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지 않는 얼굴 (첫사랑) > 노변정담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노변정담

떠오르지 않는 얼굴 (첫사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01-29 15:15 조회8,017회 댓글2건

본문

 

떠오르지 않는 얼굴(첫사랑)


고향친구인 B로부터 큰아들의 결혼식 청첩장이 며칠 전에 날아들었습니다. 청첩장을 펴보는 순간, 아득한 세월 속에 숨겨져 있던 마법의 비밀보따리가 풀리는 것처럼 나는 가벼운 흥분과 긴장감으로 가슴한구석에서 잔잔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잠을 설치기도 하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내 몰골을 쓸어보며 거실을 서성거리기도 했습니다. 행여나 일렁대는 내 마음이 옆지기에게 들여다보일까 은근히 신경도 쓰였습니다. 한편 B의 청첩장을 동시에 받은 고향꼬치친구들은 나의 참석여부를 짓궂게 물어왔습니다.


“큰처남 잔친데 갈 거지? J는 신랑고모니까 올 거 아냐.”

“상포계장님자격으로 안가시면 써나!”

“가슴 떨린다. 오작교 상봉 나도 봐야지.”


그랬다. 이렇게 을러대고, 바람 잡는 친구들의 집요함이 짜증스럽거나 밉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와 B의 동생인 여고 삼 년생J와의 유별나고 설익은 순정만화를 지켜본 추억의 증인들이니까요. 어쩌면 난 그들의 안주거리가 된 것이 빛바랜 훈장을 끄집어내서 쌓인 먼지를 닦아주는 것처럼 은근히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친구 B와 나는 청년시절부터 고향의 친구들과 상포계(喪布契)를 함께하며 돌아가신 부모형제와 가족들을 고향산천에 모셔주기를 지금까지 해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천방지축이든 시절입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숙부님 댁이 있는 남강하류지역인 정암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시골의 부잣집이라면 정미소와 떡 방앗간, 대농, 그리고 양조장 이였습니다. 시세말로 그들은 지방의 토호세력이었지요. 친구인 B와 J는 남매사이로 기세등등했던 양조장집의 둘째아들, 둘째딸이었습니다. J는 그녀 모친을 빼닮은 외모에 품행과 학교성적까지 우수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습니다. 높은 가세만큼이나 도도하고 비타협적이어서 여성적이기보다는 중성적인 기질이 매력으로 돋보였습니다. 굽히질 않는 콧대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꽃, 직선적이고 전투적인 말씨, 그녀 J의 매력은 부딪쳐 보고 싶은 도전과 모험, 욕망을 가진 촌놈의 승부사기질에 불을 지폈습니다.


나는 그녀의 오빠B의 친구자격으로 양조장출입을 번질나게 했습니다. 남의 눈에 의심받을 것도 없었고 자연히 J그녀와 함께 있는 기회가 많아져갔습니다. 쌀쌀맞고 차갑게만 보였던 그녀는 더운 여름날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호박죽까지 끓여주었습니다. ‘왈가닥 루시’ 라든 J는 의외로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하나둘씩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만이 가진 보석처럼 그 은밀한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B의 방에서 낮잠이 들었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 밑으로 베개를 넣어주었습니다. 놀란 나는 J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얼굴엔 홍조가 일며 싱그럽게 웃고 있었습니다.


근엄하고 완고하기로 소문난 B의 부친은 나와 J의 관계를 눈치 채지 못하고 당신친구인 숙부님의 조카라며 절 너그럽게 대해주셨습니다. 이후부터 나는 험담과 뜬소문이 금세 활개 치는 좁은 시골바닥에서 동화처럼, 만화 같은 전설을(?) 거침없이 연출했습니다. J와 나는 산과 강변길을 거닐기도 하고, 화관(花冠)을 만들어 머리에 꽂아주며 밀어를 속삭였습니다.

