고 물으니 망건쟁이는 망건을 팔기 위해 이렇게 씌운다고 씌웠다. 그 틈을 타서 그는 망건 몇 개를 훔쳐 호주머니에 넣었다.
 
  「망경대와 벼락 꺾은 강감찬」
 
망경동 골짜기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해 뇌성이 일며 불칼(벼락)이 떨어지니 강감찬이 물에 집어넣었다가 불칼을 꺾어버렸다. 그 찬물 샘은 늘 물이 마르지 않았다.
또 강감찬이 샘가에서 강냉이대를 궁둥이에 대고 옥수수를 똥처럼 엉덩이에 붙이고 똥 누는 척하고 앉아 있으니 벼락이 때렸다. 그러자 강감찬은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자를 달라고 하여 불칼을 꺾었다. 강감찬이 옥황상제에게 비니까 자를 내려 주어서 그것으로 불칼, 즉 벼락을 꺾어 버렸다는 설화이다.
「망경대와 벼락 꺾은 강감찬」 설화에서는, 양반이 서울을 바라보고 늘 임금에게 절을 하였으므로 서울 경(京)자를 써서 망경대(望京臺)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현재 진주 지역에서는, 경치를 바라보는 대라고 하여 망경대(望景臺), 진주 시내를 바라보는 대라고 하여 망진대(望晋臺)라 불리고 있다.
 
 
  「매구」 
어떤 사람이 딸을 키우는데 밤중이 되면 탈탈 털고 나가곤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살펴보니 밖을 나가 담을 후딱 넘어가는 것이었다. 섬뜩하여 따라가지는 못하고 한참 있으니 돌아왔다. 이튿날 저녁에도 그 시간이 되어 자는 척 하고 있으니, 딸은 “참 기분 나쁘다. 자지도 않고 매구 짓을 하고 있네.” 라고 말하고 나서 착 누워 있더니, 매일 그렇게 해도 내가 그 시간을 못 넘기겠다며 살랑 나갔다.
어머니가 무서워 따라가지 못하고 문구멍으로 보니 또 담을 팔짝 뛰어 넘어갔다. 잠을 자지 않고 있으니 또 살짝 들어와, “자지도 않고 숨 쉬고 있다.”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살랑 누웠다. 그런데 문에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데 계집애 인물이 아주 좋았다. 그래 저렇게 한창 꽃같이 피는데 저게 무슨 일인고 싶어 잠이 안 오고 입맛이 떨어지고 남에게 알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고민했다.
그때는 여자애를 보국대(報國隊) 가는 것처럼 그렇게 잡아들이는 시대였다. 그래서 딸을 지서(支署)에 가두나 이대로 두고 보나 하고 마음을 졸이다가 남편과 아들에게 살짝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 날 저녁 아버지와 아들이 딸을 따라갔다. 딸은 줄곧 산길로 들어가 묏등에 가서 세  번 재주를 넘으니 묏등이 갈라지고, 거기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딸이 나올 시간이 되자 무서워 일찍 왔더니, 딸은 나중에 뒤쫓아 와서 자는 척 하는 식구들에게 “여기도 다 알고 있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딸을 지서에 가두었는데 부모가 면회를 가면 “왜 나를 여기 가두었느냐.”고 하면서 풀어달라고 애걸하였다. 한 달을 굶주려도 얼굴에 축이 안 났고 나중에는 너무 얘기를 많이 해서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집안사람들을 잡아먹어 몰살시켰다.
 
  「매구가 된 여자」 
옛날 서울에서 진주 임지로 부임한 수령이 밤에 관내를 순행하였다. 마침 선학재를 지나 톱골 골짜기로 내려가는데 짚으로 덮어놓은 시체 위에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수령이 무엇이냐고 소리치자, 시체에 코를 박고 피를 빨아먹던 여자가 갑자기 획 돌아서면서 수령의 얼굴에다가 사정없이 피를 확 내뿜었다. 수령이 기가 차서 금방 말을 잇지 못하자, 여자는 수령에게 펄쩍 뛰어 덮쳤다. 그 순간 수령은 옷고름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그 여자를 내리쳤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이내 사라졌고, 땅에는 한쪽 귀가 떨어져 있었다. 수령은 귀를 주어서 관아로 돌아왔다.
날이 밝자 나졸을 풀어 범인을 잡아 오게 하였다. 수령의 명을 받은 나졸은 옥봉동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한 골목에서 작은 여자 아이가 뛰어나오자, 나졸이 그 아이에게 아픈 사람이 없는지 물었다. 아이는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다고 하였다. 나졸들이 그 집에 들어가니 귀가 잘려 피투성이가 된 여자가 있어, 관아로 압송하였다.
여자를 잡아와서 사연을 들어보니, 낮에는 멀쩡하게 있다가 밤에 열두 시가 되면 둔갑을 해서 시체의 옷을 벗겨다 장독에다 넣어두곤 한다고 했다. 남편을 조사해보니 남편도 몰랐으나 아내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알았다고 하였다.
아내의 증세를 고치기 위하여 남편은 밤에 자지 않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열두 시가 되자 아내가 부스스 일어나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서서는 서너 바퀴 공중제비를 돌고는 둔갑을 하는데 여우 꼬리가 보였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시체의 옷을 벗겨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편이 아내가 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의 콧구멍에서 쥐 세 마리가 차례로 나와서는 가장 뒤에 나온 놈이 앞장을 서서 먼저 나온 쥐들을 인도하여 가고 있었다. 보고 있던 남편이 목침으로 그 쥐를 탁 때려잡았다. 쥐를 잡고 나자 아내는 밤이 되어도 나가지 않았고, 증세는 없어져 건강해졌다.
 
  「매화나무에 오르는 용」 
이충걸은 본래 남해(南海)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한번 들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읽은 책은 줄줄 외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충걸은 신분이 미천하여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으나 지나가는 길에 한번 들은 내용은 모두 기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다른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남해 방백(方伯)이 진주를 들를 일이 생겨 따라와 현첩(공문)을 바치는 사이에 걸어오느라 피곤한 몸을 촉석문 밖 매화나무 밑에 잠시 몸을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가 매화나무 아래서 깜빡 잠이 들었을 무렵 공문을 처결하고 난 진주 방백도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진주 방백의 꿈에 촉석문 밖 매화나무 아래에서 용 한 마리가 나무를 슬슬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진주 방백은 깜짝 놀랐다. 사람을 시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가보게 하였다. 아전들이 달려가 보니, 매화나무 아래에는 이충걸이 비스듬히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사실을 보고하자 진주 방백은 즉시 이충걸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그리고는 거기 있었던 연유를 묻고 알고 있다는 글을 외워보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충걸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글을 줄줄 외워 보였다. 진주 방백이 물어보니 이충걸이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진주 방백은 기특하여 그의 신분을 양민으로 고쳐주고, 학문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렇게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충걸은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매화를 꺾은 양정공」 
양정공 하경복은 기골이 장대하고 큰 목소리를 가진 장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었을 때 조선에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왕이 된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은 자기편이 아닌 무관을 모두 죽이려고, 두 편으로 구분해 놓고 제거하려 하였다.
양정공은 이를 눈치채고 순식간에 “국가가 혼란한데 장수를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태종의 귀에까지 들렸다. 태종은 궁금하여 그 소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신하가 사실을 알아보고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었다. 보고를 들은 임금은 그 사람을 끌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내심  ‘먼 곳의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걸 보니 예사 사람은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끌려온 양정공은 기개가 늠름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태종은 그를 용서하고 관직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어느 해는 이런 일이 있었다. 상림원(上林苑, 임금의 동산)에 갔다가 많은 사람들이 매화를 가꾸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태종이 매화를 좋아해서 많은 관리들이 온실을 만들고 매화를 키워 잘 보이려고 안달이 났던 것이다. 이를 본 양정공은 상림원에 들어가 매화를 꺾어버렸다.
이 사실이 곧 왕에게 알려졌고 태종은 화가 나서 양정공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붙잡혀 온 양정공에게 감히 왕이 아끼는 매화를 꺾은 까닭을 물었다. 양정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하, 매화는 시골 울타리에서도 흔하게 지천으로 피어 볼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어인 까닭으로 전하께서는 매화를 그렇게 아끼십니까? 소인은 매화 가지를 꺾어 말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록 그렇다 해도 상감께 바칠 매화를 꺾어서는 아니 될 일이나 우리 같은 장수나 전하께서는 국방을 위해 전력을 다 바쳐야 할 것인데도 하잘 것 없는 매화를 가꾸느라 정신을 팔려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매화에 마음을 쏟지 못하도록 제가 꺾었습니다. 통촉하옵소서.”
그제서야 태종은 양정공의 뜻을 알고 매화 감상을 중단하고 국방에 힘쓰게 되었으며, 그 뜻을 귀하게 여겨 벼슬을 높여주었다. 훗날 그가 죽자 시호를 ‘양정(襄靖)’이라고 내렸다.
 
  「며느리 걸고 한 시아버지의 내기」 
조선시대 중엽 서울에 한 정승이 살았는데 가세(家勢)가 기울어 인망가폐(人亡家廢)가 되었다. 독자(獨子) 아들이 서른 살 정도 되어 죽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살 수 없으니 시골로 가서 남모르게 세월이나 넘긴다고 이사한 곳이 덕산(德山) 대원사 앞이었다.
대원사 중이 매일 그 집에 놀러 와서 보니 며느리가 탐이 나서 시아버지에게 자기가 글을 지어 당신이 답을 주면 백 석 곳집을 주고 답을 못하면 며느리를 달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정승 재직 중에 시관(試官)으로 있던 사람이라 글은 남보다 박식했으므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중은 “노승이배왈 소승배라(老僧拜曰少僧拜).”라고 했다. 즉, ‘늙은 중이 절을 하면서 소승이 절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답을 하라고 하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닷새 동안 말미를 주고 돌아갔는데 나흘이 지나도 답을 몰라 식음을 전폐하고 큰 걱정을 하였다.
며느리가 물어도 말을 하지 않고 반죽음 상태로 있다가 닷새 되는 아침이 되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 방의 문을 열려고 해도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그 중 이야기를 했다. 며느리는 그런 일로 걱정하느냐며 “사어매왈 생어매라(死魚賣曰生魚賣).”고 했다. 즉, ‘죽은 고기를 팔면서 산 고기 사소.’ 그렇게 하라고 했다.
밥을 먹고 의관을 갖추고 있으니 중이 와서 한시(漢詩)의 대구(對句)를 지었냐고 물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시키는대로 말했더니 중은 곡식이 들어 있는 곳집을 주며 항복하고 갔고, 그들은 한 밑천 잡고 살았다.
 
  「며느리 길들이기」 
옛날에 홀아비 영감이 며느리를 봤다. 그런데 이 며느리는 괘씸하게도 조금 괜찮은 음식이 있으면 부엌에서 다 먹어버리고, 시아버지에게는 모른 척 드리지 않았다. 이에 노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홀아비 영감은 부끄럽지만 그런 며느리 얘기를 하였다. 그러자 다른 노인들이 꾀를 내어, 시장에 가서 소의 천엽이나 간 같은 것을 넣은 국거리를 사다가 며느리에게 갖다 주라고 하였다.
영감은 장에 가서 소의 내장을 한 망태기 사서 국거리로 쓰라고 며느리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방에서 가만히 문구멍으로 내다보았다. 그랬더니 며느리는 국을 끓이면서 맛보는 척하더니, 건더기를 먹고 또 저어 맛보는 척하며 결국 건더기를 다 건져 먹어버렸다.
저녁이 되어 며느리가 시아버지 국을 떠 왔는데, 건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영감은  고기를 많이 사다 줬는데도 건더기가 없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며느리를 가만히 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며느리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부엌에서 자기 머리를 부뚜막에 세게 찧으면서 울었다. 그래도 시아버지가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며느리는 할 수 없이 나물 건더기를 넣은 국을 다시 가져왔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며느리 이야기」 
옛날 한 사람이 며느리를 세 명 보았는데, 어느 날 며느리들에게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좋으냐고 물었다. 다른 며느리들은 접시꽃을 비롯하여 여러 꽃을 말하였지만 한 며느리가 목화꽃이 제일 좋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목화를 심어서 옷을 해 입을 수 있고, 이불도 목화로 만들기에 목화꽃이 제일 좋다고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 며느리의 식견에 감탄하였다.
다시 며느리들을 불러 무슨 새가 크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새, 덕새와 같은 새들이 크다고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 며느리한테 물으니 새 중에는 먹새가 제일 좋다고 하는 게 아닌가. 먹새는 먹성 혹은 먹음새를 말한다. 이전에는 길쌈해서 옷을 만들어 입고 쌀이 없어 거친 보리밥해서 먹었기에, 먹고 사는 걸 제일 중요하다는 뜻으로, 먹새가 제일 크다고 답한 것이다. ‘이 새 저 새 해도 먹새가 으뜸’이라는 속담과도 상통한다.
 
  「명가와 안가」 
한 마을에 사는 명씨와 안씨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명씨는 안씨더러 늘 ‘무당 자식’이라고 놀려댔다. 그도 그럴 것이 안씨의 성인 안(安) 자는 한자의 상형으로 볼 때 ‘갓머리 밑의 계집 녀’이기 때문이다. 계집이 갓을 쓴 경우는 무당밖에 없으니 이치에 맞는 얘기였다.
안씨는 명씨의 고약한 말버릇을 고치기 위해 마을에 시주하러 오는 스님과 미리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안씨가 명씨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집에 중이 왔는데, 사람을 보니까 보통 중이 아닌 듯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소문도 많이 들었을 게고 학식도 넉넉한 사람인 듯하니, 오늘 우리 집으로 청할 테니 우리 그 중에게서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꾸나.” 명씨는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무당 자식’의 집에서 좋은 ‘이바구’ 한 번 들어볼까 하면서 아예 마실 술까지 청해 놓았다.
스님의 얘기는 이러했다. 한 동네의 처녀가 새벽녘에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갔는데, 난데없이 한 중이 나타나 그 처녀를 범하고 말았다. 일을 끝내고 중이 가려고 하자 처녀는 붙잡으며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다. 중은 ‘강원도 금강산 일경사에 있는 일경스님’이라고 했다.
또 이튿날에 처녀가 새벽녘에 물을 길러 가니 어제처럼 또 다른 중이 처녀를 범했다. 일을 치르고 가려고 하는 중의 바지를 잡고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강원도 금강산 월경사에 사는 월경스님이오’ 하면서 총총히 사라졌다.
그 후 처녀가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아비가 일경인지 월경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성을 날 일(日)자와 달 월(月)자를 합해 밝을 명(明)자로 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스님이 명씨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안씨는 명씨를 가리켜 ‘저 놈의 성이 명가요.’ 했다. 명씨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안씨에게 ‘예끼, 망할 놈’이라는 말 한마디를 내뱉더니 나가버렸다. 그 이후로는 명씨는 안씨에게 ‘무당 자식’이라고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명석 오무마을 자라바위」 
오무마을의 내력을 전하는 이야기로 수 백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한결 같이 착하고 부지런했지만 살림이 늘지 않아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해를 거듭해 갈수록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가난의 이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을에 한 노승이 찾아왔다. 노승이 보기에 마을 사람들은 착하고 게으르지도 않은데 살림살이는 궁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을의 사정을 이상하게 생각한 노승이 마을의 촌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만 마을의 촌장도 가난의 이유를 알 수 없어 마음만 답답하다고 하였다.
촌장의 이야기를 들은 노승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하고는 촌장을 앞세우고 뒷산에 올라 마을의 지세를 살폈다. 주위를 살펴본 노승은 앞산의 모습이 강줄기를 따라 기어가는 자라의 모습을 하고 있다며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촌장에게 앞산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앞산에는 입을 벌린 자라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었다. 자라바위를 발견한 노승은 그 바위가 바로 마을이 가난하게 된 원인이라고 말했다. 자라바위는 촌장의 마을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노승은 이 자라바위가 촌장의 마을의 양식을 먹고 알은 건너 마을을 향해 낳기 때문에 촌장의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살림이 피지 않는다고 말했다.
촌장이 방법을 묻자 노승은 자라바위의 목을 베어버리라고 하고는 마을을 떠났다.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노승의 말을 들려주고는 이 세상에는 자라바위의 목을 자를 만큼 힘센 장사가 없으니, 석 달 열흘의 기한으로 옥황상제에게 빌어보자고 말했다.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제단을 쌓고 성심껏 천상에 제사를 지냈다. 마을 사람들의 지극한 마음이 하늘에 전해져서 어느 날 옥황상제가 일관을 불러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의 사정을 물었다. 일관은 조선나라 진양 땅의 동네 사람들이 못된 자라의 목을 벨 수 있는 장사를 구하기 위해 하늘에 비는 소리라고 답했다.
옥황상제는 또 그 곳에 하강한 선녀를 찾아 사정을 물어보았다. 자라의 성질이 포악해서 선녀들이 내려가면 행패를 부리고는 했다는 선녀의 말을 듣고 옥황상제는 마침내 힘센 장사 다섯을 보내 못된 자라를 부수라고 명했다. 마을 사람들과 촌장이 제단 앞에 꿇어 엎드려 빌고 있을 때 별안간 험상궂게 생긴 무사 다섯이 나타나, 자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장사로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는 못된 자라의 목을 베라는 명을 받았다고 말하고는 천상의 갖가지 도구를 써서 자라의 목을 베어버렸다. 마침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자라바위가 떨어져 나갔고 다섯 무사는 다시 천계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마을은 살림이 윤택해졌고 평화롭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다섯 무사가 내려왔던 마을이라 해서 ‘오무(五武)’ 마을이라 불렀고, 촌장이 천상에 제를 올렸던 자리를 당산(堂山)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오무마을에는 머리를 잘린 자라 모양의 바위가 남아 있다.
 
  「명의 유의태」 
유의태는 소문난 명의였다. 특히 효험이 있는 의약품을 만드는 데 천재적인 재주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어 앉은뱅이가 된 그의 누님을 자신의 재주로 고칠 수 없다면서 방치했다.
그런데 그 누님의 아들이 효자였다. 병든 어미를 지게 위에 모시고 팔도강산을 구경시켜드리려고 했다. 하루는 그 아들이 갈증이 난 어머니를 위해 우물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오동나무 밑에 죽어있는 암탉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것을 깨끗이 씻어 푹 고아 삶아서 어머니께 드리니 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성치 못했던 온몸이 풀리면서 모자(母子)는 고향에 돌아왔다. 신의(神醫)라고도 소문이 난 유의태를 향해 그 누님은 ‘네 이놈, 유의태야’ 하면서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는 세 번 알을 깐 닭이 오동나무 밑에서 죽은 경우라야만 특효약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동생의 의술보다는 아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인해 병이 완치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명풍수 두필이」 
두필이라는 머슴이 대곡면(大谷面)에 살았다. 재령이씨 집의 하인으로 생활했는데, 대문을 넘을 때마다 살짝 뛰어 넘었다. 이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해오는 것을 지켜본 주인은 ‘저 놈이 미쳤나’ 하고 생각했다.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두필이는 “문턱 밑에 잉어가 나오니 어찌 밟고 가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주인은 그가 비범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재령이씨는 두필이를 괄시해 좋은 명산을 얻지 못했고, 인근 지수면(地水面)의 김해허씨는 두필이를 통해 명산 터를 많이 구했다. 두필이는 죽기 전에 대곡면 어느 고개 마루에 자신의 묘자리를 보아두었다. 머슴들이 나무하러 갈 때 쉬는 곳이었다.
 
