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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7)_壬辰倭亂과 晋州城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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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3-02 17:56 조회8,44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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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진주성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에 대학살의 참극을 빚은 전투로 기록된다. 진주성은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 빛나는 승리의 표상(임진승첩, 壬辰勝捷)인 동시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처절히 항전하다 끝내 순국한 충의의 제단(계사순의, 癸巳殉義)으로 우리 역사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문자 그대로 천험의 요새였다. 성의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 큰강(남강, 南江)이 흐르므로 공성(攻城)이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다. 서쪽 또한 절벽에 의지하였고, 북쪽에는 세 곳의 못(대사지, 大寺池)이 형성한 깊은 늪이 가로 놓였으니 역시 공성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취약지구인 동쪽 방면만 잘 지키면 수성이 가능한 곳이 바로 진주성이었다. 이러한 진주성을 두고 “산에 의지해 성벽 쌓고 강을 둘러 해자(垓字)를 삼으니, 하늘이 지은 험준함은 이보다 나음이 없다”(정경운, 『孤臺日錄(고대일기)』)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겠거니와, 적침을 당했을 때 ‘일면수적(一面受敵)’의 유리한 조건에서 수성전을 펼칠 수 있었던 곳이 진주성이었다. 양차에 걸쳐 치열히 전개된 진주성전투의 바탕에는 이런 견고한 성지(城池)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은 총 30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5월 3일 서울을 점령한 적군은 8도를 분할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이 당시 김해·창원 등 경상도 각처에 주둔한 적군의 총 규모는 5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진주성은 9월 말에 접어들면서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으니 그 이유로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진주는 경상우도의 거진(巨鎭)으로서 본주군(本州軍)이 일대 방어의 중심이 되어 각처 의병과 함께 왜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따라서 적군의 입장에서는 경상도를 완전 장악하기 위해서는 진주성을 함락하여 아군의 방어능력을 분쇄할 필요성이 있었다.
둘째, 당시 전쟁의 전체적 맥락과 관련하여, 진주성이 곡창지대 호남으로 향하는 주요 경로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이다. 때문에, 아군의 입장에서는 진주성을 방어해야만 호남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참기지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거꾸로 적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진주성은 경상우도의 보장(保障)인 동시에 호남의 보장으로서 그 전략적 중요성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고, 그것이 사태의 진전에 따라 전국(戰局)의 초점으로 부각되면서 진주성 공방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1차 진주성전투: 진주대첩]
1592년 9월 24일 김해·부산·동래 등지에서 합세한 왜적 2만~3만여 명이 김해를 떠나 창원으로 진군함으로써 제1차 진주성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적군을 지휘한 주요 장수는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치(木村重玆),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등이었다. 이들은 9월 25일 2대로 나뉘어 노현(露峴)과 안민현(安民峴)을 넘어 들어와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의 군사를 물리치고 9월 27일 창원을 점령하였다. 또 9월 26일부터 함안에 진출하여 이곳에 주둔하며 사방을 분탕하였다. 이후, 10월 1일에는 함안·진주의 경계에 해당하는 부다현(富多峴, 於束峴)을 넘었으며, 10월 2일에는 진주성 동쪽 24리 지점 소촌역(召村驛)까지 진출하였다. 여기서 다시 10월 5일까지 진주성 동쪽 15리 근방 임연대(臨淵臺) 등지로 나아오며 진주성에 접근하였다.
적군이 진주성을 포위하던 당시 진주성 수성군은 목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가 3천7백여 명,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가 1백여 명으로 총 3천8백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金誠一)과 진주목사 김시민의 노력에 힘입어 수성군의 방어능력은 종전보다 크게 신장되었으나 적이 워낙 대군이었으므로 중과부적의 염려를 떨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진주성전투 당시 김시민은 중위장으로서 이광악과 협력하여 군사를 지휘하였고, 진주판관 성수경(成守慶)은 수성의 급소이자 적의 공세가 가장 치열했던 동문을,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은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서 영장(營將) 이눌(李訥)과 함께 적의 공세가 예상되는 구북문(舊北門)을, 율포권관 이찬종(李纘宗)은 남문을 각각 담당하여 방어하였다.