방울꽃 꽃시계를 양팔에 끼워주며 우리들의 미래를 언약하기도 했습니다. 네잎클로버 잎을 책장마다 끼워줄 때면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 간직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등하교 길엔 남강 변 제방 십리 길을 자전거로 그녀를 태우고 다녔습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통념상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겁 없는 행동이었지만 망설이거나 두려운 줄을 몰랐습니다. 호시탐탐 그녀를 노렸던 또래의 연적들은(?) 접근도 하지 못한 자신들의 소심함과 용기 없음을 감춘 대신에 연일 입방아를 찢어댔습니다. 두 갈래로 묵은 단발머리소녀, 하얀 칼라교복을 입고 저녁노을 제방 길을 달리는 J와 나의 자전거 풍경을 뭇 남여학생들은 그림 같다며 부러워했습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날개를 달아 미련하고 아둔했던 나를 용감한 흑기사로 포장하여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순수했던 우리의 풋사랑이 채 영글기도 전에 나보다 군 입대가 빠른 친구B의 입영환송파티가 B의 양조장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친구들과 여흥이 무르익을 때 쯤 나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양조장 안방으로 불려갔습니다. 방안엔 친구B의 부모님과 형님내외분, 누님, B와 J가 둘러앉아있었고 나는 험악한 분위기에 눌려 방 가운데 꿇어앉았습니다. 친구B가 입영을 앞두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던 일임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니를 친구조카라서 좋아했는데 못쓰겠네.”

“우리가문에 없던 망신이야. 우째 이런 일이?!”

“동네방네 소문나서 혼인길 막히게 됐어”

“딸년 잘못 가르친 내 탓이야. 머리채 잘라서 학교 보내지 마!”

“죄송합니다. 학교는 보내주십시오.”

“약속해. 앞으로 동네 발들이지 마라!”


이렇게 해서 B의 입대환송파티는 난장판이 됐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B의 부친은 J의 책가방을 양조장 고두밥 찌는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넣어버렸습니다. 결국 J는 부친의 황소고집으로 학교를 한 달 정도 가지 못했고(연금 상태) 학교는 게시판을 통하여 J의 정학처분을 사전경고 효과로 삼았습니다. 사실 나는 못쓸 짓을 하지도 않았고 친구의 가문에 어떤 망신을 안겨줬는지 억울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J가 혼인길이 막히게 되는지도 반감이 생겼습니다. 대가와 책임질 일이라면 당연히 감수하고 내가 데려와 살면 될 일이지 천하의 불한당으로 낙인찍으려는 고압적인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무엇보다 풀죽은 J그녀의 모습과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할머니께서는 ‘새끼 얼굴이 반쪽이야. 아이한테 잔소리 하지 마’ 라고 애꿎은 어머니를 닦달하셨습니다. 덕분에 어머니는 두주 열쇠를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허약해진(?) 손자 몸보신 시켜주라고.  


2주일 후 밤에 나는 다시 정암마을로 숨어들었습니다. 마을입구를 지나 골목길에서 하필이면 J의 모친과 마주쳤습니다. J의 모친은 내 멱살을 잡아 흔들어댔고 상의는 갈기갈기 찢겨졌습니다.


“이늠아 니 죽고 나죽자!”

“다 죽는 꼴 보고 싶나?!”


울화가 극에 달한 J의 모친은 내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나는 친구B를 떠올리며 애써 참았습니다. 왼쪽 볼에 또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J를 생각하며 힘들게 삭였습니다. 세 번째 주먹이 또 날아왔습니다.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가슴엔 불기둥이 솟았습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J의 모친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J의 모친은 ‘사람 살려!’ 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는 논길을 가로질러 제방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J의 모친은 예비군중대장에게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즉각 향토예비군이 비상소집 됐고 이를 알리는 종소리에 마을에는 간첩이 나타났다고 술렁거렸습니다.


장마 끝이라 남강상류의 범람으로 정암마을을 둘러싼 제방은 위험수위였고, 외부통로인 교량은 이미 침수되어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소총으로 무장한 향토예비군들이 횃불을 들고 마을을 뒤지며 제방순찰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뿌스럭거리면 무조건 갈겨버려! 간첩은 독안에 든 쥐’ 라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습니다. 눈에 띠는 순간엔 이유 불문하고 벌집이 될 위기에 처한 나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거센 물살이 두렵기보다는 그날따라 강폭이 더 넓게 보여서 공포심이 몰려와 앞을 보지 않으려고 배영을 했습니다. 하늘에 뿌려둔 조각달과 수많은 별! 조상님과 부모님, 가족들과 친구들의 별이 되어 죽을 곳을 못 찾아 안달하는 처량한 내 꼴을 목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심한 장손(長孫)같으니라고.