  「목화 시배 전설」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는데, 정식으로 수입하지 않고 요즘 말로 밀수했다. 그런데 목화씨를 재배까지는 할 수 있었으나 베를 짜는 기술은 몰랐다. 그의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이 중인지 도사인지 하는 사람에게서 그 기술을 배워 널리 전파했다. 물레(문레)는 문익점의 집안인 문씨네들 사이에서 만든 것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식한 신부」 
옛날 한 사람이 딸을 혼례 시키는데, 행례청(行禮廳)에서 신부가 삼강오륜을 알아야만 예식을 마치지, 모르면 예식을 못 마치겠다고 신랑이 버텼다고 한다. 신랑과 각시가 양쪽에 서 있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지금 사람 같으면 부끄러움이 없겠지만 당시 신부가 삼강오륜을 알아도 어찌 거기 나서서 말을 할 것인가.
그래도 자꾸 말을 하라고 하자 신부는 댕기를 들고 척 나서서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이라면 삼강오륜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 그만 혼례를 취소하고 갔다.
 
  「문익점과 정천익」 
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때의 관리이고, 정천익(鄭天益)은 문익점의 장인이다. 문익점은 전국에 면업을 일으킨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시대에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목화 시배에 관해 문익점과 정천익 집안 사이에 시비(是非)가 있었다.
붓에 목화씨를 숨겨온 문익점이 소남(召南) 관정이란 곳에 살고 있는 장인 정천익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내가 목화 종자를 가져오기는 했는데 목면(木綿)이 아니고 초면(草綿)입니다. 이 초면은 한 해 살고 한 해 죽는 것이니, 이것을 재배해 보십시오.”
그래서 정천익이 목화를 재배했는데, 첫해에는 겨우 몇 개만 살아 꽃이 피었다. 그 씨를 까보니 여남은 낱이 되었다. 그런데 물에 담그니, 잔뿌리가 나오지 않아 스스로 영양소를 섭취 못하고 시들어 죽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정천익은 삼 년 만에 재배에 성공했다.
한편, 강성군으로 봉해진 문익점이 목화씨를 배양(培養)해서 재배를 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문익점과 정천익 이 두 집안 자손들 사이에서는, 씨는 문익점이 가져왔지만 재배는 정천익 집안에서 했다, 문익점이 재배까지 다 했다는 시비가 벌어졌다고 한다.
 
  「믿을 수 있는 자식」 
두 친구가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강물이 불어났다. 배는 문짝만하게 작고 손님은 만원인데 서로 타고 가려고 옥신각신하자, 한 친구는 위험을 느끼고 배를 타지 않고 빠져나와버렸다. 그런데 다른 한 친구는 기어이 건너간다고 고집을 피워 배를 탔다. 아니나 다를까, 배는 물 가운데 가서 그만 뒤집혀버렸고 그 친구는 나오지 못하고 물에 빠졌다.
그래서 친구 아버지에게 그 경위를 말해 드리려 갔더니, 친구 아버지는 다른 어른과 바둑을 두고 계셨다. 차마 그 와중에 자식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말을 못하고 망설이다가 바둑이 끝난 뒤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런데 친구 아버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 한 대를 재더니 상대에게 한 판 더 두자고 했다.
그는 ‘쓸데없이 왔구나’ 생각하고 무안해서 낯이 빨개 가지고 곁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바둑판을 끝낸 친구 아버지는 “자네가 사실을 알리러 온 것은 고맙지만, 내 자식은 물에 빠져 죽을 놈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립 밖에 그 집 아들이 돌아왔다. 그래 깜짝 놀라 마중을 나가서, 자네가 그만큼 담담하고 사람 됨됨이가 돼 있으니 자네 어르신이 찰떡같이 살아 돌아올 것을 믿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친구 아버지에게 경솔하게 실수를 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바깥사돈과 안사돈」 
어떤 홀아비가 홀로 키우던 딸을 청상과부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 후행(後行: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갈 때 같이 가는 사람)을 갔다가 병에 걸렸다. 딸이 병문안을 와서 병이 난 이유를 묻지만 홀아비는 대답하기를 꺼리는데, 계속해서 이유를 묻자 후행을 갔다가 안사돈을 보고 병이 났다고 한다.
지혜가 뛰어난 딸은 홀아비에게 큰 엄마의 옷을 빌려 입고, 안사돈을 만나러 오게 한다. 딸의 계획대로 홀아비는 안사돈과 하룻밤 동침을 하게 된다. 안사돈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홀아비는 불 꺼진 방에서 자신의 성기가 초승에는 길어지고 그믐에는 짧아진다고 한다. 다음날 홀아비가 집에 가려고 하자 안사돈이 다음번에 오려면 초승에 오라고 한다.
 
  「바보 마누라」 
옛날 어떤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내가 바보였다. 부부는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자식들에게 입힐 옷이 없었다. 아내가 옷감을 가져달라고 했지만 남편은 잘 가져다주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은 아이들 옷감으로 광목을 떠다 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옷은 만들지 않고, 광목으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에 아이들을 넣었다. 바라보던 남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남편의 웃는 모습을 본 아내는 옷감은 잘 안 떠주더니 옷 입은 아이들을 보니 좋으냐고 묻는다.
 
  「바보 부부」
옛날 어떤 바보 신랑과 신부가 있었는데, 둘 다 어리석어서 바보 비슷했다. 첫날밤 신랑은 신랑 다루기에서 시가(詩歌)를 못해 처가 식구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답답했던 신부는 신랑에게 시가를 안 하는 이유를 물었다. 신랑이 아는 시가가 없다고 대답하자 신부는 신랑에게 노래를 가르쳐준다. 어리석은 신랑은 신부가 하는 말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만 했다.
이번에는 신부가 앞으로 태어날 아이 이름을 짓자고 하자 한참 노래를 따라하던 신랑이 “가관이다”라고 대답했다. 어리석은 신부는 아이 이름을 ‘가관’이라고 지을 것이냐고 물었다. 부부는 첫날부터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다음날 신랑은 신부를 버리고 집을 나가려고 했다. 신부가 어딜 가느냐며 신랑에게 묻자 신랑은 손사래를 치며, 함께 못살겠다고 한다. 신부는 신랑이 흔드는 손을 보고 닷새 밤을 자고 올 것이냐고 물었다.

  「베 팔아 산 이야기」
어느 외톨이 집에 멍청한 부부가 살았는데 밤이 되면 외롭기 짝이 없었다.
하루는 아내가 베 한 필을 주면서 팔아 이야기를 사 오란다. 이야기라도 하면 외로움이 덜 할까 싶어서다.
주변머리없는 남편은 아내가 시킨 대로 베를 갖고 시장에서 팔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사야겠는데 어디가서 어떻게 사야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리저리 싸다니는데 나무 그늘에 나이 많은 노인이 하릴없이 담배만 빨고 있었다.
“그래 나이가 많아야 이야기를 많이 갖고 있을 거야.”
그리고는 노인에게 다가가서 돈을 디밀면서 이야기를 팔라고 조른다. 노인은 이런 딱한 사람 봤나 하고 눈만 끔벅이는데 이야기를 팔라고 성화를 부리는 게 빚 받으러 온 빚쟁이 같았다. 노인도 아는 이야기가 없어 논 가운데를 보니 황새 한 마리가 논에 내려앉는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휑 날아든다.”
황새가 성큼성큼 걸어 다니자
“성큼성큼 걸어온다.”
황새가 목을 빼고 두리번두리번하니,
“둘레둘레 살핀다.”
다시 논고동을 입에 물고 휑 날아가자.
“물고 달린다.”
이렇게 말하자 그것도 이야기라고 잊지 않기 위해 외우며 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어 남편이 마주앉은 아내에게 이야기 사온 것을 알려 준다.
“휑 날아든다.”
그때 도둑이 담을 넘어 마당에 내려 서다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설마 자기를 보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데,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런다. 이게 무슨 소리냐. 누가 보고 있는가 싶어 고개를 빼 이리저리 살피니,
“둘레둘레 살핀다.”
들켰구나 싶어 부엌의 솥을 들고 막 나가려는데
“물고 달린다.”
아이쿠 내가 하는 짓을 모두 보고 있었구나 하고 도둑은 솥을 내동댕이치고 도망을 가버렸다.
부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것도 이야기라고 밤새도록 그 말만 되풀이하더란다.

  「뱃놈 상객」 
옛날 한 뱃사공이 자식을 장가들이면서 장가가서는 함부로 뱃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한다. 아들은 장가가서는 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사공은 장가가는 아들의 방 창문 앞에 앉아 지켜보았다. 신랑을 보기 위해 구경꾼이 모여들자 아들은 약속을 잊고 아이들이 꼭 멸치 배 들어온 것처럼 많다고 했다. 아들의 뱃소리를 듣고 화가 난 사공은 아들을 꾸짖기 위해 창문을 열었으나 자신도 뱃소리로 꾸짖고 만다.
 
  「버릇없이 자란 아들의 개과천선」 
옛날 어느 부부가 만년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힘들게 낳은 아이가 귀여웠던 부부는 아이가 자신들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잡아당겨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훗날 아이가 점점 자라자 노부부는 뺨과 머리를 당기는 일이 견디기 어려워졌다. 노부부의 아들은 집안이 어려워 건너 마을 진사 댁에서 머슴을 살았는데, 진사댁 아들은 부모에게 절을 하고, 고기도 가져다 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 그것을 본 노부부의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진사 댁 아들과 똑같이 노부부를 봉양했다. 그러나 노부부는 아들이 언제 자신들을 해칠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것을 본 아들은 자신이 어릴 때 행한 불효를 반성하고 효자가 되었다.
 
  「봉사 남편과 벙어리 아내」 
옛날 어느 마을에 봉사 남편과 벙어리 부인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웃집에 불이 났다. 먼저 부인이 나가보았으나, 말을 못하니 남편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나가보았으나 봉사인 남편은 볼 수가 없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누구네 집에 불이 났느냐고 묻자 아내는 남편의 낭심에 손을 대었다. 남편은 불이 나서 기둥만 남았냐고 묻고는 누구네 집에 불이 났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의 왼쪽 고환을 만졌다. 남편은 좌랑(左郞)이 집에 불이 났구나라고 했다.
 
  「봉황과 심술궂은 할머니」 
 
옛날 봉강마을에 큰 봉황 한 마리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봉황이 알을 낳으려 할 때였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심술궂은 할머니가 봉황을 보고선 큰 소리를 질러 쫓아버렸다. 할머니의 고함소리에 놀란 봉황은 봉강에 마련한 보금자리를 두고 훨훨 진주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봉강을 떠난 봉황은 봉곡촌(鳳谷村, 지금의 상봉동)에 자리를 잡고 둥지에 알을 낳았다. 그 곳에 새 둥지를 마련하고 알을 낳으니 사람들은 봉황이 날아와 알을 낳았다고 하여 ‘봉알자리’라고 부른다. 그 자리가 지금의 상봉동동(上鳳東洞)에 있는 봉알자리[鳳卵臺]이다. 봉황이 떠난 뒤 봉강마을 사람들은 봉황을 쫓아낸 잘못을 알고 봉이 내려앉았던 곳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봉강’이라 짓게 되었다.
봉강마을은 지금은 집현면사무소의 소재지이며, 집현면의 중심지로 성장했지만 만약 그 봉황이 봉강에서 알을 낳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면, 보다 더 발전하고 잘 사는 마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부모입에서 효부난다」
어느 집 며느리가 제법 드셌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시아버지를 우습게 알아 애초에 효부소리 듣기는 글렀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이웃 잔치에 가겠다고 의관을 좀 챙겨 달란다. 그러자 며느리는 쌍심지를 돋우며 대든다.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이 가을에 바빠서 똥오줌도 못 가리는데 놀러가 무슨 놈의 놀러 입니까. 안됩니다, 안돼요. 절대 못 가요.”
드센 며느리라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잔치 음식을 먹고 싶었고, 오랜만에 또래의 친구들도 만나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방안으로 들어가 옷을 뒤져 입고는 그냥 도망가듯 내달렸다. 일을 하던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잡으려고 뒤쫓아갔다. 도망가는 시아버지와 잡으러 가는 며느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골목을 지나 밭을 가로질러 뛰는 두 사람은 어느새 잔칫집에 당도하자 시아버지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박신거리는데 차마 집안까지 뛰어 들어간 수 없어 담장 위로 머리를 내밀고 씨근덕거리는데 며느리를 떨친 시아버지는 잔칫상 앞에 앉자 말자 일하는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음식을 시킨다.
“이 사람아, 음식 한 접시 더 갖고 오게. 힘에 겨워서 나 혼자 못 온다고 우리 며느리가 예까지 모셔다 주고 저 밖에서 기다리는데 우리 며느리도 좀 먹여야 되지 않겠나?”
그러자 심부름하는 사람이 상을 따로 차려 나와 며느리를 주는데 상을 받은 며느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시아버지를 구박만 했는데 정작 시아버지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다니.
감격스럽고 죄 서러워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느리도 마음을 고쳐 먹고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옛말에 ‘부모 입에서 효자 난다’는 말이 생겼다.

  「부자가 된 숯쟁이」 
한 처녀가 밤이 되어 어느 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숯 굽는 총각이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처녀는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부엌을 보니 금덩어리가 있었다. 부인은 신랑을 시켜 금덩이를 들고 담벼락을 치게 했다. 건너 마을에 사는 천석꾼 부자가 우연히 금덩이를 보고 자기 재산과 바꾸자고 했다. 부자는 문서를 작성해 재산을 바꾼 뒤 그 집으로 가 보았지만 금덩이가 없었다.
 
  「뺏아 묻은 명당」
어떤 부자가 죽어 좋은 자리에 묘를 쓰려고 하자 그 딸이 심술을 부려 묘에 물을 갖다 부었다. 사람들은 묘에서 물이 나서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딸은 이후 시아버지가 죽자 그 자리에 묘를 썼다. 딸 때문에 좋은 묘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산신령의 기행」 
옛날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늦게 아들을 하나 낳았다. 어느 날 서당에 다니던 아들이 집에 돌아왔는데, 말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 한 노인이 찾아와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하는데, 노인의 정체는 산신령이었다. 노인은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살펴보더니, 집에 닭을 기르느냐고 물었다. 노부부가 닭을 기른다고 하자 살아 있는 닭의 피를 내어 아이 입에 넣어주라고 했다. 닭의 피를 아이 입에 흘려 넣자 갑자기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입에서 뛰어나왔다. 아이는 피리를 못 불게 하는 노부부 때문에 서당 가는 길에 있는 풀 속에 피리를 숨겨뒀는데, 그 속에 지네가 들어간 것이다. 노인이 떠나려 하자 노부부는 보답을 하겠다고 했지만 노인은 받지 않았다. 노부부가 계속 보답하겠다고 하자, 성의만큼 나중에 보내달라고 했다.
저녁이 되어 노인이 어느 여관에 들었는데, 주인 여자가 섭섭하게 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인이 주인에게 오늘밤 죽을 사람이 섭섭하게 대한다고 하자, 주인은 처음에는 예사롭지 않게 대했으나 걱정이 되어 살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노인은 알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계속되는 부탁에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주인 여자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는데,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오늘밤 바람피우는 남자로 변장해 찾아올 것이니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한다. 주인 여자는 노인의 말대로 문을 열어 주지 않다가 세번째에 남편임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주인 여자가 노인에게 보답하려 하자, 성의만큼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하면서 다시 길을 떠났다.
노인이 숲 속을 지나다가 징역 간 아버지를 위하여 불공을 지내고 있는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산신령은 처녀의 정성에 감복하여, 처녀에게 돈이 우편으로 전해지는 곳을 가르쳐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상소광 강응룡」 
조선시대 진주에 강응룡이라는 상소(上疏)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비록 글 솜씨는 뛰어나지 않으나 성품이 괴팍스러워 상소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강응룡은 소장(疏狀)을 올려도 반드시 방백(方伯)을 통해 올렸다. 사안이 중요하건 사소하건 간에 번번이 상소를 하였기 때문에 방백은 강응룡의 상소 때문에 골치를 앓았고, 아전들도 강응룡의 상소라고 하면 받기를 꺼렸다.
어떤 때는 관아에서 상소받기를 꺼리면 방백이 나들이하는 가마채를 붙잡고 흔들거나 말고삐를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가는 길을 막고는 “진주 고을 강응룡의 상소문이요!” 하고 외치며 물고 늘어지면 내로라는 방백일지라도 배겨내지 못하고 받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사건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상소를 하기 때문에 방백에게 번번이 묵살되고 대수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 한 번은 제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일대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되었다. 향시(鄕試)를 보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은 대개 삼백 명 가량으로 대식솔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초시(初試)에 오른 선비들이어서 나라에서 후하게 대접을 하였고, 식탁은 호화로운 반찬이 제공되었는데 쇠고기 반찬에 침식까지 제공되었다.
이때 식품을 제공하는 업자는 낮은 값으로 소를 사서 높은 값으로 납품을 하였기 때문에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강응룡은 유생들의 반찬거리로 귀중한 진주 소가 죽어나가는 것이 불쾌하였고, 국록(國祿)으로 그들에게 육식을 제공한다는 것이 못마땅하여 “성문대하(聖門臺下)에 도살이 웬 말이며, 유생의 호식(豪食)은 당치 않습니다.” 하고 분개한 어조로 상소문을 올렸다.
임금은 강응룡의 상소가 지당하다고 판단하여 그때부터 성균관에 금육령을 내렸다. 그 후로 성균관의 쇠고기 식사는 없어졌으며, 성균관에 금육 관습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상촌리 선바위 전설」 
옛날 어느 승려가 진주를 지나 마동 쪽을 돌면서 시주를 얻다가 한 동네 제일 부잣집의 대문 앞에서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였다. 때마침 혼자서 집을 보던 부인이 나왔는데 박절히 거절을 하였다. 스님이 시주를 간청하자, 부인은 쇠똥을 한바가지 떠서 동냥 그릇에 부어줬다. 승님이 쇠똥을 얻어 막 돌아설 무렵 남편이 돌아오며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남편은 스님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대신 쌀 한 말을 시주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나서,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물었다.
남편은 아버지의 병환이 크나 아직 묏자리를 못 잡고 있어 걱정이라고 말하였다. 승려는 고마움에 답하는 심정으로 저 건너편 산에 비구름을 머금은 곳이 용의 형상, 즉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이 번성하는 명당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무덤 아래에서 안사람이 목욕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여름에 돌아가셨다. 승려가 일러준 대로 그곳 명당에 묘를 썼다. 그런데 장례를 마친 안사람이 더위를 못 이겨 강물에 목욕을 하였다. 그 순간 안사람은 큰 바위로 변하고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 콩알 같은 비가 내렸다. 그 후부터 그 집안에 여자가 들어오면 악녀(惡女)가 되거나 미치고 말았다.
가세가 기울자 풍수를 불러 묏자리를 보였더니 묏자리는 천하명당이나 강 가운데 선바위가 죽은 용 허리에 쉬가 생긴 듯한 형국이라 설명하였다. 이후부터 선바위 곁에서 목욕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며, 무덤이 있는 용설 터에 야생 대나무(山竹)가 자라면 큰 난리가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곳에 야생 대나무가 자라났었다고 한다.
 
