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고 사는 계절이 돌아왔지만 - > 노변정담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노변정담

벗고 사는 계절이 돌아왔지만 -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진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08-06 11:23 조회6,828회 댓글2건

본문

                 벗고 사는 계절에

 

TV 에 비친 해수욕장은 젊음과 환희로 가득, 물론 우리가 젊었던 계절에도 그러하였다. 무작위로 부딪쳐 오던 그 부드러운 감촉들을 어찌 잊겠는가? 그리고 불타오르는 여름이라고 했던가? (청춘을 돌려다오)

그런데 . . . . . .

해수욕장에서 그들이 정말로 벗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많은 수의 결실이 맺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세히 보면 정말로 벗은 사람은 가끔 보이는 6살 꼬마 녀석들뿐이었다. 물론, 필수적으로 가려야 하는 부분은 가리고서 총각은 자신의 멋진 근육을, 처녀는 멋진 곡선미를 자랑하겠지만, 그들은 내가 보기에 아직 너무도 많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홀라당 옷을 벗은 때는 언제일까? 물론 국민학교(≠초등학교)시절이다. 지난 해 가을 운동회 때에 입었던 검은 빤스마져 벗어던지고 개울에서 멱감으면서 누구의 방뇨가 더 멀리 가는지 시합을 하던 때이다. 소위 꼬치친구, 죽마고우이다. 그 친구들은 현재에도 내가 아무리 화려한 듯한 옷을 입어도, 아무리 초라한 듯한 옷을 입어도, 그냥 씩 웃으면서, "야, 뻥치지 마라. (까불기는, 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라고 할 뿐이다. 그들은 내가 술 먹고 헛소리를 해도, "원래 그런 녀석"으로 끝날 뿐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 녀석들의 벗은 모습을 다 보았기 때문에 피장파장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은 결함까지도 사랑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성장해가면서 사회는 나에게 자꾸만 옷을 입도록 강요하였고 나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지방에서는 소위 일류고등학교라는 옷을 입어야했고, 어른이 되고 노년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 많은 옷을 쉽게 벗지 못하고 있다. 즉,

그래도 재산이 제법 있는 척 보이는 옷을 입어야 하고,

학식이 깊어서 아는 것이 많은 척 보이는 옷을 입어야 한다.

뿐이겠는가?

그래도 제법 출세를 한 듯 보이는 옷, 나에게도 상당한 빽이 있는 듯이 보이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옷, 늙어 보이지 않도록 염색도 해야 한다.

성인이 된 인간은 상대방의 내부를 모르는 상태에서 매우 친한 척 위선을 부리다가도 상대방이 입었던 옷이 실제로 사라져버리고 내부의 초라한 모습이 노출되어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명되면 인간관계도 금방 끝나버린다. (짜식 뭐 좀 있는 듯이 거들먹거리더만 알고보니 별것 아니더구만, 도움이 안되겠어)

 

내가 다시 옷을 벗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 나이에 우리가 기계체조를 할 수 없듯이 우리의 몸은 이미 경직되었고, 이제 우리의 옷은 옷이 아니라 피부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벗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사고는 70-80년대에 정지하여 변화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제와서 옷을 벗을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벗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이상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혹시 알 수 있나. 내가 어린 시절이 그리워서 미친 척 하고 벗으면 따라서 벗는 녀석이 있을지. . .

댓글목록

문형기님의 댓글

문형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금부터라도 벗는 연습을 해야것다.


아무리 좋은 옷으로 둔갑을 해도
마음의 눈만 뜬다면
가난한 옷자락은 볼 수가 있나이다.

박진원친구 !
가물거리는 기억력이 원망스럽소이다.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친구 사이에는
화려한 옷도 두꺼운 옷도
소용 없다.

친구를 만나는 순간
그 옷은 사라진다.

그래서 만나면 편해지는 것이
친구 아니겠는가?


copyright © 2017 http://61.105.75.163 All rights reserved.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