다른 한편, 당시 직접 성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각지에서 외원군(外援軍)이 쇄도하여 승첩을 거두는 데 기여하였다. 동쪽 방면은 윤탁(尹鐸, 삼가의병장), 정언충(鄭彦忠, 초계가장), 심대승(沈大承, 선봉장) 등이, 서쪽 방면은 최경회(崔慶會, 전라우의병장), 임계영(任啓英, 전라좌의병장), 신열(승의장), 정기룡(鄭起龍, 진주한후장) 등이, 남쪽 방면은 조응도(趙凝道, 고성가현령), 정유경(鄭惟敬, 진주복병장), 최강(崔堈, 고성의병장), 이달(李達, 고성의병장) 등이, 북쪽 방면은 김준민(金俊民, 합천가장) 등이 원근에서 호응하였다.
마침내 10월 5일, 적의 선봉 1천여 명이 진주성 동쪽 마현(馬峴)의 북쪽 봉우리에 이르러 형세를 살피며 군세를 과시하였다. 10월 6일 이른 아침, 적이 세 패로 나뉘어 산을 덮으며 내려왔다. 10월 7일 밤, 달이 진 후 적이 수백 보에 달하는 죽편(竹編)을 동문 밖에 몰래 세워 앞을 가린 다음 빈 가마니에 흙을 담아 층층이 쌓아서 언덕(토루, 土壘)을 만들었다.
10월 8일, 적이 죽제(竹梯, 대나무 사다리)를 수천 개나 만들고 3층 산대(山臺)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김시민이 현자총통을 쏘게 하여 세 번 관통하자 왜적이 물러갔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준비하고 성 위에 진천뢰·질려포를 설치하는 한편, 큰 돌덩어리와 자루가 긴 도끼·낫 등을 준비하였다. 또 물을 끓일 수 있도록 성벽의 안(여장, 女墻) 내에 가마솥을 많이 비치하였다. 이 날 밤, 적이 죽편을 많이 설치하여 성에 가까이 다가와서 흙을 점점 더 높이 쌓았다. 두 곳 산대는 4층으로 만들고 전면에 판자를 달아 총 쏘는 곳으로 만들었다.
10월 9일, 적은 총과 활을 종일토록 그치지 않고 쏘았고, 흙을 져 나르는 일을 전보다 더욱 급하게 하였다. 적이 산대에 올라 무수히 총을 쏘았다. 성중에서 현자전(玄字箭)을 세 번 놓으니 죽편을 꿰뚫고 또 큰 판자를 뚫으며, 한 전은 적의 가슴을 뚫어 즉사케 했다. 그 후에는 적이 다시는 감히 산대에 오르지 못하였다.
10월 10일 새벽 2시경, 적은 두 패로 나뉘어 침입하였는데, 만여 명의 한 패가 동문 쪽 성벽에 육박해 들어왔다.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격대(北隔臺)에서, 판관 성수경은 동문 옹성(擁城)에서 사사(射士)를 거느리며 힘써 싸웠다. 혹은 진천뢰·질려포를 놓고, 혹은 큰 돌을 던지고, 혹은 화철(火鐵)을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러이 던지고, 끓인 물을 적에게 들이부었다. 바야흐로 성 동쪽 싸움이 무르익을 때, 또 만여 명 되는 한 떼가 어둠을 틈타 구북문(舊北門) 밖에 이르렀다. 최득량과 이눌·윤사복(尹思復)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며 동문과 같은 방법으로 적을 막았다. 한참 후 동방이 밝으려 할 때 적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이때 김시민이 왼편 이마에 총알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북격대를 지키며 힘써 싸웠다. 진사시(辰巳時: 오전 7시~11시)가 되자 적이 비로소 물러났다.