  「소금장수의 결혼」 
예전에 한 소금장수가 있었다. 소금 가마니를 짊어지고 장가도 가지 못한 채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다. 하루는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한 처자(각시)가 물을 긷다가 소금장수를 보고 씽긋 웃더니 물동이를 이고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소금장수는 이상하게 여기고 그 처자를 따라갔다.
처자는 자기 집에 이르러 “엄마, 엄마, 저기 공서방(孔書房)이 온다.” 하고 외쳤다. 공서방은 장가를 왔다가 간 지 얼마 안 된 처자의 남편인데, 약간 바보스런 처자가 신랑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착각한 것이었다. 처자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사위가 된 지 얼마 안 된 공서방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 소금장수는 그 집의 사위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상방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서 처자는 소금장수가 공서방이 아닌 것을 알고 놀라서 상방을 나왔다. 처자의 아버지는 딸의 실수를 알고 말 한 필과 약간의 돈을 주어 소금장수를 보냈다. 소금장수는 소금지게를 던져버리고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소금장수는 어떤 동네에서 저녁을 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느 집 담장 너머에서 “아이고, 왜 인제 오시오?”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금장수가 얼떨결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좀 늦었다고 하자, 담장 안에서 여러 개의 보따리가 날아왔다. 소금장수는 날아오는 것을 착착 받아서 말 등에 싣고, 잠시 후 나타난 여인을 말에 태우고 황급히 길을 떠났다.
동네를 한참 벗어난 뒤, 여인은 소금장수가 자기와 떠나기로 약조한 남자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여인은 부잣집 과부로,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여인은 물건은 다 가져도 좋으니 몸만은 보내달라고 사정하였다. 소금장수는 여인의 뜻대로 해 주었다.
이제 소금장수에게는 말도 있고, 여인이 남기고 간 혼수품과 돈 꾸러미도 있었다.  소금장수는 허름한 옷은 벗어던지고 여인이 신랑을 위해 만든 사모관대를 갈아입고 새신랑처럼 길을 떠났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소금장수가 한참 길을 가고 있었는데, “새서방님, 원로(遠路)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얼른 가시지요.” 하면서 몇 사람이 마중을 하였다. 소금장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길잡이들을 따라갔다. 이윽고 혼례식이 준비된 마당에 들어섰는데, 혼례가 막 시작될 무렵 바깥이 소란해졌다. 진짜 신랑이 도착했던 것이다. 신부의 아버지는 소금장수를 잡고 통사정을 했다.
“미안하이. 우리 실수로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우리가 책임을 지겠네. 내 딸은 정혼한 상대가 있으니 원래대로 혼례를 올리고, 자네는 혼기가 찬 질녀와 식을 올리세.”
이리하여 소금장수는 부잣집 조카사위가 되었고, 가져온 재물을 살림 밑천으로 잘 살았다고 한다.
 
  「송곡마을에 왜병이 들어오지 않은 연유」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으로 떠나는 장졸(將卒)들에게 “조선에 가면, 반드시 송자(松字)를 피해라.”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 장졸들은 송자(松字)가 들어간 지명을 피해 갔다. 선발 부대가 지나가며 송(松)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나 산에는 깃대를 꽂았다.
이 덕분에 임진년(1592년)에 진주성 대첩을 겪고, 계사년(1593년)에 진주성이 함락되는 와중에서도 진주시 금곡면 송곡(松谷) 마을만은 유일하게 전화(戰禍)로부터 안전하였다. 일본군이 송(松)자를 두려워하며 피했던 이유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부 말시킨 신랑」 
예전에 한 가난한 총각이 있었다. 집안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숙맥이라  서당의 다른 학동들에게 항상 따돌림과 놀림을 당했다. 가난한 총각이 이웃마을 처녀에게 늦장가를 들게 되자, 온통 서당 학동들에게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특히 숙맥인 총각이 첫날밤에 신부에게 말이나 제대로 붙일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면서, 다들 가난한 총각이 쑥스러워 말 한 마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당의 학동들은 가난한 총각에게 첫날밤에 신부에게 말을 시키면 한 살림을 장만해 주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드디어 첫날밤이 되자, 서당 학동들이 모두 신방(新房) 앞으로 모여 들었다. 학동들의 예상대로 신랑은 쑥스러워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신부 또한 신랑이 말을 걸지 않으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신방에는 침묵만이 흘렀고, 신방 밖에서는 내기를 건 학동들이 자기들이 이길 것이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신랑은 어떻게 신부에게 말을 시킬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촛대를 자기 옆에 가까이 갖다 놓고 머리에 쓴 갓이 촛불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롭게 앉아 있었다. 이렇게 되자, 답답한 신부가 “갓 타오.” 하고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방 밖에 있던 학동들은 “새신랑이 신부에게 말을 시켰으니 숙맥이 그래도 어지간하다.” 하며 약속대로 한 살림을 차려 주었다고 한다.
 
  「신선이 된 사람」 
옛날, 어떤 사람이 정월에 신수(身數)를 보는데,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가면 신선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정말로 흰 옷을 입은 사람이 휑하니 가고 있었다. 그는 죽기 살기로 흰 옷 입은 사람을 따라 봉래산까지 갔다. 봉래산 신선이 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왜 그렇게 나를 따라 오시오?”
“신선이 되고 싶소. 신수 보는 사람이 당신을 따라가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소. 신선이 되게 해 주시오.”
“저 골짜기 건너 천도복숭아를 따오면 신선이 될 수 있소.”
“저렇게 골짜기가 깊은데, 어찌 건너갑니까?”
“눈을 꼭 감고 양팔을 벌리고 조심조심 가면 건널 수 있소.”
신선이 되고픈 사람은 시키는 대로 골짜기를 건너 천도복숭아를 따 가지고 건너왔다. 그리고 소원대로 신선이 되었다.
한편, 집에서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소동이 벌어졌다.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천도복숭아를 딴 그 산 밑에 죽어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결국 그는 죽은 뒤 신선이 되었던 것이다.
 
  「씨앗 싸움」
옛날에 집은 살만하였지만 자식이 없는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아무 날 저녁에 자면 틀림없이 우리 아이가 생길 것이라 하오. 다만 그 날 저녁에는 불도 끄고, 둘 다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당신도 꼭 잊지 말고 그리 하시오.”
이렇게 아내에게 이른 남편은 아랫마을에 사는, 가난하지만 자식 복이 많은 사내를 찾아갔다. 남편은 사내에게 사례를 톡톡히 치를 테니, 아무 날 자기 옷으로 갈아입고 자신의 아내와 동침을 해달라고 했다. 자식 복이 많은 사내는 남편의 부탁을 승낙하고 약속한 날에 그의 아내와 잠자리를 한 뒤 새벽에 몰래 빠져 나왔다. 그 후,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고, 부부는 건강한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아들이 열다섯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죽고 모자(母子)만이 살게 되었다. 아들은 서당에 다니고 있었는데, 서당에서 돌아오면 항상 어머니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걱정거리가 무어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이 자신이 아니면 누가 어머니의 근심을 해결하겠느냐며 조르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속이고 외간 남자를 불러들여 아이를 낳게 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자, 그 씨앗 아비가 아들이 서당에 간 틈을 타 찾아와서는 아들을 내놓으라고 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송사를 통해 아들을 찾아가겠다고 윽박지른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이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다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씨앗 아비가 아들을 찾겠다고 송사를 내자, 씨앗 아비와 아들은 원님 앞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씨앗 아비가 원님에게 말하였다. “저 아이는 제 씨앗을 받은 아이니 제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기른 애비도 없는 마당에 제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였다. “제 이야기를 듣고 판단해 주십시오. 여기에 밭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두 사람이라 돌을 가지고 아래위로 경계를 만들어 놨습니다. 위의 밭주인이 씨앗을 자기 밭에 뿌리다가 씨앗의 일부가 아래 밭에 조금 떨어졌습니다. 이럴 경우, 가을이 되면 어느 밭주인이 거두어 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씨앗이 남의 밭에 떨어졌으면 밭주인이 베어 가야지, 씨앗 임자가 베어 가면 되겠습니까?”
이야기를 듣고 원님은 아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렇게 송사에서 이긴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내 효부만든 효자」
어느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홀로 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아들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의 아내가 시아버지를 섬기는 게 영 신통찮았다. 사랑에 거쳐하는 시아버지한테는 꽁보리밥에 간장만 드리고 자기와 남편의 상에는 쌀밥에 고기반찬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남편이 아버지께 고기를 드렸느냐고 물으면 그랬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남편은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는데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알아보니 아내의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를 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수척해져 갔다.
제대로 먹지를 못했으니 기운도 없어 사랑방에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아들은 짚신을 삼고 아내는 길쌈을 하며 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이 넌지시 묻는다.
“어느 누구는 자기 아버지를 팔아 집도 사고 논도 사고해서 부자가 됐다는구먼.”
“늙은이를 뭐 하러 산대요?”
아내의 대답에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는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 자기 아버지 삼으려고 그런대.”
그러자 아내는 남편 가까이 다가앉으며 매달린다.
“살림도 어려운데 우리도 아버지를 팔아 논도 사고 밭도 사도록 합시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아버지를 탐낼꼬. 야위고 몰골도 사나운데 힘도 없으니 사갈 사람이 있으려고......”
그러자 아내는 알았다는 둣이 다짐한다.
“알았소. 내 오늘부터 시아버지 잘 먹여 남이 탐낼 정도로 해 놓겠소.”
한마디로 시아버지를 팔기 위해 짐승 키우듯 살을 찌우겠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는 듯 자기 일에만 열중했다.
다음 날부터 아내의 시아버지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맛난 것은 물론이고 몸에 좋다는 것은 무조건 시아버지 차지였다. 곧 시아버지는 눈에 띄게 살이 오르고 힘도 솟았다. 힘이 있으니 방안에 누워있지 않고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패거나 물을 길어오며 손자도 업어 주니 며느리의 일손이 한결 수월해졌다. 집안도 활기를 되찾아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아내를 조용히 불러 말한다.
“이제 아버지도 기력을 되찾았으니 누가 살 사람이 있는지 한번 알아 볼까?”
남편의 이 말에 아내는 질겁하면서 대답한다.
“무슨 소리요? 남이 아버지가 필요하면 우리도 필요한 법. 우리 아버님이 어때서 남에게 판단 말입니까? 안되오. 절대 안되오.”
남편의 지혜로 아내는 지극한 효부가 됐다고 한다.
 
 
  「양반 짚신장수 때문에 역 면한 마을」 
옛날 한씨 성을 가진 형제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며 살았는데, 언젠가 동생 되는 사람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형은 동생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형의 아들이 진주 고을의 원님이 되었다. 하루는 원님이 순시차 이반성에 들렀는데, 수행하는 역졸들의 신이 필요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짚신 장수를 물으니, 한 영감한테 가면 신을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님은 자신도 한씨인지라, 짚신 장수와 통성명을 했다. 그런데 그가 바로 행방불명된 삼촌이었다.
조카는 삼촌에게 서울로 가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삼촌은 “나는 여기가 좋다. 그만 여기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구나.” 하며 거절하였다. 그래서 조카인 원님이 삼촌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삼촌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역촌(驛村)이어서 홀대를 당하니, 역(驛)을 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조카가 삼촌의 그 소망을 들어주어 이반성(二班城)이 역촌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양자가 지내는 제사에 온 두 아버지의 영혼」
 
옛날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살림살이는 넉넉했으나 아이를 갖지 못해 늘 고민하였다. 소실을 여럿 두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자, 남편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한 가지 방도를 생각해냈다. 남편이 부인에게 말하였다.
“차마 부인에게 시킬 일은 아니요만, 아들 하나는 있어야 대(代)를 잇지 않겠소. 저 건너 마을에 가진 것은 없지만 아들은 주렁주렁 잘 낳는 사람이 있다 하오. 내 그 사람을 하룻밤 임자 옆에 넣을 테니, 임자가 잘 때 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내가 아니더라도 놀라지 말고 잘 받아 주시오. 뒷감당은 내가 다 하리다.”
남편은 건넛마을에 사는 가난한 사내를 찾아가 자신의 부인에게 하루 저녁만 가 달라고 사정하였다. 가난한 사내는 펄쩍 뛰며 거절하였지만, 남편은 사정사정하여 결국은 가난한 사내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 날 저녁 가난한 사내는 부탁한 남자의 부인 방에 들었고, 부인은 그 남자와 동침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기가 있더니 부부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얻게 되었다.
두 내외는 아들을 정성껏 키웠는데, 그러던 중 남편이 죽었다. 아들은 훌륭하게 장성하여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고향에 내려온 아들은 돌아가신 부친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제사를 모신 후 아들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제사상을 받고 있었는데, 거지 행색을 한 어떤 사람이 파립(破笠)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아버지는 두 말 없이 자리를 그 사람에게 비켜주었고 그 사람이 아버지 대신 제사상을 받는 것이었다.
꿈이 하도 생생하고 이상하여, 아들은 어머니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동안 숨겨왔던, 아들을 얻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들은 매년 아버지 기일(忌日)이 되면 낳아주신 아버지와 길러주신 아버지의 제사상을 함께 차려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어린 신랑 (1)」
체구가 조그만 어린 신랑과 덩치가 큰 신부가 결혼을 하였다. 어린 신랑은 어지간히 신부의 속을 상하게 하였다. 하루는 시부모들이 출타하자, 신부가 어린 신랑을 지붕 위로 던졌다.
시어머니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어린 아들이 지붕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애야, 왜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니?” 어머니가 물었다. 순간 며느리는 가슴이 출렁 내려앉았다. 그 때 어린 신랑은, “어머니, 호박을 딸까요, 박을 딸까요?”라고 말하며 아내를 감싸주었다. 지붕에서 내려온 어린 신랑은 도망가서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립문 밖에 의젓한 선비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자세히 보니 몇 년 전에 사라졌던 어린 신랑이었다. 그날 저녁 신랑은 신부에게 회초리를 들고 들어오게 하였다. 신랑은 신부의 종아리를 걷게 하고는 회초리로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매질을 하였다. 신부는 다시는 어린 신랑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고, 어린 신랑을 공경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신랑 (2)」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날씨가 추워, 나이 어린 신랑이 부엌을 자주 들락거렸다. 이를 성가시게 여긴 신부가 부지깽이로 신랑의 이마를 툭 때렸는데 그만 이마에 상처가 나고 말았다. 어린 신랑은 마음이 상하여 방에 들어가 이불을 둘러쓰고 누웠다.
얼마 후 출타했던 시어머니가 돌아오자, 며느리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 방에 들어온 시어머니가 이불을 들쳐보니, 아들의 이마가 터져 있었다.
“얘야, 이마가 왜 터졌느냐?”
어머니가 묻자 아들은, “염소를 먹이러 나갔다가 염소 뒷발에 채였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며느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 후로는 어린 남편을 잘 섬기며 살았다고 한다.
 
  「엄마다리」 
대곡면(大谷面) 단목(丹牧)에는 ‘엄마다리’란 교량이 있었다.
새로운 다리가 생기면서 길고 납작한 돌다리는 개울 속의 모래에 묻히고 말았지만 그 이전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였다.
옛날 단목의 옆 동네인 미천면(美川面) 반지마을에 아들 형제를 둔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 일찍 성혼하여 함께 사는데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밤이 되면 살짝 나갔다가 새벽이 되면 돌아왔다.
아들 며느리 몰래 하는 행동이라 한동안 눈치를 못 챘으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아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나갈 때는 모르겠는데 돌아올 때 보면 치마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매번 그런 사실을 안 아들은 하도 이상하여 한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밤이 이슥하여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가자 아들도 몰래 어머니의 뒤를 밟았다.
개울에 이르자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버선발로 걸어 개울을 건넌다. 아들도 먼발치에서 이를 보고 있다가 개울을 건넜다. 차가운 물이 온 몸을 얼어붙게 한다. ‘이런 물을 건너다니’라고 중얼거리며 개울을 건너고 들길을 가로질러 계속 어머니의 뒤를 밟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마을의 홀아비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홀아비가 기다렸다는 듯 마당으로 내려와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방까지 안내하는 것을 보고 아들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후처(後妻)를 들여도 여자는 개가(改嫁)를 금지했던 시대에 어머니에 대한 불륜을 탓하는 게 아니다. 무심한 자식들이 어머니의 마을을 헤아리지 못한 죄, 추운 개울물을 그냥 건너는 불편을 해결해 주지 못한 게 죄 서러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세상 눈이 있으니 공개적으로 관계를 인정해 줄 형편도 아니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은 형제들과 의논해 아무도 모르게 개울에 돌다리를 놓았는데 이는 어머니가 편하게 건너 다니라는 뜻이다.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져 이 다리를 ‘엄마다리’라고 했다.
 
  「여종엽과 기생 향도꾼」 
하동 읍내에 여종엽이라는 양반이 있었다. 그는 큰 부자로 선심을 베풀어 인심도 얻었으며, 특히 주색(酒色)을 좋아해서 수많은 기생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관계를 한 기생들에게도 씀씀이가 후했다.
그가 죽자, 기생들이 각자 상복을 직접 만들어 입고, 고깔을 쓰고 왔다. 기생들은, “왜 우리 신랑을 남의 손으로 메고 갈끼고. 우리가 메고 가자.” 하면서 상여를 스스럼없이 멨다.
그 중 모갑이라는 기생은 요령(搖鈴)을 흔들면서, “첩도 첩도 천한 첩은 여종엽의 첩이로다.” 하고 선소리를 매기면서 산소로 향했다. 길가의 구경꾼들도 흥미롭게 상여 행렬을 지켜보았다.
무사히 안장(安葬)을 마치고 기생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맏상주가 기생들에게 논을 몇 마지기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영리한 서당꾼」 
한 50여 호 사는 시골 마을에 사십 세쯤 되는 사람이 서당 훈장으로 있었다. 그는 열 살에서 열대여섯 살 사이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중에 열 살쯤 먹은 아이가 항상 훈장에게 회초리를 맞곤 하였다. 어린 학동이 훈장의 신경을 건드리는 언행을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어, 선생님은 왜 혼자 사노?”
“아, 그 놈의 자식이...”
“선생님, 저어 한 사람 중매해 줄까요?
“아, 그 놈의 자식이...”
이렇듯이 어린 학동은 늘 혼자 사는 훈장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느 날, 어린 학동은 동네 사위 보는 집에 훈장과 함께 가게 되었다. 잔칫집에서 단자(團餈)를 실컷 얻어먹은 어린 학동은 훈장을 동네의 부잣집 과수댁(寡守宅)으로 모시고 갔다. 잔칫집이 마침 이 과수댁과 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과수댁의 머슴들과 부엌에서 일 보는 아이들이 모두 잔칫집에 가 있었고, 집에는 과수댁 혼자 군불을 지피느라 부엌에 있었다. 어린 학동이 부엌 앞에 나타나 말했다.
“아무개 과수댁.”
“와?”
“우리 선생님 여기 안 왔소?”
“아, 그놈의 자식이, 너거 선생님이 여기 뭐 하로...”
“우리 선생님이 여기로 오는 걸 내가 분명히 봤는데.”
과수댁은 학동에게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를 빽 지르고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서당 훈장이 방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과수댁은 어린 학동을 불렀다.
“얘야, 오늘 잔치 집에서 떡을 많이 갖다 놨다. 떡 줄 테니 절대 소문내지 마라.”
“예이, 그리 합죠.”
어린 학동은 떡을 한 대접 꿀에 발라 먹고는 한 대접을 더 얻어 갔다. 그러고는 떡을 우물우물 먹으면서 마을 우물가로 갔다. 마을 우물은 과수댁 집 앞에 있었는데, 마침 우물가에는 빨래하는 아낙, 보리쌀 씻는 아낙, 나물 씻는 아낙들이 모여 있었다.
“너, 어데 떡이 나서 먹고 있네?”
“오늘 일 치는 집에 가니까 떡을 많이 주데요.”
“남은 안 주는데 너는 와 이리 많이 주노?”
“오늘 두 군데나 일 친다 아입니꺼.”
“야 이놈아, 사위 보는 집 말고 어데서 일 친단 말고?”
“바로 이 앞집도 큰 일 안칩니까? 모르셨습니까?”
이렇게 하여 부잣집 과수댁과 훈장 사이의 일이 온 동네에 퍼졌고, 두 사람은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
훈장은 첫 아이로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린 학동은 스물다섯이 되도록 장가도 안 가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서당에 나와 글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청년이 된 학동이 훈장에게 물었다.
“선생님, 와 딸을 안 치우십니까?”
“야 이놈아, 딸이 아직 어리다.”
“아이가 열다섯이면 가관(加冠)인데, 과년(過年)인데 치워야지요.”
“아 이놈아, 아이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 한께.”
“시집보낼 데가 없으면 그만 나를 사위 삼으이소.”
이런 이야기 끝에, 훈장은 집으로 돌아가 부인과 상의를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그 놈 땜에 부부가 되었는데, 저 놈이 저를 사위보라고 하니 어찌해야 되것노? 저 말을 안 들어주면 무슨 변통을 낼지도 모르니, 딸을 그 놈한테 줍시다.”
이렇게 해서 학동은 부잣집 사위가 되었다. 그 뒤, 학동은 장인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였다. 학동은 장인이 장가든 이야기와 자기가 장가든 이야기를 과제(科題)로 제출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장인도 능참봉이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영리한 정승 딸」 
중국에서 사신이 왔다. 중국 사신은 조선 조정을 시험할 요량으로 무명 한 필을 주면서, 베 한 필로 ‘바지 적삼 한 벌, 두루마기 한 벌, 이부자리 한 벌’을 지어 보내라고 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무명 한 필로는 겨우 두루마기 한 벌 정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 정승의 딸이 나서서 자신이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조정에서는 그 정승의 딸에게 일을 맡겼다. 정승의 딸은 무명 한 필로 두루마기 딱 한 벌만 지었다. 그리고 속옷을 하나도 입지 않은 채 두루마기만 입고 중국 사신 앞에 나타났다.
“바지 적삼은 어디 있느냐?”
“두루마기만 입고, 바지 적삼을 입지 않아도 속살이 보이지 않으니, 이 두루마기가 바지 적삼 구실을 합니다.”
“그러면 요 이불은 어디 있느냐?”
그러자 정승의 딸이 두루마기를 입은 채 바닥에 누워 대답했다.
“등을 받친 것은 요가 되고, 가슴을 가린 것이 이불입니다.”
“조선에도 이런 인재가 있었구나.”
그제야 중국의 사신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욕심이 많아 못 캔 동삼」 
한 가난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비록 가난했지만 손님 대접을 잘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할머니는 사시(四時)로 방아품을 팔아, 흰 싸래기(싸라기의 방언. 쌀 부스러기)는 손님에게  대접하고, 딩기(등겨의 방언)는 자기가 먹었다.
그 소문을 듣고, 하루는  한 영험한 스님이  할머니를 찾아갔다.  스님은 할머니의 정성이 진실하다면 복을 줄 심산이었다. 과연 소문대로 할머니는 차좁쌀로  밥을 하여 수북이  그릇에  담아,  스님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스님은 할머니에게 후한 대접을 받고 떠나면서 말하였다.
“내일 아무  시  아무 곳에 가면 무 뿌리 같은  게 있을 테니, 큰 것을 뽑지 말고, 꼭 작은 것을 빼십시오.”
다음 날,  스님이 말한 곳에 가니,  과연  크기가 다른  무 뿌리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할머니는 스님의 말대로 작은 뿌리를 뽑으려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그래도 큰 것이 욕심이 나서 큰 무 뿌리를 뽑았다.
순간 큰 뿌리는 두 동강이 나면서 부러졌고, 그 자리에는 좁쌀 밥이 수북이 쌓였다. 스님이 마음 착한 할머니에게 동삼을 선물하려 하였으나, 한순간의 욕심 때문에  할머니는 복을 받지 못하게 되고 만 것이다.
 
