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回想] 마나슬루 [Manaslu, 8163m] > 노변정담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노변정담

회상[回想] 마나슬루 [Manaslu, 8163m]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성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8-08-18 10:03 조회5,830회 댓글9건

본문

icon_zoomin.gif icon_zoomout.gif

download.blog?fhandle=MDk3amh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ODAuanBnLnRodW1i&filename=80.jpg


카트만두 북서 120km에 있는 마나슬루 산군의 최고봉이다.


마나슬루(Manaslu․8163m)는 네팔 히말라야의 중앙에 있는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 산의 이름은 산스크리스트어로 ‘마음’, ‘정신’이란 뜻의 ‘마나사(Manasa)’에서 유래된 것으로 ‘정신이 깃든 산’이라 풀이할 수 있다.


이 산의 북쪽면 등반시 거치게 되는 마지막 마을인 사마에서는 이 산을 토지의 수호신이 사는 신성한 지역이라 여겨 외부인의 접근을 금기시 해왔다. 그래서 초등을 노린 일본대는 여러 차례에 걸친 현지 주민의 집요한 방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일본대는 이 마을의 사원 재건비를 내고서야 등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외부인의 접근을 꺼리는 마음은 지금도 남아 있어 이곳을 등반하려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잘 추슬러야 순조롭게 등반을 할 수 있다.


2000년 12월 31일까지 등정자 수는 198명이며 사망자 수는 51명이다. 등정자 수로는 8000m 14좌 중 6번째이며 사망자 수로는 5번째로 많다.


**16명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의 산 **


우리나라는 히말라야 등반 초창기인 1971년 김정섭씨가 조직한 7명의 원정대가 첫발을 내딛었다. 이때까지 국내 히말라야 등반은 1962년 경희대학교의 다울라기리 2봉(7751m) 정찰과 1971년 한국산악회의 추렌히말(7371m) 등반이 전부였다.


김정섭씨는 앞의 두 원정에 모두 참여했으며 1971년 마나슬루 원정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원정대를 꾸린 실세였다. 이후 김정섭씨는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3차례의 마나슬루 원정을 통해 두 동생과 많은 대원들을 잃어 좋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많은 한을 남긴 채 히말라야를 떠나 살게 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 세 번의 원정에서 김정섭씨는 개인적으로 4형제와 1명의 매부까지 참가한 그야말로 전 가족이 다 동원된 등반에서 2명의 동생을 잃는 비운을 맛보고 쓸쓸히 히말라야를 떠나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악계에도 큰 손실이었다.


다음에 이 산을 찾은 팀은 동국대 산악회이다. 이 팀은 1976년부터 세 차례 정찰을 마치고 1980년 봄 이인정 대장을 포함한 7명의 원정대가 네팔로 떠났다. 이 팀은 79년 고려대 산악부의 매킨리 등반에 이어 대학산악부로는 두 번째 원정이었다. 또한 단일팀으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8천미터 봉에 도전한 것이다. 이 팀은 3월 19일에 3800m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한달에 걸쳐 캠프를 올려 4월 22일에는 7500m지점에 설동을 파고 제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공격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다음날 막내인 이종량 대원과 셀파 2명이 정상공격을 하려했으나 강풍과 혹한으로 포기하고 돌아섰다. 이어서 27일 서동환 대원과 셀파 1명이 마지막 캠프를 출발해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역시 강풍으로 포기해야 했다. 이어 다음날 서 대원과 두 명의 셀파가 아침 7시 20분에 마지막 캠프를 출발해 오후 2시경 정상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상등정 후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 하산을 시작한 지 8시간만에 간신히 마지막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동환 대원은 이때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귀국 후 수술까지 받았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세 차례의 원정에서 무려 16명의 생명을 잃으면서도 밟지 못했던 정상의 한을 마침내 풀게 된 것이다. 또한 이 등정은 77년 거국적인 지원을 받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이어 국내 두 번째의 8000m급 등정으로 일개 대학산악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데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댓글목록

서성환님의 댓글

서성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난9일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뒤

문득 28년 전 마나슬루 
정상을 정복한 내 동생   
서동환이 모습이 떠 올랐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왔지만
심한 동상으로 세브란스에서
세차례 피부이식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사업가로 잘 살고있다.

서성환님의 댓글

서성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대박, 우리도 최대장을 앞세우고
          히말라야에 함 도전해보자

          마이도말고 한 2,500m 급으로
          베이스캠푸는1,500 에 설치하자
          그라고
          캠푸까지는 헬리곱타로 간다.

표영현님의 댓글

표영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유난히도 산을 사랑하고 강한 의지와 체력을 가진 벗에게 자랑스런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소!
그형에 그동생이라 정말 축복받은 집안입니다.
 조국의 산 뿐만 아니라 세계의 산을 사랑하는 벗에게 건강과 행운과 영광을 기원합니다.

서성환님의 댓글

서성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최수권 김대규 두 친구와 함께
하루 코-스로는  좀 무리인 듯한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 온 후

 혹시나 하고 인터넷 검색창에
 마나슬루 서동환이라 적었더니
 위 사진과 글이 뜨길래
 옮겨보았습니다.

 80년 봄 어수선한 나라사정으로
 유야 무야 묻히고 말았지만
 내겐 자랑스런 동생입니다.

임금윤님의 댓글

임금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사진속의 서대감이
예사롭지 않더니만
동생의 행적을 통해 보건데
그 서대감 풍채와 행동이
다 뿌리있는 서씨 집안의
오랜 저력이 있었구나.

서성환님의 댓글

서성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미임박께서

우리 집안까지
칭찬을 해주시니
대단히 고맙고 한편
몸 둘바를 모르겠소.

내내 건강하서요.

임금윤님의 댓글

임금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아닐쎄.
서대감 모습이
일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풍채였어!
빈소리가 아니니
몸은 배배 꼬지 않아도 되네.
건강하세나.


copyright © 2017 http://61.105.75.163 All rights reserved.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