 
[제2차 진주성전투]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수복에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왜적은 서울까지 밀려나게 되고, 다른 한편 강화를 교섭하여 4월 18일을 기해 서울을 내주고 부산을 향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왜적은 남하와 함께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여 진주성을 공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2월 27일부터 수차례 진주성 공격 내용이 포함된 명령을 하달하였다. 4월 17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보낸 도요토미의 회신에는 “진주성을 공위(攻圍)하여 모조리 토멸하고 그 후에 전라도·경상도를 정복하고 축성(築城)할 것, 한성에 집결한 병력을 인수하여 진주성을 공위하고 축산(築山)으로 압축하여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도살할 것”을 명령하는 등 자못 광기어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왜적이 유독 진주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제1차 진주성전투의 참패에 대한 복수심을 들 수 있다. 즉, 대군을 투입해서라도 기어이 진주성을 함락함으로써 그들의 땅에 떨어진 위신을 되찾고 원한을 풀려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곽재우가 적정을 탐지하여 왜적의 진주성 공격 이유를 “일전에 피살된 원한을 갚으려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는 데에서 확인된다. 또한 실제로 이들이 성을 함락한 후 노약남녀를 막론하고‘한 명도 남김없이’ 잔인무도하게 야만적으로 학살한 사실에 의해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그러나 왜적이 무도한 살인자의 무리에 불과했음을 입증하는 이러한 요인보다 더욱 중요했던 공성의 이유는 역시 진주성이 지녔던 전략적 중요성에서 구할 수 있다. 명군이 개입하던 무렵, 전황은 이미 왜적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과 각처 관·의병의 교란 작전으로 그들의 길어진 후방 보급로가 위협을 받음으로써 군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된 점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책략으로 그들은 안전한 퇴로 확보를 위해 강화 교섭에 나섰던 것이다. 이것이 주효하여 왜적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그들에게는 일종의 안전지대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연해지역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왜적은 아직 조선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므로, 전쟁의 계속적 수행을 위한 방책의 하나로서 곡창지대 호남까지 점령하여 병참기지를 구축하고 이를 발판으로 재차 북상하려는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왜적은‘복수’와 함께 호남 진출을 목적으로 전력을 기울여 진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적군이 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주야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 이미 1593년 1월 말경부터 아군에 의해 탐지되고 있었다. 급기야 6월 15일 약 9만3천여 명에 달하는 왜적이 김해·창원으로부터 대거 수륙으로 병진함으로써 제2차진주성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적군을 지휘한 주요 장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이었다.
왜적은 6월 16일 함안에 들어와 분탕하였고, 6월 18일부터 정진(鼎津)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6월 20일 정진을 건너 의령을 분탕하였다. 6월 21일 왜적이 의령 경내에 충만하고, 점차 진주성 동쪽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와 함께 군사를 단성·삼가 및 남강변 등지로 진출시켜 원군이 이르지 못하도록 진주 일원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휘하의 본주군(本州軍)은 대략 2천4백여명을 상회하는 정도였지만, 수성군의 전체 규모는 경상우도·충청도의 관군과 전라도 의병을 주축으로 대략 6, 7천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하하는 왜적을 따라 조선의 관군·의병과 명군(明軍)도 뒤를 쫓아 내려와 있었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자 최경회(경상우병사), 황진(黃進, 충청병사), 김천일(金千鎰, 창의사), 김준민(金俊民, 거제현령) 등은 진주성에 들어가 수성 태세를 갖추었으나, 곽재우(郭再祐) 등은 입성하지 않고 삼가 등지로 물러났고, 도원수 권율(權慄)은 운봉에 주둔하며 사태를 주시하였다. 또한 명군은 대구에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 남원에 낙상지(駱尙志)·송대빈(宋大斌), 상주에왕필적(王必迪) 등이 각각 머물러 있으면서 조선 조정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원병을 보내지 않고 방관하였다.
이에 따라 진주 수성군은 포위된 이후 성 밖 백리 내에 외원군(外援軍)이 전무한,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외부와의 연락조차 두절되어 버리고, 성이 함락되었어도 진주성 소식을 아군이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극한상황이었다.
6월 21일, 적의 선봉이 진주성 동북쪽 산 위에 나타난 뒤, 6월 22일부터 교전이 시작되어 6월 29일 마침내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왜적은 진주성을 허물어 평지로 만들었다. 성중에 왜적에게 죽은 사람이 6만여 명이었다.