  「용다리에 얽힌 이야기」 
옛날에 이씨 성을 가진 군수가 있었는데, 딸만 셋이었다.그 가운데 둘째 딸은 시집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고 친정에 돌아와 수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군수 집에는 돌쇠라는 우직한 하인이 있었다. 그는 군수의 둘째딸이 돌아온 뒤로부터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집안의 잡일도 말없이 거들어 주곤 하였다. 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 돌쇠의 눈에 이상한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군수의 둘째 딸을 만날 때마다 평소와 다른 어색한 태도를 보이며 어떤 때는 한숨을 쉬다가 어떤 때는 먼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젊어서 과부가 되어 긴 밤을 홀로 지새던 군수의 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써 주며 친절하게 대해주는 돌쇠가 좋게 느껴졌다. 갈수록 좋은 감정이 쌓여서 마침내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가 엄격한 시대에 두 사람의 사랑을 함부로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 보지만 속내를 전하지도 못하고,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이로 지냈다. 그렇게 속을 태우던 군수의 딸은 시름시름 상사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약을 써도 소용이 없어 그만 죽고 말았다.
군수의 딸이 죽은 것을 보고 미칠 것 같았던 돌쇠가 진주성에서 선학재를 넘어 장사를 지내러 가다가 길목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개울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귀신같다가 죽은 아씨의 얼굴같이 보이기도 하여 자신도 모르게 “아씨-” 하고 소리쳐 부르고 말았다. 사랑이 너무 간절하였던 돌쇠는 그 길로  미쳐버렸다.
군수도 딸을 잃자 진주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 충청도로 떠나고자 하였다. 진주를 떠나던 날 용다리를 건너면서 뒤에 따라와야 할 돌쇠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찾아보니 돌쇠는 용다리 옆 고목나무에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
그때부터 조용하던 용다리 아래에서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울기 시작하였다. 듣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마치 돌쇠가 울부짖는 소리로 들렸다.
그 뒤부터 용다리 아래는 진주시에서 개구리가 제일 많이 모여 우는 곳으로, 짝을 이룬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을 그쳤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왕래하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용두산 이야기」 
아주 옛날 문산에 한 신선이 살았다. 신선은 문산 사람들을 어떻게 잘 살게 할까 궁리하다가 용을 타고 용궁의 용을 만나러 나섰다. 신선이 용의 머리에 올라앉아 막 하늘을 오르려 하는데, 아침 일찍 빨래하러 나온 한 아낙네가 이를 보고는 “어떤 영감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용은 하늘을 오르다 말고 머리를 땅에 처박고 말았는데, 순식간에 용은 산이 되어버렸고, 아낙네가 빨래하던 자리에 용이 떨어져 산의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그러자 신선은 “용머리가 십리만 더 뻗었더라도 문산은 참으로 큰 고을이 되었을 것인데…….” 라고 탄식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지금도 사람들은 용두산이 십리 밖으로 더 뻗어야 큰 고을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용디미와 빈대」 
옛날에 깊은 연못에 있던 용(龍)이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번쩍이며 날씨가 사납던  어느 날에 승천(昇天)을 하기 위하여 힘차게 도약하여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용이 한참 하늘로 오를 때 마을에서 논에 물길을 보러 나가던 어떤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때 들에서 우의를 쓰고 물길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여자의 외침이 끝나자 날아오르던 용이 산의 정상(頂上)에 떨어졌다. 그러자 산 정상이 둘로 나뉘어졌는데, 이곳을 사람들은 그 때부터 ‘용디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이 용디미에 큰 절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용디미에 위치한  사찰(寺刹) 자리는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구경하느라고 풍수를 배우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었다.
사방으로 절터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자, 절터 주변으로 묘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절터에다가 묘를 쓰고 싶은 사람들은 스님들 몰래 절에다가 빈대를 많이 잡아넣었다.
그 후 절에는 빈대가 들끓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스님들은 하나 둘씩  떠났고, 마침내 절은 망하여 폐허가 되어버렸다. 절이 망하자 그곳을 노리던 사람들이 그 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 절에 있었던 일부 스님은 집현산에 위치한 응석사(凝石寺)로 갔다고도 한다.
 
  「우곡 선생」 
우곡(隅谷) 정온(鄭溫)은 고려 조정에서 사헌대부를 지낸 인물로, 그와 관련하여 청맹설화(靑盲說話)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곡 정온이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진주시 사봉면에 내려와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이성계가 우곡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려고 사신을 그 곳까지 보내자, 그는 사신에게 청맹(靑盲, 당달봉사)이라 벼슬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런데 마침 닭 한 마리가 마당으로 나오더니 햇볕에 말려 놓은 곡식을 쪼아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우곡이 무심결에  “훠이, 훠이!” 하고 닭을 내쫓았다.
닭을 쫓는 우곡의 모습을 본 사신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사신은 솔잎을 따서 우곡의 눈앞에 갖다 대며 찌르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우곡은 눈동자를 찔리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결국 이성계의 사신은 우곡이 청맹이 틀림없다고 믿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포은 정몽주의 죽음과 야은 길재의 은둔, 그리고 우곡 정온의 청맹을 은나라의 삼인(三仁)에 비유하고 있다.
 
  「우물의 영험」 
사봉면 어느 마을에 승려 한 사람이 지나다가 길가의 집을 찾아들어 물 한 그릇을 청하였다. 집 주인이 잠깐 기다리라 하고 나갔는데,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물 사발을 들고 돌아왔다. 늦게 온 사연을 주인에게 물으니, 이 마을에 우물이 없어 이웃 마을에 가서 얻어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이에 그 승려는 자기가 우물터를 잡아주겠다고 하고는 지팡이로 땅을 쳐가며 이리저리 다니다가 마을 가운데 있는 바위 앞에 서더니 그 바위를 파라고 한다.
집주인이 못미더워하자 승려는 걱정 말고 파라고 한 후 다시 바위 옆의 짐승처럼 생긴 큰 돌을 가리키고는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 짐승의 눈에서 피가 나면 이 마을을 떠나거나 산 위로 피신해야 하오.” 한 후 떠나가 버렸다. 집주인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바위를 파자고 하니,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이라 한마디씩 했지만 그래도 워낙 물이 귀한 터라 바위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기를 며칠이 지나자 과연 맑은 물이 솟구쳐 온 마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잔치를 벌였다.
이후 집주인은 가족들에게 우물물을 길어 올 때 잊지 말고 짐승같이 생긴 돌의 눈에서 피가 나오는지 잘 살피라고 했는데, 이 말이 온 동네에 퍼지게 되었다. 이런 사연을 안 짓궂은 마을 사람 하나가 무슨 일이 일어나나 보려고 아무도 몰래 닭의 피를 바위에 발라 놓았다.
집주인이 우물가에 갔다가 돌의 눈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는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승려가 한 말을 일러주며 산으로 피난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도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짓이라며 오히려 집주인을 놀려댔다. 그러나 집주인과 그 가족이 산에 오르자 순간 하늘이 새카만 구름에 덮이더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온 마을이 물에 씻겨가고 말았다.
 
  「운문마을 서총」 
진주시 금곡면 운문마을은 진주하씨의 집성촌이다. 마을이 풍수적으로 대명지(大名地)인데, 십이 대에 걸쳐 만석꾼으로 살면서 누대에 걸쳐 학자, 관리 등을 배출하여 명망이 자자했다. 그런데 이러한 만석꾼 하씨의 집 뒤에 서총(徐塚 : 서씨 무덤)이 있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소금 장사를 하며 피란을 갔다. 그런데 운문마을 근처에서 왜군을 만나게 되었다. 서씨는 급히 근처에 있는 썩은 고목나무 숲에 몸을 숨겨 위기를 넘겼다.
그 뒤, 서씨는 운문마을로 들어오게 되었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무덤을 만석꾼 집 뒤 대밭에 썼다. 무덤을 쓴 후 서씨 집안은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큰 전란 직후라 하씨 집안이 전란을 피해 운문마을을 떠나 있었는데, 그 틈에 명당을 알아본 서씨 집에서 밀장(密葬)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서씨가 왜적을 피해 숨었던 썩은 고목나무 숲에도 흥미 있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이 숲은 당시 세도가였던 조판서 집안의 선영(先塋)이었다. 세도가 팔팔한 시절에 한 스님이 조판서의 집에 오더니 말했다.
“나무를 세워야지, 나무를 안 세우면 집안이 망한다.”
그러나 이 얘기를 들은 조판서 사람들은 스님을 혼쭐내어 쫓아내 버렸다. 그러자 스님은 이번에는 점쟁이로 변장하여 조판서 집에 들러 산소를 봐주겠다고 하였다.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시절이어서 조판서 집에서는 점쟁이로 변신한 스님을 극진히 대접하여 선영으로 안내하였다.
조판서의 묘는 지네혈이었다. 그런데 안산(案山: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은 삵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산은 닭의 모양으로 지네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삵 때문에 닭이 지네를 먹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삵 모양의 안산과 닭 모양의 산 사이에 숲을 만들어 닭이 지네를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집안이 망하지 않는다고 조언을 하였다.
이러한 조언에 따라 조판서 집안에서는 숲을 조성하였고, 집안은 계속 번성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무렵 숲의 나무들이 고목이 되어 썩어 버렸는데, 이 탓인지 조판서 집은 망하였고, 왜군을 피해 그 고목 속에 숨어들었던 서씨는 운문마을에 들어가 명당을 얻어 발복(發福)했다는 것이다.
 
  「운수당 돌비」 
옛날 금곡면 운문마을에 사는 하씨(河氏) 집안에 초상이 났다. 사위 두 사람이 서로 비석을 세우려고 다툼을 벌였다. 한 사위는 재력이 있고, 한 사위는 가난하였다.  재력이 있는 사위는 놋쇠로 비를 만들어 세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려 하였고, 가난한 사위는 놋쇠로 만든 비보다는 돌비가 더 오래 보존될 것이라며 돌비를 만들어 세우려고 했다.
두 사위가 계속 다툼을 벌이자, 문중에서는 누구든지 먼저 만들어 오는 쪽의 것을 세우기로 하였다. 결국 돌비가 먼저 도착하여 장인 묘 앞에 돌비를 세우게 되었다. 놋쇠로 비를 만든 사위는 비를 옮겨오던 중간에 그 이야기를 듣고는 비를 소(沼)에 버렸다.
운문마을은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후손들은 그 때 돌비를 세운 것을 더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돌비를 세우지 않고 놋쇠로 만든 비를 세웠더라면 중간에 없어졌을 텐데, 돌비가 세워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월아산과 금호못」 
옛날 하늘에서 착한 청룡과 나쁜 황룡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 광경을 본 한 장사가 용을 향해 싸우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청룡이 장사를 내려다보는 순간 황룡이 그 틈을 노려 청룡의 목에 비수를 찔렀다. 칼에 찔린 청룡이 땅에 떨어지면서 꼬리를 치니, 용의 꼬리를 맞은 자리가 움 푹 패여 큰 못이 되었는데 그 못이 바로 금호못이다. 금호못은 청룡에 의해 생긴 못이기 때문에 물이 항상 푸르다고 한다.
진주에 가뭄이 들면 달엄산에 무제 지내러 간다고 한다. 무제는 기우제다. 월아산 꼭대기에서 금호못 청룡에게 기우제를 지내고 나면 산을 내려올 때 소나기가 퍼붓거나 늦어도 초저녁 무렵이면 단비가 내린다고 한다.
 
  「월아산의 망부석」 
옛날 월아산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주지 스님이 아랫마을의 어떤 사람과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꽤나 재력가여서,  주지 스님은 자주 그 친구의 사랑에 들러 쉬어 가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주지 스님이 사랑에 들렀는데, 주인은 출타 중이고 아무도 없었다. 스님은 사랑방에서 책도 뒤적여보고 이것저것 살펴보며 친구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있어 만져보니, 말랑말랑한 것이 누르니 ‘뻬엑, 뻬엑’ 하고 소리가 났다. 밤이 깊어도 친구는 오지 않고,  절로 올라가기도 너무 늦어버려서 스님은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갈 요량으로 불을 끄고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의 부인이 옷을 벗고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벗은 여인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니, 스님은 숨이 막혀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님과 친구의 부인은 자연스럽게 음양(陰陽)을 통하고 말았다. 주지 스님이 만졌던 친구의 이상한 물건은 부부 간에 동침을 하자는 신호였던 것이다.
친구의 부인은 부부 간에 약속한 소리가 들리자 아무 의심 없이 남편의 침소로 온 것인데, 어쩐지 남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얼굴과 머리 등을 더듬어 보고는  머리가 까까머리라 깜짝 놀라서 엉겁결에 스님의 오른쪽 귀를 입으로 물었다. 스님은 부끄럽고 죄스럽기도 해서 귀를 물린 채, 그 길로 도망을 쳐 행적을 감추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고, 부인은 스님의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다. 아들은  훌륭히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과거에도 급제하여, 진주 읍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러나  집안에 큰 경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의  얼굴은 늘 수심에 차 있었다. 아들의 친아버지인 스님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스님의  행방을 수소문해 봤지만  스님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항상 수심에 차 있는지 걱정이었다. 어머니께서 대답을 해주시지 않으니, 궁금증만 날이 갈수록 커갈 뿐이었다.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앞산 등성이를 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들이 아랫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들이냐?”
“예, 돗골에 용한 점쟁이가 있어 점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돗골의 점쟁이를 직접 찾았다. 그리고  점쟁이를 통해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결국 아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아들은 그 길로 사직을 하고 생부(生父)를 찾아 나섰다.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당부하였다.
“네 아버지는  스님이었으니, 분명  절에 있을 것이다. 내가 오른쪽 귀를 물었으니, 오른쪽 귀를 물어 떼인 사람이 있으면, 틀림없이 우리 일을 알 것이다.” 라며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고, 그를 기다리던 며느리와 어머니는 돌이 되었다.
 
  「의적 강목발이」 
의적 강목발은 진양에 있어서는 홍길동(洪吉童)에 버금가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강목발은 지금의 진양군 대곡면 대방산 줄기 가정(佳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한 도승(道僧)이 찾아와 사립 밖에서 묻기를 “아이를 낳았느냐”고 물어 “아직 안 낳았다”고 하니 다시 와서 물었다.
도승은 세 번째로 다시 와서 또 물어 아직도 안 낳았다고 하자 이번에는 혀를 끌끌 차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 강목발은 축(丑)시에 났다. 자(子)시에 태어날 사람이 축시에 났다는 것이다.
도승이 찾아온 것은 비범한 인물이 태어날 줄 알고 대인(大人)이 날 시를 물어보고, 다시 대적(大敵)이 날 시에 물어 왔는데, 그는 대적이 날 시에 태어났다고 한다.
또 그가 난 집터에서 보면 축(丑) 방향에 바위덤이 보이는데 이 또한 길조(吉兆)는 아니었다고 하며, 조금만 일찍 태어났어도 거룩하게 되었을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부적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살던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의 도독실이라는 마을에는 삼백석 지기의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와 잠을 자던 묵발이 몰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챈 아버지가 목발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도독실로 가더니만 부잣집 대문을 손가락으로 열고, 뒷 방으로 들어가 돈궤를 열어 제끼는데 역시 손가락으로 돈궤를 열었다.
크게 놀란 아버지는 아들의 목덜미를 잡아 집으로 끌고 왔다.
그런데 부잣집 주인이 잠에서 깨어보니 돈궤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그 집의 ‘업’이 운 것이다. 옛날에는 집안을 지켜주는 ‘업’이 있다고 믿었으며, ‘업’은 큰 구렁이가 되기도 하고 두꺼비가 되기도 하였다.
놀란 주인은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장을 하고 돈궤앞에서 비손을 했으나 ‘업’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업’은 바깥 바람을 쐬어야 하겠다면서 돈궤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주인이 어쩔 수 없이 문을 제껴주니 ‘업’은 가정숲으로 갔는데 그만 숲에서 ‘업’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사 보니 강목발의 집으로 들어 가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는 낮동안은 평범한 사람과 같이 성장했으나 밤이면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 즉 부잣집에서 도둑을 맞았다 하면 없는 사람 집에 귀물이 쌓이는 것이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데다 힘 또한 장사였고, 밤이면 높은 담장은 말할것도 없고 삼간집을 펄펄 뛰어넘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녔었다.
어려서 삼촌(아버지가 없었다고도 함)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머리는 좋았으나 글공부를 게을리 하면서도 남의 눈을 속이는 일에는 탄복을 금치 못했다.
어느 날은 그의 숙부가 방바닥에 엽전을 던져놓고 내 모르게 가져보라며 시험해 보았다.
목발은 밖을 잠깐 나왔다가 들어오더니 “숙부님 가져 갑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없어졌다.
목발은 밖에서 발바닥에 보리밥알을 이기어 붙였던 것이다.
주윗 사람들로부터 목발이 남의 눈을 속인다 하기에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하고 의심했으나 그게 사실이었다.
숙부는 방바닥에 놓인 목침을 들고 그의 다리팍을 내리쳤다. 이때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다녔다고 하나 신빙성은 적다.
목발은 성장하여 진주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길목인 단목(丹牧)에 사는 하백립의 집을 종종 털었다 한다. 하백립은 그 당시 꽤 부자로 살았다. 목발이 덜미가 잡힐 일도 만무하거니와 하백립은 목발의 소행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두 번도 아니어서 하인들을 시켜 목발을 붙들어 오도록 했다. 목발은 순순히 잡혀와 심한 꾸중을 들은 뒤부터는 손을 씻겠다는 자백을 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하인들이 참지 못하고 당장 죽여버리겠다며 맷돌을 치켜들고는 목발에게 내리쳤다.
맷돌을 내리치는 순간, 목발은 어느 결에 건너편 밤나무에 올라서며 하는 말이 “강목발이 제 길로 갑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목발은 말티고개를 넘어 진주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생집을 드나든 그는 돈도 잘 썼으며 술도 말술인데다 노래와 춤도 일품이어서 당대로서는 큰 인기였다.
그런 그가 하루는 유흥비가 모자라 한 부잣집을 털어 말티고개를 넘어 가는데 어느 산모(産母)가 등성이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의협심이 강한 그는 그 날 밤에 털었던 돈과 귀물을 죄다 주어버렸다.
그런데 도둑맞은 부잣집의 소문이 파다할 즈음에, 무일푼의 여인이 돈을 잘 쓰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아 뒤를 캐보니 강목발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관아에서는 목발을 잡아다가 자백까지 받았으나 어려운 임산부를 도운 정상을 생가하며 오른쪽 다리를 끊고는 풀어 주었다.
이때부터 외발로 생활하는 목발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말티고개만 넘어서면 목발은 필요 없는 물건이 되버렸다. 그는 땅을 주름잡는 축지법(縮地法)을 익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진주 인근의 살만하다는 부잣집은 도둑을 맞았고, 대신 가난한 집에는 쌀이며 돈이 쌓였다.
이때부터 의적의 신화는 삼남일대에 번져 나갔다. 문제는 관아의 포졸들이 큰 골치거리였다. 관아에서 피해자들을 불러 조사해 볼라치면, 진술은 한결같이 ‘외다리’의 소행으로 일치되었다.
관아에서도 그 의적은 강목발이라는 심증이 갔으나 목발에 의지않는 ‘외다리’라는데 의문이 생겨 확증을 잡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저러나 강목발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관아에 붙들리는 신세가 되어 옥살이를 해야 했다.
붙들리기는 했지만 목발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태연히 부인했다.
이에 관아의 꾀많은 형리(刑吏)가 있어 목발에게 넌지시 말하기를, “번번이 붙잡고 붙들려 옥살이를 시키는 우리도 귀찮다. 그러니 진양성을 한 식경(10분 정도)에 세 바퀴만 돌면 모든 허물을 벗겨 주겠다”고 했다. 때에 목발은 일생의 실수인 줄 모르고 귀가 솔깃하여 그러마고 했다. 그리고 한 식경 안에 외다리로 진양성을 세 바퀴를 돌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형리의 함정에 빠졌고, 꼼짝없이 모든 허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삼남일대에 번진 의적은 강목발로 판명되었으며, 그는 구 법원 앞 객사(客舍) 뜰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목발이 사형으로 집행되던 날 그 일대는 의적의 최후를 보려고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 중에는 목발의 은혜를 입은 가난한 자들이 그의 명복을 빌고자 모인 사람도 많았다.
때가 되어 형리(刑吏)의 칼이 강목발의 목을 벴는데, 괴이하게도 목발의 목에서는 피만 흐를 뿐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놀란 것은 형리들이었고, 질겁을 한 형 집행관이 일어서 목발을 향해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목발은 대답하기를 “탐관오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다 못 도우고는 참아 죽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행 집행관은 “관연! 천하에 다시 보기 드문 의적이로다.”라고 하니 불사신(不死身)처럼 버티던 의적 강목발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생전에 그는 말티고개를 넘어 다니며 사귄 의누이가 있었다. 의누이는 주막집을 하고 있었는데, 목발이 사형 당하던 날 밤에도 그 곳에 들러 술 한 단지를 마시고 가면서 하는 말이 “내가 진주목사를 죽이고 갈 것이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튿날 목발의 의누이가 들으니, 과연 목발의 말대로 목사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강목발의 이야기는 전하는 이마다 서로 다를만큼 그에 관한 전설은 진양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이반성의 선돌」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 들 가운데에는 암수 짝을 지은 큰 선돌이 서 있다. 경지 정리를 하면서도 이 돌은 그대로 두었는데 돌이 넘어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밑둥치가 뚱뚱하고 끝이 가느다란 것이 암돌이고, 아래쪽에 있는 것이 수돌이다. 수돌은 흔드는 사람의 숫자에 관계없이 흔들리는 간격이 똑같다고 한다. 이 선돌이 대천리 들판 가운데 서 있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옛날, 진주의 이반성면 가산마을에 돌 한 쌍이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침밥을 짓고 있던 어떤 여자아이가 나무를 가지러 부엌 밖으로 나오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신기하게 여긴 여자아이가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툭툭 치면서, “저기 돌이 걸어간다. 저기 돌이 걸어간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걸어가던 돌이 딱 멈추어 섰고, 그 들판에서 선돌이 되었다고 한다.
 
  「이상한 안경」 
옛날에 부모 형제도 없이 아주 가난하게 사는 청년이 있었다. 머슴살이를 하며 열심히 산 덕분에 장가갈 밑천을 장만하였다. 그러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아, 살림은 기울고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사내는 도저히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를 두고 집을 나갔다.
사내가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어딘가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언덕 위에서 복을 주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사내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을 받으러 갔다. 복을 주는 사람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사내가 대답했다.
“제가 결혼 전에는 남의 집에 살면서 재산을 조금 모았는데, 결혼 후에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버리고 도망을 왔는데,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복을 주는 사람이 안경 하나를 주면서 말하였다.
“내려가다가 어느 곳에 가면 빨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게다. 그 빨래터에 가서 이 안경을 쓰고 너구리 모녀를 찾아라.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너구리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라. 그러면 잘 살게 될 게다.”
사내는 안경을 들고 복을 주는 사람이 말한 빨래터로 향했다. 과연 많은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사내가 안경을 쓰니 모든 아낙들이 동물로 보였고, 그 가운데 너구리 모녀도 있었다.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린 사내는 너구리 모녀를 따라가 하루 저녁만 재워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너구리 모녀는 집에 여자만 있어서 외간 남자를 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도 사내는 축담 밑이라도 자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너구리 모녀는 어쩔 수 없이 축담 밑에서 하룻밤 지내도록 허락했다.
다음날 아침, 아침밥을 얻어먹은 사내는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산에서 나무를 해왔다. 하루, 이틀 계속 나무를 하더니 온 집안에 나무 짐을 가득 쌓아놓고는 농사일도 도맡아 하였다. 결국 사내는 그 집에 살게 되었고, 그 해 여름 장마가 져서 나무 값이 크게 올라 큰 돈을 벌었다. 이렇게 신임을 얻게 된 사내는 너구리 모친에게 딸을 달라고 간청했다. 사내를 지켜보아 온 너구리 모친은 사내와 딸을 결혼시켰다. 이후 사내는 하는 일마다 잘 되어 금방 부자가 되었다. 사내는 너구리 아내에게 일 년에 치마저고리 한 벌씩을 만들게 하였다.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사내는 치마저고리 열 벌을 챙겨서 옛날 자신이 버리고 온 아내를 찾아갔다. 아내가 굶어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아내는 사내가 떠난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아주 잘 살고 있었다. 사내는 옛 아내가 사는 집 사립문에 서서 옛날에 얻은 안경을 쓰고 바라보았다. 집 안에서는 에미 애비 돼지와 새끼 돼지 세 마리가 오글오글 밥을 먹고 있었다. 돼지와 돼지끼리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내는 옛 아내를 만나 도망간 일을 사과하고 너구리 아내가 지은 옷 열 벌을 내 놓았다. 옛 아내도 살만 해지자 도망간 남편을 걱정하여 해마다 옷을 만든 것이 열 벌이었다. 서로 옷 열 벌을 주고받으며, 가난에 쪼들렸던 부부는 웃으며 헤어졌다고 한다.
 
  「일야이부 이야기」 
옛날에 경상남도 밀양에 아들을 둔 김진사가 있었는데, 의령에 사는 최진사의 딸과 혼인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역시 아들을 둔 상주 고을의 원님이 강제로 최진사의 딸을 보더니 사돈을 맺자고 하였다. 이튿날 신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일행을 놔두고 원님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원님 아들과 상방에서 자지도 않고 묵었다. 그것을 본 신랑 집에서는 어이없어 하고, 밀양 신랑은 그냥 혼자서 집으로 가버렸다. 좀 있으니 신부가 찾아와 자기는 원님 아들에게 인사한 것밖에 없으니 제발 자기를 데리고 가달라고 조르며, 데리고 가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하였다. 밀양 신랑은 할 수 없이 신부를 데리고 와서 1년 동안 살림살이를 맡기다가 1년이 지난 뒤 친정으로 쫓아버렸다.
쫓겨난 신부는 기도 못 펴고 초가삼간에 살면서 상주 원님의 압박을 받았다. 그러던 중 찾아온 거지 차림의 밀양 신랑을 보고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튿날 상주 고을에 암행어사 출두를 한 밀양 신랑은 원님에 대한 분을 풀고 행복하게 살았다.
 
  「잘 굴러서 벼슬한 사람」 
한 가난한 부부가 원님의 부임 행차를 보고 부러워했다. 남편은 ‘인생만사 복불복(福不福)’으로 여겼다.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서울과 같은 큰 곳에서 어디 한 번 굴러 보구려(부대끼면서 살아보구려).”라고 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 상경했다. 남편은 매일같이 서울 저잣거리에서 굴렀다.
서울 사람들은 그를 두고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영문도 없이 맨땅에 구르는 시골 사람이 있다고 하여 그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갔다. 당시 임금은 숙종(肅宗)이었는데, 숙종은 사복 차림으로 민정 시찰을 자주 했다. 숙종이 땅 위에 몸을 구르는 사람을 만나 이렇게 물었다. “이 사람아, 자네 무슨 연고로 이런 행동을 하는가?” 하니, “우리 마누라가 서울 큰 곳에서 잘 구르기만 해도 출세한다고 하여 이렇게 굴러보는 것입니다.” 하였다.
숙종이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사람됨이 포부와 집념이 있다고 판단해 벼슬을 주기로 했다. 아내의 뜻에 따라 서울에서 구른 남편은 자기 고을의 사또로 임명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내가 반기면서 “그래, 당신은 글자 한자 모르는 무지랭이인데 어찌 벼슬을 얻게 되었소?” 하였다. 남편이 대답했다. “아, 자네 시키는 대로 서울에서 구르니까 되더라.”
 
  「잘 사는 딸과 못 사는 딸」 
옛날 한 남자에게 딸 두 명이 있었다. 큰 딸은 못 살고, 작은 딸은 잘 살았다. 한 번은 그 사람이 작은 딸네 집에 가니까 딸이 길쌈일이 무척 바빠서 밥을 지어 올릴 겨를이 없다고 했다. 밥 한 그릇도 못 얻어먹고 푸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 남자는 작은 딸을 매우 괘씸하게 생각했다. 반면 못 사는 큰 딸은 아버지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하루는 그 남자가 수수떡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죽었다고 하면서 거짓으로 부고(訃告)를 했다. 작은 딸이 빈소에 머리 풀고 들어와 울면서 “울 밑 논 서 마지기 날 주려고 하더니 갑자기 세상을 버리다니……”라고 넋두리하며 곡을 했다. 짐짓 죽은 체한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작은 딸을 꾸짖으면서 혼을 냈다.
 
  「장난 잘하는 서재꾼」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동들을 가리켜 ‘서재꾼’이라고 한다. 한 서당의 서재꾼들이 장난을 자주 했다. 홍시 한 바구니를 선물로 받은 훈장은 서재꾼들에게 “이 홍시는 하늘 땡깔이니 너희가 먹으면 죽는다.”라고 겁을 주었다. 서재꾼들은 이 말에도 아랑곳없이 몰래 끄집어내어 먹어버렸다.
또 이들은 닭을 서리해 찬장 속에 감추어 놓았다. 닭 주인이 훈장에게 서재꾼을 시켜 남의 집 닭을 훔쳐 먹도록 하냐고 항의했다. 훈장이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닭 주인이 찬장 문을 여니 닭이 활개를 치고 울어댔다. 닭 주인은 “선생질을 하면서 왜 그런 일을 시키느냐?” 하면서 훈장의 뺨을 때렸다.
 
  「장수 머슴 이야기」 
김해(金海)에 사는 과부가 머슴 서너 명 데리고 있을 만큼 큰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아홉 마지기 논은 물을 대지 못해 9년 동안 농사를 짓지 못했다. 바로 아래 논의 주인인 어느 부잣집 머슴이 힘이 세어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어느 낯선 사람이 이 마을에 와서 “머슴 쓸 데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웃 사람이 말을 받아서 하는 말이 “머슴 쓸 데가 있기는 한 군데 있는데……” 라고 하였다. 몸이 약해 보이는 이 사람을 과부에게 데리고 가니 과부는 ‘꼴단사’로 쓰려고 하였다. 꼴단사는 상머슴, 중머슴 다음의 머슴으로서, 큰일보다는 잡일을 하는 정도에 불과한 머슴이었다.
모심기 때에 이르러 이 새로 들인 머슴에게 일을 시켜보니 보기와 달리 힘이 장사였다. 농사 못했던 아홉 마지기 땅에 모심기를 시켰더니 일을 썩 잘했다. 이때 아래 논의 힘센 머슴이 올라와 다짜고짜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야, 이놈아, 9년 동안 못한 농사를 왜 하느냐? 10년 만에 물을 막아 왜 남의 농사를 망치려 하느냐?” 하니, 새 머슴이 말하기를, “물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다. 위에서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정한 이치인데, 너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했다.
두 사람이 말싸움으로 티격태격 하다가 힘겨루기로 발전했다. 몸이 약해 보이는 새 머슴이 기골이 장대한 이웃집 머슴을 번쩍 들어 논에 쳐박아 놓으니 즉시 기절을 했다. 새 머슴이 일년간 농사를 짓고 떠나려 했다. 과부가 너무 고마워서 품삯을 서너 배 주려고 하니 받지 않고 세 철 의복만 요구했다. 그는 보따리에 세 철 의복을 싸서 가버렸다. 이 사람을 두고 차력(借力)꾼이라고 했다. 즉 산신령에게서 힘을 빌려 가지고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축지(縮地)의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장자못과 최부자」 
최부자는 구두쇠에다 심술쟁이였다. 탁발승이 시주를 청해도 곡식 대신 쇠똥을 한 바가지 퍼주는 위인이었다. 탁발승은 하도 기가 막혀 막 돌아 서려는데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며느리가 시주쌀을 퍼다 주면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었다. 탁발승은 합장을 하고 며느리의 마음씨에 감동되어 비장하게 한마디 말했다.
“지금 바로 저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선 아니 됩니다.”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면서 탁발승은 총총히 사라졌다.
며느리는 영문도 모른 채 탁발승이 시킨 대로 산으로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산꼭대기 부근에 다다를 무렵에 자기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끊이지 않자 많은 가족들이 걱정이 되어 뒤돌아보고 말았다.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큰 못이 생겼다. 그 순간에 며느리도 돌이 되고 말았다.
 
  「장재못」 
진주 사봉면(寺奉面) 무촌리(武村里)에 강씨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재산은 많았지만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시주승에게는 행패를 부리고 거지에게는 쪽박을 깨뜨려 보이곤 했다. 한 고승이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했다.
고승은 강씨집 문을 들어서자마자 하인들에게 묶였다. “소승이 묶여도 좋습니다만, 중요한 것 하나 가르쳐 주겠습니다.” 하니 강부자는 예사롭지 않은 승려라고 생각해 풀어 주었다.
“이 댁을 보니 재물은 있어도 권세는 없소이다.”
“스님 말이 맞소. 방법을 부디 가르쳐 주시오.”
“저 건너 흐르는 물을 이쪽으로 돌리면 권세를 얻을 수 있을 것이요.”
고승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강부자는 반성천을 마을 쪽으로 돌리기 위해 엄청난 재산을 탕진한 채 망했다. 고승의 앙갚음이 이루어진 것이다.
 
  「저승 차사와 친한 사람의 적선」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는데 저승차사가 되었다. 서로 친했기 때문인지 이승과 저승이 서로 달라도 그들은 눈에 보이고 또 대화를 나누곤 했다.
“자네 오늘은 어찌 왔나?”
“오늘 누구누구가 죽을 터인데, 내 그들을 잡으러 나왔네.”
한 번은 저승차사가 학생 30명쯤 잡아가는데 저승으로 잡혀가는 아이들을 위해 그 친구는 자신의 며느리를 시켜 밥을 해 먹였다. 한 아이가 밥을 먹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너는 왜 밥을 안 먹니?”
“제가 삼대독자로 조부모, 부모가 계시는데 어찌 저승으로 간단 말이오.”
친구는 이 아이가 하도 딱해서 저승차사인 친구에게 이 아이를 이승으로 풀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거절했다. 그래서 친구는 이 아이와 성(姓)도 같고 사주도 같은 막내 손자를 대신 저승에 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덕을 베푼 덕분에 훗날 이 집은 부자가 되었다.
 
  「적선 잘하는 부인」 
한 노인이 소싯적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부지런하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 이 노인은 독사 중에서도 불독사로 이를 만큼 노랭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굶주려 부황증이 나서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도 나몰라라 했다. 그 부인이 몰래 곡식을 내어 도와줄 따름이었다.
노인이 길을 가는데 금호못같이 큰 못에서 뿔 돋친 구렁이 부부가 나타나 사람처럼 말을 하면서 꾸짖었다. 그러면서 잡아먹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 암구렁이가 수구렁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의 노처(老妻)가 굶주린 사람들을 적잖이 살렸는데 과부가 되게 할 수 없지 않소.”
수구렁이도 이에 동의하면서 노인을 살려주었다. 부인의 적선 덕에 살아난 노인은 기민(饑民)을 구휼하고 누구에게나 덕을 베푸는 데 앞장섰다. 노부부의 적선으로 대를 이어 잘 살았다고 한다.
 