 
[전투의 결과와 승패의 요인]
제1차 진주성전투(1592년 10월 5일~10일)는 3천8백여 명의 병력으로 2, 3만여 명의 적군을 6일 동안의 접전 끝에 물리침으로써 수성에 성공한 빛나는 승리의 기록이다. 승전의 결과, 직접적으로는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의 여러 읍을 보존할 수 있었고, 나아가 곡창지대 호남을 지켜냄으로써 아군의 전쟁 수행능력 유지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당시 수령들이 성을 사지(死地)로 여겨 소수의 적군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던 상황에서 대군을 상대로 ‘각적전성(却敵全城: 적을 물리쳐 성을 온전히 지킴)’에 성공함으로써 능히 성지를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니, 이는 아군의 사기 앙양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대첩을 거둔 원동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수성군의 충실한 방어능력과 감투(敢鬪)정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성군의 주축이었던 진주 본주군은 초유사 김성일이 부임한 이래 경상우도 방어의 중심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이 강화되었다. 또 평소 군민지심(軍民之心)을 얻어 일치단결을 기할 수 있었던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도력은 전력의 향상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방어능력을 바탕으로 천험의 요새에 의지하여 군과 민이 합심하여 힘써 싸움으로써 빛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각처 의병들이 주축이었던 외원군도 승리의 한 요인이 되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 6월 21일~29일)는 중과부적의 불리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적의 대군 앞에 성이 함락된 쓰라린 패전의 기록이다. 전투의 결과, 경상우도는 장수가 흩어지고 인심이 붕궤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일도로서의 모양조차 갖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왜적도 공성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상의 손실을 입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호남 점령의 목표까지는 달성하지 못하였으니, 최경회 등 수성군은 목숨을 바쳐 희생함으로써 호남지역의 보장을 이루었던 것이라 할 만하다.
제2차진주성전투에서 패전한 결정적 요인이 피아간의 엄청난 전력의 차이에 있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적이 거의 전군(全軍)을 들어 9만3천여 명 이상의 대병력으로 쳐들어온 반면, 수성군은 경상우도·충청도의 관군과 전라도 의병을 주축으로 대략 6, 7천 명 정도의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다른 의병을 입성시켜 수성군을 증원하려는 작전명령에 대해 곽재우는 적의 군세를 “천하에 능히 당해낼 수 없는 형세”로 파악하고 도저히 삼리고성(三里孤城)을 지켜낼 수 없으니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입성은 않겠다.”고 하며 강경하게 거부한 바 있다. 그만큼 절대 불리한 형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일·최경회 등은 그러한 형세 속에서도 진주성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특히 호남의 보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굳은 신념으로 사수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버금가는 패전 요인으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을 꼽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왜적이 진주성을 완전 포위한 상태에서 공성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점에서 제1차진주성전투와는 그 상황이 판이하였다. 수성 능력의 한계를 넘는 대군에 직면한 상황일수록 외원군의 역할은 중요하며, 더욱이 외원군이 전무한 상황은 수성군의 사기마저 현저히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명군을 포함한 아군은 왜적이 진주성 공격계획을 사전에 공표하다시피 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도에서 차단하지 못한 채 원거리까지 후퇴하여 소식조차 두절된 상태로 관망하였을 뿐이었고, 외원을 위한 요충지인 의령 정진을 지켜내지도 못하였다. 이 점에서 특히 당시 왜적과 대적할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명군이 공성론(空城論)을 앞세워 시종일관 방관하는 자세를 유지하였던 것이 패전을 초래한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엄청난 전력 차이와 외원군이 전무하였던 상황 속에서도 대략 9일 동안이나 버텨내면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패전에도 불구하고 성을 지키던 진주성 군민(軍民)의 감투정신만큼은 제1차진주성전투에 못지않게 훌륭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점에서 패전에도 불구하고‘명장의사(名將義士)’의‘충절’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댓글목록

임금윤님의 댓글

임금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렇게 호국 시민답게
함께 다 장렬히 전사한 예는
진주성싸움이 전무후무하다.
우리모두 자랑스런후예로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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