  「전라도 부자과부 얻은 경상도 도둑」 
경상도 도둑이 전라도로 원정 가는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고개에서 전라도 도둑을 만났다. 전라도 도둑이 구례(求禮)에 박과택(朴寡宅)이라고 불리는 부자 과부집이 있는데 재물이 아주 많으니 함께 털자고 제의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동업자가 되었다.
구례 과부집은 경비가 삼엄했다. 부엌으로 통하는 하수구(수채구녕) 밖에는 침입로가 없었다. 사람 하나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하수구를 통해 경상도 도둑이 많은 재물을 빼돌렸다. 밖에 있는 전라도 도둑은 도둑질한 재물을 소복하게 쌓아갔다.
경상도 도둑이 도둑질을 하다가 방에 누워 있는 과부마저 탐을 냈다. 과부가 그에게 말했다.
“돈만 훔쳐 냈으면 되었지, 사람까지 앗으려고 하느냐?”
도둑이 주춤하는 사이에 과부가 또 한 차례 정색하면서 말을 했다.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우니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살려주오. 어찌 하면 좋을꼬.”
과부가 시킨 대로 경상도 도둑은 헌 옷가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하수구로 내밀면서 ‘내 나간다’하고 소리쳤다. 하수구 바깥에 있는 전라도 도둑이 훔친 재물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칼로 목을 내리쳤다. 과부가 시킨 대로 하지 않았으면 경상도 도둑은 목이 잘릴 뻔했던 것이다.
그 날 밤, 목숨을 건진 경상도 도둑은 목욕을 하고 준비된 옷을 갈아입고 과부와 함께 이부자리에 들었다. 날이 샌 다음날 문 밖을 보니 전라도 도둑은 재물을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경상도 도둑은 삼천 석이나 되는 재물을 가진 과부와 함께 전라도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절에 시주한 이야기」 
한 스님이 큰 절을 세우려 마을의 부자에게 시주를 얻으러 다니다가 어느 구두쇠에게 갔으나, 구두쇠 주인은 스님을 내쫓아버렸다. 그 집의 머슴이 스님을 불쌍히 여겨 30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면서 모은 돈을 바쳤다. 스님은 거절하다가 할 수 없어 그 돈으로 절을 짓게 되었다.
스님은 머슴의 공덕을 빌었으나 머슴이 다리병신이 되고 앉은뱅이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후 머슴이 봉사까지 되었다기에 스님은 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한 기도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둥병까지 들어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스님이 화가 나 절 지어 공을 들이는 중생을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며 큰 호미로 불상을 내리꽂자 불상에 박힌 호미가 박힌 채 빠지지 않아 그 절의 이름이 ‘호미절’이 되었다.
스님은 팔도를 돌아다니다가 20년 후에 이 절에 와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재 너머 큰 부잣집에서 아들을 얻어서 돌잔치를 절에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을 맞이한 아이가 또박또박 불상 앞으로 가더니 불상에 박혀 있던 호미를 빼내고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이 절을 지을 때 시주를 한 머슴으로 한평생을 다리 병신, 또 한평생을 봉사, 그리고 문둥병으로 죽을 운명이었는데, 시주를 한 덕분에 한평생에 이 세 가지를 다 겪고 다시 탄생을 하여 부잣집에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스님에게 감사하다며 절을 하였고, 호미절의 내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크게 잔치를 벌였다.
 
  「정기룡 장군」 
정기룡이 과거 보러 갔을 때, 임금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임금의 꿈에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임금이 신하를 불러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정가(鄭哥)라는 사람이 막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인해 이름을 정기룡으로 고쳤다.
정기룡 장군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도 실제로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에 버금갈 만큼 큰 무공을 세운 거룩한 장군이었다. 정기룡 장군이 출세한 데는 지리학, 즉 풍수의 영향이 컸다. 어느 중이 상좌를 데리고 마을을 지나면서 “(명당자리를) 보았느냐?”라고 물었다. 보리밭에서 밭을 매고 있던 노인이 중을 잡고 명당자리를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 그 명당자리에 정기룡 장군의 할아버지가 묻혔다.
 
  「정성으로 산삼 얻은 효부」 
시어머니가 병이 깊었다. 한 도사가 효심이 강한 며느리에게 어린 아들을 고아 먹이면 시어머니의 위중한 병이 낫는다고 했다. 어린 아들을 푹 고니, 가마솥에 산삼 뿌리가 동동 떠 있었다. 이 약으로 병구완하니 시어머니의 병환이 깨끗이 사라졌다.
 
  「정자나무의 3년상」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에 기동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나무를 심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쑥쑥 자란 이 나무는 우거진 녹음을 자랑해 마을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 더위를 피하게 하는 고마운 자리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무그늘 아래에는 항상 마을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 느티나무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었는데, 나뭇잎이 피는 수에 따라 마을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칠 수 있었다.
느티나무의 잎이 한꺼번에 피면 농사가 흉년이 들었고, 여러 차례 나누어 피면 풍년이 든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믿어 왔다. 따라서 마을사람들은 느티나무의 잎을 보고 한해의 농사를 짐작했으며, 한꺼번에 피면 그 해는 반드시 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 이 느티나무를 심은 사람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느티나무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잎을 피우지 않은 해가 없었는데 그 해에는 전혀 잎을 피우지 않는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나무가 병이 들어 잎을 피우지 않는가보다 하고 무심하게 지나쳤으나 이 느티나무는 그로부터 3년간 전혀 잎을 피우지 않았다.
이를 본 마을사람들은 느티나무가 자기에게 생명을 준 나무 심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처럼 삼년상을 지냈다고 믿었다. 사람도 지내기 어려운 삼년상을 나무가 지냈다는 사실이 남다르게 훌륭해서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더욱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
 
  「제 복에 사는 딸」
어는 고을 원이 아들은 없고 딸만 여럿 낳아 딸들이 모두 컸다. 어느 날 딸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너는 누구 복으로 사느냐?”
한 딸이 말했다.
“아버님 복으로 삽니다.”
흐뭇하게 생각해 다음 딸에게 물었다.
“네, 아버님 복으로 삽니다.”
다음 딸도, 그 다음 딸도 모두 자기 아버지의 복으로 산다고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딸에게 똑같이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다르다.
“제 복으로 삽니다.”
전혀 뜻밖의 대답에 다시 물었다.
“내 복이 아니고 네 복으로 산단 말이냐?”
“네. 분명히 저는 제 복으로 살지 아버님 복으로 살지 않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당장 딸을 집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그래도 달을 쫒아내는 어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서 패물을 몸에 지녀 줘 당장 살기에 는 걱정이 없도록 해주었다. 집에서 쫓겨난 막내딸은 정처없이 길을 가다 깊은 산골의 숯 굽는데까지 가게 됐다. 마땅하게 갈 데가 없는 그는 숯 굽는 곳에서 밥도 짓고 빨래를 해주며 살아가다 그 곳의 숯굽는 사람과 정이 들어 혼례를 치르고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위해 밥을 해다 나르고 같이 숯굽는 일을 거들기도 했는데 이것도 내 복이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밥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남편의 작업장에 갔다. 불을 때던 남편이 밥을 먹을 동안 아내가 숯가마에 불을 대신 때는데 아궁이로 쌓은 돌이 이상했다. 새까맣게 검정칠이 되어 있지만 그냥 돌과는 뭔가 달랐다. 부지깽이로 검정을 벗겨 보니 이건 돌이 아니다. 누런 황금덩어리다. 부지깽이로 이것 저것 검정을 벗겨 보니 모두가 금덩이다. 그는 그만 불 때는 일을 중단하고 남편더러 숯가마를 부수자고 한다.
“그게 무슨 소리요. 세상에 숯 구워 먹고 사는 놈에게 숯가마를 부수라니.”
“아무말 말고 그렇게 하세요. 다른 사람이 알면 안되니까 아무도 몰래 그렇게 하세요.”
남편은 자기의 아내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 일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남편은 평생 숯굽는 일만 하다 보니 금덩이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데 여러 날 동안 아내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부수기로 했다.
그리고 돌이 아닌 금덩이를 씻어 방안에 가득히 보관해 놓고 남편더러 금덩이 몇 개를 지게에 지라고 한다. 남편은 영문도 모른 채 짊어지니 아랫마을의 김부자를 찾아가 보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과 더욱이 이런 게 집에 많이 있다는 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어쨌든 남편은 금덩이를 지고 김부자 집을 찾아가니 깜짝 놀란 김부자는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한다.
“야 이사람아, 왜 그냥 서 있느냐. 어서 내려 놓고 올라오지 않고.”
호들갑을 떠는데 남편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아, 그걸 내게 주면 요 앞의 논을 주마.”
남편은 김부자의 이런 제안에도 대답이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야 이사람아, 그럼 저 논하고 이 집을 주겠네.”
그래도 말이 없자 이번에는 더욱 안달이 나서 전답문서, 집문서, 종문서까지 다 내준다.
이렇게 해서 김부자는 금덩이만 갖고 다른 데로 이사가고 그 집은 숯굽던 무식쟁이가 들어 앉았다.
염천에도 불을 피우며 숯을 굽던 사람이 졸지에 고대광실에서 하인을 부리며 살게 됐으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못할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아니 이젠 마님 소리를 듣게 된 아내가 남편을 불렀다.
“영감, 이제 여기다 문을 하나 달아야겠는데 목수 한 사람 구해 오세요.”
아내 덕에 팔자를 고친 사람이 무슨 짓인들 못할까.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을 하니 목수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그러자 마님은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시나나’ ‘시나나’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달란다.
엉둥한 주문에 다른 목수들은 그냥 돌아가고 오직 한 사람만이 나서서 과연 그런 소리가 나는 문을 만들었다.
문을 열 때도 ‘시나나’ 닫을 때도 ‘시나나’하는 게 어찌 보면 신기하고 어찌 보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지만 마님이 좋아하니 어느 누구도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마님의 친정은 집안이 망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기를 쫓아 낸 아버지라도 자기의 핏줄이니 그립지 않을 수 없었고 부모와 형제의 안부가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들은 문 여닫는 소리를 듣고 괴이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하루는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지나가다 문소리를 들었다.
‘허 거참, 희한한 소리를 내는 문이구먼.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 소리가 꼭 내 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같으니.’
그러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혼자 중얼거린다. 노인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인이 마님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래 어떻게 생겼더냐?”
“키는 크고 눈 옆에 큰 사마귀가 있더이다. 그러나 행색을 보니 거렁뱅이였습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마님은 다시 이른다.
“얼마나 배가 고프겠느냐. 사랑방으로 모셔 음식을 잘 차려 드려라. 그리고 영감마님 오시라 해서 의관 정제하고 기다리시라 해라.”
주섬주섬 몇 가지 일러 놓고 자신도 좋은 옷으로 갈아 입은 후 남편과 함께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절 받으소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남편을 손짓해 큰절을 올리니 놀라는건 거렁뱅이 영감이다.
“아버님이라니...... 그리고 그 절은 또 웬일이오?”
하면서 따라 절을 하려는데 그때야 마님이 영감의 손을 잡으며 그 동안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제서야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지난날의 사정을 얘기한다.
“네 말이 괘씸해 널 쫓아낸 후 집안이 망하더구나. 네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나니 세상살이가 하도 허망하고 네가 제일 보고 싶대. 그래 죽기 전에 네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이렇게 떠돌아다녔는데 이렇게 잘살고 있는 너를 보니 반갑고도 부끄러워 고개를 못들겠구나.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너는 네 복에 살고 나는 재 복에 사는 게 틀림없어.”
그렇게 해서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잘 살았다는데 그의 딸 이름이 ‘시난’이었고 딸은 그의 아버지가 이름 소리를 듣고 찾아올 것이란 생각에서 문소리가 그렇게 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조국문」 
하진백은 국화를 아주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의 호도 국담(菊潭)이라고 불렀다. 하진백은 국화를 집안 연못에 심어 두고 국화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벗들을 불러 시회(詩會)를 열고, 국화술을 빚어두었다가 벗과 두 아우와 함께 즐겼다.
하진백은 일찍이 나이 겨우 세 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여섯 살 때는 시를 지을 줄 아는 문장가였다.
그래서 1790년 정조(正祖, 1752~1800)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다섯 차례나 임금에게 나아가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서거로 출사는 좌절되었고, 끝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오히려 자연에 뜻을 두고 국화를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다. 일찍이 진나라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국화를 사랑하여 풍취를 남긴 이야기가 있으나, 하진백 역시 아우들과 국화를 사랑함이 그에 못지않아 세상 사람들은 하진백을 두고 도연명도 이루지 못한 형제의 국화 사랑을 이루었다고 일컬었다.
하진백이 고고한 학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해마다 구월이면 꽃망울을 터뜨려 향기를 사방으로 뿜던 국화가 하진백이 죽자 시들시들 죽어갔다.
사람들은 이런 기이한 현상을 보고 하공이 죽자 국화도 순절하여 시들어 죽었다며 이상하게 여겼다.
이를 본 아우 진중(鎭中)은 시들어 죽는 국화를 보자 슬픔이 가슴에 사무쳐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마음을 시로 지어 달래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죽음은                                         今日之死
그대가 좋은 대우를 받았음을 알기 때문이고           以君知遇之感
뒷날 태어나면                                       後日之生
내 그대를 형제의 정으로 대하리라                    爲吾孔懷之情
이듬 해 국화는 다시 살아나 꽃을 피웠다.
 
  「조을대 대감」 
옛날에 조씨가 있었는데 건달처럼 술이나 얻어 마시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이 한심했던지 어느 날 조씨는 자신의 미래를 점쟁이에게 물어보았다. 점쟁이가 점괘를 보고 성씨(姓氏)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조가’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이름을 ‘조을대 대감’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날부터 미친 사람처럼 조씨는 자신을 외치고 다녔다.
“조을대 대감 나가신다.”
조을대는 술만 취하면 골목마다 다니면서 이 말을 외치고 다녔다.
이때 조정에서는 임금님이 돌아가시게 되었다. 임금님이 돌아가시려고 하자 아직 임명하지 못한 판서자리를 임명하기 위하여 영의정이 찾아와서 임금님께 물었다.
“전하, 아직 이조판서를 임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써라.”
“예? 그럼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습니까?”
“경이 좋을 대로 하라.”
그러자 영의정이 ‘조을대로 하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상에 소문이 자자한 ‘조을대’가 생각이 나서 조을대를 판서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조을대는 정말로 판서가 될 수 있었다.
 
  「조팔백」 
옛날에 조팔백이란 사람이 살았다. 그 사람의 이름이 팔백이 된 까닭이 있다.
조팔백이 아직 혼인을 하기 전에 조팔백의 장인 되는 사람이 딸의 관상을 보았다. 아무리 얼굴을 뜯어보아도 빌어먹을 상이었다. 그래서 천석꾼으로 딸의 배필을 삼아야 딸이 굶지 않게 생겼기에,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의 상을 보며 사윗감을 찾았다. 우선 양반집 자제들 중에 혹시 천석꾼이 있는지 서당 앞에서 학동들의 관상을 보았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천석꾼이 될 얼굴이 쉽게 나타나지 않자 이번에는 나무꾼이 오가는 길목에 앉아 유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 날 나무꾼이 많이 지나가는데 키가 작고 조그마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따라가는데 그 사람 관상이 천석꾼이 될 상이었다. 기회를 봐서 매파를 보내 조팔백에게 자기 사위가 될 것을 권했다.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조팔백은 얼른 혼인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조팔백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오는데, 매 사냥꾼을 만났다. 사냥을 하려고 하는데 불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것을 본 조팔백이 사냥꾼에게 불을 빌려주었다. 사냥꾼은 보답으로 잡은 꿩을 한 마리 주었다. 조팔백이 꿩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마을에 홍역을 하는 아이가 있는 사람이 꿩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팔백은 암탉을 한 마리 달라고 했다. 암탉을 가지고 가는데 닭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 개와 바꾸고, 개를 키우다가 돼지로 바꾸고, 돼지를 길러 소를 장만하고, 소를 팔아 논을 사고해서 자꾸자꾸 살림이 불어났다.
불어난 재산이 모두 팔백 석이 되었다. 본래 천석꾼이 될 상이었으나 자기 아내가 빌어먹을 몫 이백 석을 빼고 팔백 석 만큼만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이 팔백, 조팔백이 되었다고 한다.
 
  「지내리 돌보마을의 보」 
돌보마을에 있었던 이 보는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큰 돌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도깨비가 보를 놓았다고 믿고 있다. 돌보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넓은 들판의 곡식에 생명수를 제공하고, 재해로부터 지켜주며, 넉넉한 수확을 보장하는 약속의 돌이었던 것이다.
1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돌보마을은 벼농사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딸기·고추·수박 등의 시설재배로 전환하고 있다. 1975년에 실시된 지내천 직강공사로 지금은 이 보가 사라지고 없다.
 
  「지네가 된 닭」 
옛날 어느 마을에 청상과부가 살고 있었다. 혼자 살기가 외로워 검은 닭을 키웠다. 그럭저럭 닭이 자라 알을 낳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닭이 알을 낳아 품고 달걀을 부화시키려고 하면 과부가 암탉을 쫓아내고 달걀을 모두 가져가 삶아먹곤 하였다. 그리고 다시 닭이 알을 낳아 품으려고 하면 또 과부가 닭을 내쫓고 반찬을 해먹었다.
그렇게 하다 6년이 되어 닭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 날부터 과부의 배가 갑자기 불러오기 시작하였다. 과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의원을 찾아가서 진맥을 하고, 약을 먹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약초를 다려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배가 점점 불러오더니 아기를 낳게 되었다. 아기를 낳고 보니 마침 사내아이였다.
그날부터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 아이는 너무 재주가 좋아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하루는 관상쟁이가 그 집 앞을 지나다가 보니까 그 집 아이가 책보따리를 가지고 서당을 가려고 나오더니 담 위에 책보따리를 두고 지붕 위로 올라가 지네가 되어서 살살 지붕 용마루로 기어들어가 눕는 것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저녁 무렵이 되자 용마루에서 기어 내려와 다시 사람으로 둔갑을 해서 책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튿날 지켜보니 또 그렇게 아이가 지네로 변하여 용마루로 들어가 눕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관상쟁이는 마을로 가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힘센 편수 대여섯 명을 구해서 과부 집으로 갔다.
과부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고 무조건 동네에 다니면서 기름을 구해오라고 했다. 과부는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관상쟁이는 시키는 대로 해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과부는 할 수 없이 기름을 얻어다가 마당 가마솥에다 붓고 끓였다.
편수에게 사다리를 놓고 용마루로 올라가 지붕을 걷고 집게로 지네를 잡아내도록 했다. 기운 센 사람 대여섯 명이 올라가 커다란 지네를 집어 내려와서 끓는 기름에 삶아버렸다.
그리고 과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과부는 닭이 지네로 변해서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상쟁이 덕분에 과부는 죽을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 
어떤 부인이 예쁜 딸을 평안감사의 배필이 되게 해달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처님 앞에 엎드려 소원을 비니, 절의 주지가 그 말을 엿듣고 자신이 딸을 차지하려고 꾀를 생각해 냈다. 주지는 부인이 불공을 드리는 불상 뒤에서 딸을 평안감사에게 시집보내면 호식(虎食)으로 요절할 운명이며 이 절의 주지에게 시집가야 명대로 살 팔자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꾸짖었다. 부인은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고 더욱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리려 다시 절을 찾았으나 합장도 하기 전에 꾸짖는 소리부터 들린다. 주지는 근심하는 모습이 역력한 부인에게 왜 그러냐고 묻고는 부처님이 현몽하시어 어떤 처자를 거두라고 했다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한다.
부인은 사태가 어쩔 수 없음을 파악하고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한다. 딸은 자신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주지에게 시집가겠다고 한다. 주지는 짐꾼들을 통해 부인의 집으로 궤짝을 보낸다.
딸이 궤짝에 실려 주지가 있는 절로 가던 중 평안감사 행차를 만나자 궤짝을 지고 가던 짐꾼들은 행차에 놀라 궤를 벗어 던지고 계곡으로 몸을 숨겼다. 궤짝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본 평안감사는 여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평안감사 일행이 떠난 후 호랑이 한 마리가 비어 있는 궤짝 안으로 들어앉았다. 짐꾼들은 호랑이가 든 궤짝을 주지에게 가져다주고, 궤짝을 방안에 둔 주지는 호랑에게 죽고 만다.
한편 평안감사에게 구출되어 갔던 처녀는 평안감사의 부인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진양은 도읍지」 
『소문쇄록』에는 ‘진양은 옛 제왕의 도읍이라 한다.’는 『파한집』의 기록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한집』에 ‘진양은 옛 제왕의 도읍이라 한다.’ 이인로가 어디에 근거하여 말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한시대에 진주에 세운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단지 얼마 안 되는 고을일 뿐이니, 어찌 제왕의 도읍이라고 이를 수가 있겠는가.('破閑集云 晋陽古帝都 未知眉叟何據云 然雖三韓有立國于晋州者 特小小聚耳 豈可稱帝都哉')
 
  「진주 자리꼼쟁이」 
한 진주 꼼쟁이가 살림을 모으면서 고기를 사 먹지 않았다. 장에 가서 고기를 사오더라도 천장에 한 마리 매달아 놓고 밥 때가 되면 온 가족들이 먹지는 못하고 밥 한술 뜨고 쳐다보는 것으로 반찬을 삼게 하였다. 이웃의 친구가 그런 모습을 나무라자 진주 꼼쟁이는 식구는 많은데 때마다 반찬을 사댈 수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림을 모을 수가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진주 꼼쟁이의 구두쇠 노릇이 너무나 악착같아서 보다 못한 이웃 사람이 영양 보충이나 하라고 북어 한 마리를 사다가 그 집 마당에 던져 놓았다. 아침에 마당으로 나오다가 마당에 떨어진 북어를 본 자리꼼쟁이는 얼른 집어다가 다시 담장 밖으로 던져버렸다. 북어를 밥상에 올리면 그 만큼 밥을 많이 먹는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뒤 꼼쟁이는 아들을 장가들이게 되는데, 마침 그 사돈도 꼼쟁이였다. 두 사돈이 혼사를 위해 만났는데, 그날은 날씨가 몹시 더워서 부채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주 꼼쟁이는 접는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하는데 겨우 부채살 두 대를 펼쳐놓고 부쳤다. 꼼쟁이 사돈이 이를 보고 남보기 뿌끄러울 뿐 아니라 부채살을 두 대만 펼친다 해도 부치는 과정에서 떨어지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꼼쟁이 사돈이 자신이 부채 부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부채를 펼쳐 한 손에 들고서는 얼굴만 흔들었다.
 
  「진주 지랫대소」 
진주 남강변에는 지재소(沼)라고 불리는 소가 있었는데, 지재소를 지랫대소라고도 불렀다. 지랫대소 바위 주변에는 특히 고기가 많았는데,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바위 밑으로 내려가 손으로도 고기를 잡았다. 하루는 세 사람이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욕심 많은 한 명이 너무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러자 갑자기 물 밑 돌문이 닫혀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욕심 많은 사람이 고기를 풀어주자 돌문이 열려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고기를 한두 마리씩 잡는 것은 상관없으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고기를 잡으면 죽게 된다고 한다.
 
  「진주 지맥을 끊은 무학대사」 
조선을 새로 건국하고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인물이 많이 나는 것을 걱정했다. 지방의 인물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진주에는 강씨, 하씨, 정씨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이성계는 진주 사정을 잘 아는 무학대사를 시켜 이 곳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내려와 진주성에서 대봉산(大鳳山) 쪽을 바라보니 천하 명당자리였다. 대봉산은 큰 봉황새가 사는 뫼란 뜻인데, 무학대사는 이 산이 있기 때문에 진주에서 인물이 많이 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사는 산의 기운이 연결되어 있는 대룡골과 황새 등을 잇는 지맥을 끊고, 산의 이름도 비봉산(飛鳳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봉황새가 날아가 버려 정기가 빠진 산이란 뜻으로 그렇게 고친 것이다.
그리고는 비봉산 밑에 봉이 산다는 서봉지(棲鳳池)란 못도 가마못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가마는 가마솥처럼 펄펄 끓는 뜨거운 못에 봉을 삶는다고 이름을 붙여 봉황새를 쫓아버리려 한 것이다. 다시 동쪽을 살피니 비봉루 옆자리에 향교가 자리잡고 있는데 역시 명당이었다. 그래서 향교를 옥봉동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다시 남쪽을 살피니 남강 새벼리 고개 밑 석용골에 돌산이 튀어나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상이라 역시 대단한 명당이었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시켜 돌로 된 용을 부수었는데, 떨어져 나오는 돌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용의 비늘 같았으며, 그 돌이 떨어져 나올 적마다 주위에 붉은 피가 흘렀다.
나라에서 무학대사라는 큰 풍수를 보내어 진주의 지맥을 끊어놓자, 강씨 집안에서는 큰 걱정이 생겼다. 나라에서 하는 일을 막을 수도 없고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강씨 집안에서 봉황새를 다시 불러올 수단으로 봉의 알자리를 만들었다. 봉의 알자리를 만들면 날아갔던 봉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주성 동문 막은 유래」 
옛날 진주성 동문은 터가 좋아서 그 문으로 나드는 변신한 여우가 있었다. 여우는 묘를 파서 비단을 벗겨다가 남강 물에 씻어 장터에서 토막 베로 팔곤 했다. 이후로는 그 폐단을 막기 위해 동문을 폐문해버리고 말았다.
 
  「진주·의령 부자와 경주 최부자 살림」 
진주에 사는 이만석꾼과 의령 만석꾼이 만나서 경주 최부자 집에 놀러 갔다. 최부자는 12대 만석꾼에 10대 진사라 학자 집안이었다. 진주 부자는 최부자 집에 놀러 가는 길에 지팡이가 많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사서 최부자 집 마루에 세워 두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마루에 지팡이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부지깽이를 했다고 한다. 최씨 집안의 아들이 부자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얼마나 받느냐고 물었다. 다른 부자들은 논에 따라 각각 한 섬, 반 섬 정도씩 받아 만 석, 이만 석이 된다고 대답했다. 최부자 집 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소작인들이 어려우면 명년(明年)에 받든지 안 받든지 신경 쓰지 않으며, 그렇게 해도 만 석이 된다고 했다. 이 만석하는 진주 부자가 생각해보니 그런 식으로 하면 자신은 만 석도 안 될 것 같았다. 다 같이 솔 숲 구경을 나갔는데, 솔밭이 삼 십리 정도 되었다. 최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소나무 하나마다 걸면 이 원 정도씩 걸 수 있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보니 자신들의 재산을 걸면 일 원도 안 될 것 같아 속으로 상대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자들이 처음 최부자 집에 올 때 지팡이를 골라 왔는데, 최부자가 그것을 보니 그 사람들의 재산은 원래 삼백 석, 오백 석도 안 되어 보였다. 따라서 사람은 항상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므로 평소 없는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짐승은 구하되 사람은 구하지 말라」 
어떤 사공이 홍수에 떠내려 온 노루와 구렁이, 그리고 어린 아이 한 명을 건져 살려주었다. 사공은 노루와 구렁이는 제 갈 길로 보내주고 아이는 데려다 키웠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노루가 나타나 사공에게 돈 궤짝이 묻어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부자가 된 사공은 양자로 삼은 아이를 잘 키워 장가까지 보냈다. 성장한 아들은 돈 욕심에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공이 도둑질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포도청에 고발을 한다.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있는 사공에게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나 사공은 구렁이의 도움으로 위기에게 벗어나고 키워준 은덕을 저버리고 재산만 탐한 배은망덕한 양아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사공은 짐승을 구해 준 덕분에 오래도록 잘 살았다.
 
  「집현산 설화」 
고려 때 집현면을 지나는 한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산세를 보고 산세가 요상한 것이 용이 승천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혼자말로 지껄이며 지나가는데, 어린 꼬마가 선비의 혼잣말을 엿들었다. 마침 이곳은 가뭄과 수해 등으로 백성들은 찌들어 죽을 지경에 놓여 있던 차라 선비의 말을 엿들은 꼬마는 선비를 붙잡고 마을에 내린 우환의 원인을 알려달라고 사정했다. 선비는 꼬마의 손을 뿌리치며 이 지역의 백성들이 죄를 범하여 지금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가뭄과 수해 등으로 농사는 안 되고 주민들은 병들어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해를 거듭해도 재난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어린 꼬마는 청년이 되었다. 청년이 된 꼬마는 선비가 말한 것을 회상하면서 손뼉을 치고 무엇인가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는 급히 집현산에 올랐다.
청년은 집현산 구석구석을 헤매다가 큰 바위 옆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기도하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보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노인이 된 선비에게 집현면의 우환을 풀어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밤이 될 때까지 노인에게 빌다가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청년이 잠자리에서도 빌기를 그치지 않자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어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인 즉, 노인은 하늘의 용인데 도를 닦기 위해 하강하였다가 다시 승천하려 할 때 마을 사람들이 용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승천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을의 우환은 용의 승천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우측 산봉우리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서는 굉장한 번개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청년은 마을로 내려와 산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매일 등산하여 천지의 신에게 빌었다. 100일 동안 열심히 정성을 드린 청년은 결국 지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그 청년을 애도하고 추모하며 청년의 뜻을 이어 계속 집현산에서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번개가 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나기가 대지를 적시자마자 죽어가던 농작물은 다시 살아나고, 병들은 주민들도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산 정상의 소나무를 신성시하게 되었다.
 
  「참다운 부부애」 
옛날 집현면 냉정에 부부 금슬이 지극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의 성은 안씨(安氏)인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오랜 세월 동안 관직 생활을 하여 벼슬이 마침내 정헌대부(政憲大夫)에 이르렀다.
부부의 사랑은 너무 각별하여 한시도 떨어져 지낼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이들 부부에게 “강산은 변할지언정 부부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기대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안씨 부부의 사랑도 나날이 깊어만 갔다.
그런데 흐르는 세월은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다. 남편이 예순 살을 넘기면서 덜컥 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내는 사방을 다니며 좋다는 약을 수소문하고, 백방으로 다니면서 의원을 초청하여 치료를 해보았지만 아무 보람도 없이 끝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남편이 마지막 숨을 거두려고 할 때 아내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남편의 입속으로 흘러 보냈다. 비록 옛날 책에 손가락을 잘랐다는 단지(斷指)의 기록은 있으나 직접 그것을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인데도 부인은 서슴없이 실행에 옮겼다.
아내의 이러한 애틋한 정성도 아무 소용이 없이 끝내 남편은 숨을 거두었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오열하였다. 이윽고 주위의 친척들이 찾아와 망자의 시신 곁에서 슬퍼하고 있을 무렵 아내는 주위의 관심이 소홀한 틈을 타 몰래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는 사기 그릇에 식초 원액을 가득 부어서 마시고, 그 자리에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부인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동해 두려워하였고, 안씨 부부를 흠모해 마지않았다. 평소 부부가 한 평생 주위의 부러움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 역시 운명을 함께 하여 그 사랑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 후 안씨 부부의 장례는 한 날 한 시에 치러졌고, 죽음을 함께 한 애틋한 부부애를 기리는 뜻에서 묘지(墓地)도 합장을 하였다. 이 묘(墓)는 진주시 집현면 냉정리 산 318번지에 있다고 한다.
 
  「창열사 중수 전설」 
숙종 때 창열사가 낡아 위패들이 비를 맞게 되어 중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수해야 할 책임이 있는 진주병사는 관심이 없었다. 안타까웠던 진주목사가 몇 번 중수를 권했지만 진주병사는 계속 거절했다. 결국 진주목사 단독으로 중수를 했는데, 그 날 밤 진주목사의 꿈에 선열들이 나타나 감사를 하고 진주병사는 벌을 준다고 했다. 진주병사가 그 날 밤 급사한다.
또 숙종 때 창열사에는 정충단이 만들어졌는데, 왕명에 의해 위패를 더 못 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다시 위패가 많이 늘었다.
 
  「처녀 귀신을 쫓은 아이」 
옛날 어느 알 수 없는 고을에 아전이 외동딸을 두었다. 딸은 홀아비로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러 다녔는데, 우연히 그 절의 중과 눈이 맞았다. 어느 날 나라에서 딸의 미모를 듣고 데려가려 하자, 아전은 그것을 거부하고, 옥에 갇혀서 죽고 만다. 처녀는 중과 함께 절로 피했으나 뒤쫓아온 사람들이 절에 불을 질러 중과 함께 타 죽고 만다. 그 이후 죽은 처녀와 중의 원한 때문에 절터에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에는 유행병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점을 쳐보니 처녀와 중의 원혼 때문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여덟 살 먹은 참판 아들 성성구가 그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왔다. 마을에서는 한 해라도 제사를 거르면 농사가 흉년이 들고, 병이 생기는 등 변고가 생긴다고 했다. 성성구는 절터에 가서 자리를 잡고 칼을 베고 누웠는데, 잠이 살며시 들자 처녀가 하나 들어왔다. 베고 있던 칼로 내려치자 처녀는 사라졌다. 이튿날도 누워있으니 처녀가 하나 나타났는데, 처녀는 고양이로 변했다. 고양이가 배위에 올라 숨을 못 쉬게 했지만 잠에서 깬 성성구는 겨우 고양이를 쫓아내었다. 고양이가 달아난 불상 밑을 보고 고양이가 귀신 역할을 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을 설명하고 귀신은 없으니, 이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다.
 
  「처녀가 낸 문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남매가 있었는데, 아들이 스무 몇 살 되는 해 과거를 보러 갔다. 서울까지 걸어가는 길에, 어느 동네를 지나가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처녀를 만났다. 처녀를 보는 순간, 그 아들은 한눈에 반해 발걸음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지도 못하고 계속 서 있으니 그 처녀가 물을 다 긷고 둑에 올라가, 총각을 보고 가볍게 손뼉을 두 번 치며 합장을 하고 거울을 꺼내서 총각에게 보이더니 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바닥에 짚고는 안경을 꺼내 총각에게 보이고는 그것을 마음에 품어 넣더니, 물을 이고 가버렸다.
총각은 그 뜻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고, 처녀를 그리워하며 결국 서울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식구들이 돌아온 연유를 물었으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날부터 처녀 생각에 밥맛이 떨어지고 피골이 상접해 갔다. 가족들은 그런 총각을 걱정하여 여동생이 끈질기게 이유를 묻자 총각은 여동생에게만 말을 하였다. 처녀가 낸 문제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심란하고 조석을 못 먹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동생이 그 문제를 풀어내었다. 그 처녀가 손 두 번을 친 것은 나이가 스무 살이라는 뜻이고, 거울과 안경을 보이는 것은 이것들이 환하여 보름달과 같고 그것을 넣을 때는 그 달처럼 캄캄하니 보름 동안에 생각을 못하면 그믐까지 생각해 오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믐이 벌써 넘어 가 시기는 지났지만, 그 처녀를 안 보면 심란하기만 할 테니 어떻게 될지 모르나 한번 가보자고 하였다.
과연 그 처녀는 총각을 보낸 뒤 주렴(珠簾)을 쳐 놓고 사람들을 살펴보며 그 총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기한이 지나 못 올 줄 알고 있는데 총각이 오니 일단 맞이하였다. 하지만 처녀는 총각과 이야기하다보니 그가 혼자 힘으로 문제를 푼 것도 아니고 기한도 늦어 배필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그냥 돌아간다 하면 그 생명이 위태로울까 두려워 그 날 하루 저녁만 자기와 자고 가라고 하면서 몸을 허락하였다. 총각은 그 처녀하고 자고 와서는 몸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처녀골」 
조선 중엽 진주의 원님 딸이 세도가 있는 함안조씨 가문의 총각에게 시집가기로 혼인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갑자기 병이 들어 덜컥 죽고 말았다. 처녀의 집에서는 함안 총각 집에 아무런 기별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함안의 조도령은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결혼을 앞둔 처녀가 죽으면 혼백을 따로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죽은 처녀의 아버지가 어느 날 위패를 벽장 안에 넣어 놓으니까 그 날따라 위패가 안에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하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처녀의 아버지가 들여다보면 위패가 엎어져 있고, 다시 돌아서면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시 또 들여다보면 엎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엎어져 있는 위패를 두드리며 몇 차례나 일으켜 놓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그때 관복을 입은 젊은 벼슬아치가 집으로 들어왔다. 처녀의 아버지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보니 함안의 조도령이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영문을 모르고 찾아온 조도령에게 딸이 죽었다고 말했다. 조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내려오는 길에 정혼녀의 집에 들른 길이었는데 어째서 부고를 알리지 않았느냐고 따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도령이 위패을 확인하려 하는 순간 위패가 조도령의 도포 자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줄 모르는 처녀의 아버지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위패를 찾는데 조도령이 위패는 자기 소매에 있으니 혼인날을 받아달라고 처녀의 아버지에게 졸랐다. 처녀의 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조도령은 고집대로 혼인날을 받고 처녀의 혼백하고 결혼을 했다.
그 뒤 재취 장가를 들라고 혼인말이 오가는 어느 날, 문득 지붕 위에 바가지만 한 불덩어리가 보였다. 이 일이 있은 뒤 다른 처녀와 혼인을 했는데, 얼마 후 재취 부인이 태기가 있었다. 태기가 있은 후 또 다시 바가지만 한 불덩어리 일곱 개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고 그 뒤 재취 부인은 아들 일곱을 낳았다.
지금도 상대동에 있는 함안조씨 재실 뒤편 산자락에 이씨 처녀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진주성 동쪽 기슭을 흘러가던 남강물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휘돌아 나가는 곳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데, 이 곳을 뒤벼리라 이르며, 뒤벼리가 끝나는 동쪽 편에 골짜기가 나온다. 이 골짜기를 흔히 ‘처이골’ 또는 ‘처자골’로 부르는데 여기에 함안조씨 문중의 제각이 있다. 이곳을 처자골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씨 처녀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신촌마을에 처녀바위와 총각바위가 있다. 바위는 한 덩어리인데 처녀바위는 가운데가 좀 빈 모습으로 보였고 그 옆에 돌문이 있다. 그 돌문이 약간 열려 있으나 괭이로 더 열려고 해도 안 열렸다. 손은 약간 들어가나 손목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전에 등짐장수가 와서 작대기로 그 사이를 쑤시니까 피가 나왔고 등짐장수는 즉사를 했다고 한다. 제보자는 어릴 때 이 바위에 가서 많이 놀았다고 하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처녀에게 수태시킨 영혼」 
어느 고을의 원이 군수가 되어 이사를 나오게 되었는데, 이사를 가던 도중에 경치가 좋은 데서 쉬어가게 되었다. 쉬고 있던 도중 갑자기 딸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내자 다음날 딸의 배가 나았는데, 딸은 풍금 부채를 들고 나왔다. 이사할 고을에 도착하여 잔치를 벌였는데, 그때 마침 같은 고을에 살던 이정승도 잔치에 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처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처녀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사 도중 쉬어갔던 곳에는 이정승 아들의 묘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같은 고을 이정승의 집에서 잔치가 열리자 고을 원은 외손자에게 부채를 들려 이정승 집으로 갔다. 이정승 집의 종이 부채를 알아보고, 이정승과 합석하게 되었다. 부채를 알아본 정승은 연유를 물어보고는 아이를 손자로 인정하고, 사돈으로 대했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큰 인물이 되었다.
 
  「천고개」 
천고개는 9백 9십 9명이 모여도 못 넘고 반드시 천 명이 모여서 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단성(丹城)에도 도둑골이 있었고, 진주(晋州)에도 도둑골이 있었다. 지금은 관에서 도둑골을 소탕하여 그 곳에 집채 만한 강도 무덤이 있다. 그래서 산청으로 가는 그 고갯길을 천고개라 한다.
 
  「첫날 저녁에 낳은 아이」 
한양조씨가 장가를 갔는데, 신부가 첫날 밤에 아이를 낳았다. 조씨는 해산한 자리를 정리하고는 장모에게 가서 첫날 저녁에 국 한 그릇과 밥 한바가지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했다. 장모가 국과 밥을 챙겨주자 그것을 마누라에게 먹게 했다. 그리고 갓난아이는 통인을 시켜서 다리 밑에 두게 했다. 신행치장(新行治裝)을 해서 가는 도중 다리 밑에서 소리가 난다며 통인에게 가보게 하자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데려다가 부인에게 키우게 하고, 글을 가르쳤는데, 아이 셋을 더 낳아 모두 네 명의 자식을 두었다. 조씨는 어느 날 아이들을 모아두고, 첫날 밤 신부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모두 그냥 키워야 한다고 하는데, 큰 아들은 아이를 버려야 한다고 답했다. 조씨는 큰 아들에게 네가 그렇게 난 자식이라고 말했다. 본래 부모가 다른 자식은 근본도 달라서, 선친을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최경회의 철인」 
1747년(영조 23) 남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가 철인 하나를 건졌는데, 앞면에는 ‘慶尙右道 兵馬節度使印(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萬曆 十三年 月 日造(만력 13년 월 일조)라 새겨져 있었다. 당시 병사 최진한(崔鎭漢)은 이 사실을 조정에 장계로 올리면서 이것이 1593년(선조 26)에 순국한 최경회의 직인이라고 증언하였다.
영조는 이 철인을 보고 몹시 감격해하며 동으로 인갑을 만들고 친히 관인명을 은으로 발라 진주 본영으로 보내며 잘 보관케 하였다. 이후 이 철인은 진주영의 보장물이 되었는데 영중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밤에 울었다고 한다. 1839년(헌종 5) 운주당(運籌堂)이 실화로 불탔을 때 병사가 불에 타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잿더미 속에서 되찾을 수 있었고, 1899년(고종 36) 속칭 환갑(還甲)불이 났을 때도 운주당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철인만은 중건 때 다시 찾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춤추는 허수아비」 
옛날에 판서 벼슬을 한 조씨가 있었다. 하루는 사랑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늙은 스님이 찾아 와 시주를 받으려고 염불을 하였다. 한참 단잠에 들어 있던 조판서는 이 소리에 그만 잠이 달아나 버렸다.
조판서는 하인을 불러 그 동냥중을 당장 내쫓으라고 호령하였다. 늙은 스님은 힘센 하인에게 멱살이 잡혀 대문 밖으로 개처럼 끌려 나갔다. 그러나 쫓겨난 스님은 다시 들어와 또 염불을 하였다. 참지 못한 조판서는 하인에게 죽도록 매질을 하게 했다. 늙은 스님은 겨우 몸을 추슬러 마을을 떠났다.
그 뒤 조판서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늙은 스님이 마을로 다시 찾아왔다. 귀봉산에 올라보니, 조판서가 묻힌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었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있는 묏자리가 지네혈인데, 건너편 소음 마을 쪽 산이 닭혈이고, 그 오른편 동물마을 쪽에 있는 산이 삵갱이혈이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넓은 호수가 걸림돌처럼 가운데 놓여서 닭이 지네를 잡아먹을 수 없고, 닭이 움직이지 않으니 삵갱이가 닭을 잡아먹을 수 없도록 절묘한 균형을 이룬 천하의 명당 자리였다.
늙은 스님은 조판서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해 호수 한 가운데 돌을 던지면 춤을 추는 신기한 허수아비를 세워 놓았다. 호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상한 허수아비를 본 사람들은 허수아비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기 위해 돌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는데, 동네 아이들도 몰려나와 너도나도 호수에 돌을 던졌다.
그렇게 던져진 돌이 차츰 넓은 호수를 메우게 되었다. 넓은 호수가 마침내 다 메워져 평지처럼 되자 천하의 명당자리도 그 힘을 잃었다. 닭혈의 닭이 지네를 잡아먹게 되고 닭이 움직이니 삶갱이가 날뛰는 형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 뒤로 조판서의 가문은 더 이상 번창하지 못하고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충의당 전설」 
진주 촉석루의 위쪽에는 영남 포정사와 진남루가 있는데, 그곳은 하시랑(河侍郞)의 태지(胎地)였다. 옛날에는 거기에 선하당과 공북당이 있었는데, 처음 공북당을 지으려 할 때 낮에는 건물이 지어져 있다가도 이튿날이면 무너졌다. 고을 원이 나졸을 시켜 지켜보게 하자 밤이면 장군 옷을 입은 사람이 군대를 데려와서 자신의 터에 지어진 건물이라며, 집을 부쉈다. 다음날 그 이야기를 들은 고을 원은 잘못을 뉘우치며, 하시랑의 이름을 따서 공북당이라 이름했다. 이후로는 공북당과 선하당을 모두 세워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피난지지를 아는 하동장」 
어떤 선생이 주산 놓기와 육갑을 짚어 모든 것을 알았지만 피난지지를 몰랐다. 어느날 식모가 피난지지를 알려면 마을 하동장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선생은 의심스러웠지만 마을 하동장을 찾아 피난지지를 물어보았다. 하동장은 자기가 피난 가자고 할 때 가야 한다는 말만 하고 가버렸다. 난리가 나자 피난을 가려고, 식구들을 모아 보니 손자의 관상이 살아날 상이었다. 선생이 손자를 데리고 피난을 가려는데, 마을 하동장이 와서 피난을 떠나자고 했다. 하동장은 선생의 몸에 명주로 손자를 묶게 하고, 자신의 뒤만 그대로 따라오라고 했다. 축지법을 하는 하동장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골짜기 밑으로 빈 집이 보였는데, 그 곳이 피난지지였다. 그 집에 들어가 보니 먼저 와 있던 식모가 있었다. 얼마 후 전쟁이 끝나고, 하동장이 돌아가자고 했다. 선생이 하동장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하자, 하동장은 혼자 가서 양반이 되어보겠다고 했다. 하동장은 또 선생에게 의령 우무실로 가라고 하고는 식모를 손자며느리 삼으라고 했다.
하동장은 진주로 가서 양반이 되었고, 선생은 하동장의 말대로 식모를 손자며느리 삼았는데, 식모가 낳은 아이가 바로 의령 우무실 강씨이다.
 
  「핏줄은 제 핏줄」 
어느 부자가 아들이 없어 고민하다 결국 이웃 마을 남자와 자신의 부인을 합방시켜 아들을 얻는다. 아들을 낳아 기르던 부자는 나이가 들어 죽게 되고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 뒤 이상한 꿈을 꾼다.
꿈에 몰골이 형편없고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가 자기 집에 들어와 제사상을 받고, 늦게 온 아버지는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마루에서 방안을 기웃거리다가 음식 냄새도 못 맡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자신의 친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사상을 두 개 차려 두 아버지 모두에게 제사 음식을 먹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하경복의 태몽」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의 어머니 보성선씨는 어느 날 밤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자신의 아들이 반찬거리로 잡혀있으니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부인은 집에 잡아놓은 자라 한 마리가 노인의 아들이라고 여겨 곱게 옷을 입힌 다음 동강에 방생했다.
그리고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다시 나타나 부인에게 구슬 3개를 주면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했는데 그 달에 태기가 있어 하경복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로 인해 하경복의 후손들은 자라를 잡거나 먹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하륜의 영혼」 
하륜은 진성부원군으로 진주에 하향해 살았던 인물이다. 옛날 진주 성내 병영(兵營)에 병사(兵使)만 들어서면 그 날 저녁에 죽어 칠병사(七兵使)가 죽어나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은 담력이 센 한 병사가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있는데, 큰 소리가 나며 대문이 열렸다. 병사가 누구냐고 묻자 하륜이라고 하며, 상담을 하러 찾아왔는데 올 때마다 병사가 죽어 말을 못했다고 했다. 병사가 찾아온 이유를 묻자 자신의 구역 안에 성가신 귀신이 있다고 했는데 누군가 하륜의 묘 밑으로 밀장을 해서 넣었기 때문이었다. 하륜은 이후로도 자주 병사를 찾아왔는데, 병사가 귀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묻자 고추와 목화씨, 소금이라고 알려줬다.
병사는 고추와 목화씨, 소금을 태워 연기를 내서 귀신을 쫓았는데, 하륜은 말로 하면 될 것을 독한 냄새를 피운다며 다시는 오지 않았다.
 
  「해와 달이 된 오뉘」 
옛날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낳지 못해 애태우다가 오누이를 보았는데, 아버지가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남의 집에 벼를 베러 다녔는데, 어느날 밤에 밥을 이고 오다가 여우에게 잡아먹혔다. 여우는 어머니로 둔갑을 해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문을 열고 보니 손과 발에 털이 나 있어서 그 이유를 물었다. 여우는 일을 하고 씻지 못해 그렇다고 대답하고 씻으러 갔다. 여우가 씻고 있는 사이 아이들은 달아나 집 뒤의 나무로 올라갔다. 잠시 후 여우가 아이들을 찾았으나 아이들이 높은 곳에 있어 올라가지 못했다. 여우가 아이들에게 올라가는 방법을 묻자 아이들은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왔다고 했다. 여우는 참기름을 바르고 오르다가 여러 번 떨어졌지만 곧 도끼를 가져와 발집을 내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옥황상제에게 자신들을 살리려면 쇠줄을 내려주고 죽이려면 새끼줄을 내려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쇠줄이 내려와 아이들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여우는 똑같이 빌었으나 썩은 새끼줄이 내려와 떨어져 죽고 말았다.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누이는 해가 되고, 동생은 달이 되었다.
 
  「혈 끊은 산」 
옛날 조선에는 인재가 나면 중국에서 죽였기 때문에 늘 숨겼다. 중국 사람인 도선이 조선을 돌아보니 명지(名地)여서 맥을 많이 잘랐는데, 앉아서 그림을 그려 거기에 붓으로 그으면 실제 산의 혈이 끊어졌다. 도선은 혈을 끊다가 잘못하여 자신의 선산을 끊어 잘못되었다. 지금도 금곡(金谷) 장터에서 사천(泗川)으로 넘어가다 보면 석계리 돌장석이란 곳에 혈 끊긴 산이 있는데, 묘를 써도 효험이 나지 않는다.
 
  「호랑이 이야기」 
어떤 남자가 새끼만 꼬면 된다는 말에 머슴살이를 한다. 그는 하루에 세 발씩 1년 동안 새끼만 꼬았는데, 1년이 다 되자 주인은 새끼를 가지고 머슴과 깊은 산 속에 간다. 깊은 산 속에 도착하자 주인은 머슴을 새끼로 묶어 나무에 매달아 두고는 하산한다. 사람 냄새를 맡은 호랑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남자를 잡아먹으려고 뛰어 오르다가 목이 부러져 죽는다. 강원도의 모든 호랑이가 그렇게 죽고 남자는 호랑이 가죽을 팔아서 부자가 된다.
 
  「호랑이 잡고 노름돈 챙기고」 
한 사람이 노름방 구경을 가서 개평을 얻으려 했지만 허탕만 쳤다. 궁리 끝에 마루 밑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밤에 호랑이가 나타나자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마루 밑에 숨죽이고 있었다. 호랑이는 마루에 앉아 방 안을 노려보았는데, 호랑이의 불알이 마루의 옹이구멍 사이로 쳐졌다. 남자는 호랑이의 불알을 실로 묶고는 실을 기둥에 둘러 힘껏 당겼다. 호랑이의 놀란 소리에 방안의 사람들은 노름돈을 두고 모두 도망쳤다. 날뛰던 호랑이도 죽게 되어 남자는 노름돈도 챙기고 호랑이도 잡아 행복하게 살았다.
 
  「호랑이 잡은 부인」 
옛날 봄철에 한 부인이 태산에 나물 캐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입을 쩌억 벌리고 이 부인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부인은 무서워 치마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부인은 때마침 월경 중이었고, 호랑이는 부인의 궁둥이부터 먹으려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호랑이는 부인이 체념하여 엉덩이를 까니까 생식기 언저리에 빨간 핏물, 빽빽한 털이 나 있어 이상하게 여겼다. 호랑이는 ‘저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하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뒷걸음을 치다가 높은 바위 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호랑이가 없는 이유」 
한 사람이 바위 위에 있는 엄청나게 큰 호랑이에게 먹히었다. 그는 걸림 없이 뱃속 한가운데까지 들어갔다. 그에겐 마침 따개칼이 있었다. 내장을 칼질하니까 호랑이가 아파서 견디지 못했다. 호랑이가 고통을 받으니까, 산중의 다른 호랑이를 닥치는 대로 물어죽이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없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호랑이의 도움으로 잉어를 구한 효자」 
옛날 어느 효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어느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순나물과 잉어 한 마리를 먹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죽순과 잉어를 구하려 했지만 겨울이라 막막했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아들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강가에 가니 얼음 구멍에서 잉어가 뛰어나와 호랑이가 그것을 물어주었다. 아들이 집에 돌아갈 길을 걱정하자 호랑이가 효자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구해 온 잉어를 먹은 아버지는 정신이 돌아왔다.
 
  「호식 당한 중」 
옛날 무남독녀 딸을 가진 양반집 과수댁이 살림은 유복하였지만 딸을 시집보낼 걱정이 많았다. 어느 날 집에 중이 와서 시주 좀 하라고 해서 시주를 많이 하니 소원을 물었다. 소원은 자기 딸을 평안감사에게 시집보내는 일이라고 하자, 스님은 절에 와서 부처님한테 축원을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였다. 스님의 권유대로 부지런히 절에 가서 축원을 하였는데 어느 날 그 절 주지가 그 사정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에 또 그 부인이 예배를 드리는데 주지가 부처님 뒤에 숨어 있다가, 부처님처럼 소리를 내면서 부인이 평안감사 같은 사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니 평안감사 사위 보면 이 딸이 당장 호랑이한테 물려가 죽으니 그 절 주지를 사위로 삼으라고 하였다. 축원을 하던 부인이 고약한 일이라 생각하고 정성이 부족하구나 싶어 아무 소리 안 하고 집으로 돌아가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절에 와 축원을 하니 또 같은 소리가 났다. 이에 망연자실해서 절 마당에 앉아 있는데 주지가 나타나 짐짓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간의 이야기를 모두 하였다. 주지는 틀림없이 그리 해야 한다고 한술 더 떠서 강요를 하면서, 짐꾼에게 궤짝을 지어 보낼 테니 그 안에 딸을 넣어 보내라고 하였다. 정한 날에 짐꾼이 궤짝을 지고 왔기에 할 수 없이 울면서 딸을 궤 안에 넣고 짐꾼에게 지워 보냈다. 짐꾼이 궤짝을 지고 큰길로 가는데 갑자기 진짜 평안감사의 행차가 있었다. 짐꾼이 놀라 지게를 받쳐 놓고 숨어 있으니 감사가 저 멀리 지게에 얹힌 궤에 서기(瑞氣)가 훤하게 비치는데,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게 하였다. 예쁜 처녀가 있다고 하자 나졸들에게 데리고 오라 해서는 감사 앉은 좌석에 같이 나란히 앉히고 가 결국 부부가 되었다. 한편, 처녀가 가고 나자 산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그 궤 안에 대신 들어가 앉았다. 그것도 모르고 짐꾼은 호랑이를 지고 가 주지에게 넘겼고, 주지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무슨 소리가 나도 못 들은 체하라고 주위에 일러두고 궤짝을 열자 호랑이가 튀어나와 주지를 물어 결국 주지가 호식(虎食)이 되고 말았다.
 
  「활인처사 권공지령」 
옛날 어느 재상이 아들, 딸 삼형제를 낳아 길렀는데, 아이들이 다 자라 성혼(成婚)을 하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재상은 부인이 죽고나자 밤마다 심심해서 담뱃대를 두드렸는데, 그것을 본 아들이 새장가를 들여 주자 담뱃대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어느날 재상이 보니 새 부인의 기색에 슬픈 빛이 들었다. 이유를 묻자 부인은 전부인의 제삿날이 다가와서라고 답했다. 재상은 아내에게 돈을 주어 제상을 차리도록 하고, 제삿날이 되어 아들 몰래 제사를 지냈다. 아들이 우연히 지나다가 그것을 보고, 이유를 묻자 지위(紙位)를 보라고 했다. 지위(紙位)를 보니 거기에는 활인처사(活人處士) 권공지령(權公之靈)이라고 적혀 있었다.
 
  「효부이야기」 
옛날에 어떤 부부가 노부모를 봉양하고 있었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이 어려워 남편은 석 달 동안 멀리 다른 곳으로 돈을 벌러 갔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고깃국을 끓여 주지 못해 궁리하다가 지렁이국을 끓여 주었다. 지렁이국을 너무 맛있게 먹은 시어머니는 그 고깃국을 아들이 오면 보여주기 위해 지렁이를 건져 감춰 두었다. 석 달 만에 아들이 돌아와서 어머니를 보자 얼굴이 너무 좋아 보였다.  아들이 왜 그리 얼굴이 좋으냐고 묻자 어머니는 감춰 두었던 지렁이를 보여 주며 며느리가 이것으로 고깃국을 끓여 주었다고 말한다. 꼬물거리는 지렁이를 본 아들은 깜짝 놀라며 ‘거스리(지렁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눈 먼 어머니가 깜짝 놀라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소문이 전해져 며느리는 상까지 받게 되었다.
 
  「효자 아들의 꾀」 
옛날에 어떤 부부가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혼자 아들을 어렵게 키워 장가를 보냈는데 며느리가 어머니를 싫어했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들은 시장에 가서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고는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은 아내에게 어머니를 살이 똥똥하게 찌도록 하여 시장에 내다 팔자고 한다.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과 고기 반찬 등을 잘 해서 먹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자신을 봉양하는 것을 보고는 며느리를 좋아하게 되고 자신의 반지까지 며느리에게 준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느 새 정이 들어 사이가 좋아진다.
이제 살이 많이 올랐으니 어머니를 장에 가서 팔자고 하자 며느리는 부모를 파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결국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이좋게 여생을 같이 지냈다.
 
  「효자 하세희」 
효자 하세희의 호는 석계라고 하기 때문에 그의 정문(旌門)을 석계정문이라고 한다. 하세희는 부모가 돌아가신 뒤 여막(廬幕)을 지어 놓고 삼년시묘(三年侍墓)를 했는데, 시묘를 할 때는 주위의 호랑이들이 효자를 지켜주었다. 어린 시절 하세희는 고을 원 앞에서 글을 지었는데, 맹종(孟宗)이 겨울에 죽순을 꺾었다는 효성을 글제로 ‘인무재맹종(人無再孟宗)’, ‘수부읍동순(誰復泣冬筍)’이라 지었다. 원은 크게 칭찬하고 효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효자 황기원과 호랑이」 
옛날에 집현면 장흥에 황기원(黃基源)이라는 효자가 살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 대한 공양이 극진하여 이웃과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모가 모두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황기원은 변변치 못한 살림 형편 때문에 직접 의원을 모시거나 약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직접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거나 눈 덮인 산속을 헤매며 새와 짐승을 잡고 약초를 캐다가 정성껏 달여서 편찮은 양친에게 올리곤 하였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그 정성이 보통이 아니라며 감탄을 하곤 했다.
병환이 위독해져 마음이 다급할 때면 늦은 밤중이라도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보고 “제 몸을 부모님 대신으로 아프게 해 주십시오. 우리 부모님 어서 빨리 쾌차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다.
어느 날 약초를 구하러 산중에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둠 속에 산길을 더듬어  돌아오는데 호랑이를 만났다. 황기원은 잠시 무서운 느낌이 들었으나 “내가 먼저 해치지 않으면 호랑이도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길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호랑이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소년은 마침내 호랑이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마침내 집에 도착하였다. 더욱 신기한 일은 호랑이가 산삼 두 뿌리를 문간에 놓아두고 사라졌던 것이었다.
 

댓글목록

임금윤님의 댓글

임금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야! 엄청시리 모았구나.
이렇게 나누지 않고 한꺼번에 많이 실으면
공부 잘했던 이태현 회장이나 한번에 다읽고 해석하지
공부가 센찮았던 내같은 분은 읽는 것 만도 큰 사역이다.
우쨌거나 그 와중에 이 많은걸 정리하니라꼬 참으로 욕봤다.
두고두고 잘 읽을께 . 정말로 고맙구나.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금은 잊어버린
이바구가 많지만
우리가 어렸을때
한번씩은 들어 보았지
않았던가 한다.

지금보면 별로 재미가 없는데
우리 어렸던 그 시절에는
이야기라면 왜 그렇게
좋아했고 재미있었는지...
별다른 놀이가 없던 때라
그랬던 것 같다.

이야기를 모으다보니
양이 좀 많은데
복사해서 나누어 보면
편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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