일주일이 더 지난 후, 감옥 같은 집안에 갇혀 있는 J를 생각할 때마다 미칠 것만 같은 나는 그녀를 위한답시고 J의 학교로 찾아갔습니다. ‘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가정의 연락만 받고 어떻게 쉽게 정학을 결정하느냐?! 진정한 교육자라면 한번쯤은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부모를 설득해야 되지 않느냐?’ 고 J의 담임선생에게 겁 없이 대들었습니다. 교무실은 수라장이 됐고 수업까지 중단되었습니다. 나는 게시판에 붙은 J의 정학처분공고문까지 찢어버렸습니다. 탱크 같은 내 행동에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교실복도에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던져주었습니다. 경찰서에 연행된 나는 어머님의 은사셨든 교장선생님의 선처로 군입영대기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훈계 방면되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또 정암마을로 잠입했습니다. 그녀의 친구Y는 아침 일찍 J가 물 길러 나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강가에서 물동이를 인 J는 수건으로 잘린 머리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할말을 잃은 나는 처음으로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J의 얼굴은 실루엣처럼 흐리게만 보였습니다. 마침 Y편에 J의 언니가 나를 만나고 싶다기에 일말의 희망을 안고 J의 언니를 찾아갔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돼, 총각은 우리 J 상대가 아니야.”

“꿈도 꾸지 마, 양반 집안체면도 생각해줘.”

"양반이 왜 술장사 합니까?! 두고 봅시다!”


J언니의 몰상식한 언사에 심사가 뒤틀린 나는 적개심과 앙심을 품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뒤숭숭하고 불쾌한 기분을 J를 만나서 돼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동네 꼬마를 과자값으로 매수하여 쪽지를 전달하고 강변제방에서 J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애태우며 그리워했지만 미안하고 고생한다는 위로의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J의 모친과 언니에게서 받은 수모와 복수심 같은 것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습니다.


“이 순간이 불행이나 희망일 수도 있어. 내가 한 행동 책임지고 싶어”.

“강요하지 않아. 십분 여유 줄게. 가고 싶으면 가”.     

“나 안가. 못가!” 오빠 총 맞아 죽는 줄 알았어”.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J는 내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순결, 욕망과 오기가 뒤범벅이 된 채 나는 용암처럼 끓어올랐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나는 제대 후 몇 달 동안을 고향 다방구석에서 술장기와 내기바둑으로 세월을 썩히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 지방은행장 비서실로 발탁되어 세련되고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한 J와 마주쳤습니다. 순간 나는 벼락 맞은 향나무가 되어 몸은 감전되고 굳어버린 채 마음은 새까맣게 제가 되었습니다. 사무쳤던 J의 얼굴이 뿌옇게만 보였습니다. J의 초롱같은 눈동자와 도톰했던 입술, 뾰족했던 콧날도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세월은 물같이 흘러서 15년 전 J의 부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당연히 상포계원의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불참할 이유야 못 만들게 없었지만 J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구실로 삼아 20여년이 훌쩍 지난 J의 모습이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행려를 메고 장례식 끝까지 동참했지만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 가 있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짓궂은 친구들의 흥밋거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애들 중에 닮은 놈(나) 있나 찾아봐라!”

“굴건제복(屈巾祭服) 얻어 써야지.”


솔직히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J그녀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상복에 두건을(?) 눌러 썬 가족들의 얼굴이 누구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J는 나를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내 앞에 나타나주기를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가당찮은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눈 내리던 하산길이 씁쓸했습니다. 8년 전엔 J의 모친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왜 날 간첩으로 내몰았을까? 총알받이가 될 뻔 했는데’ 하는 앙금이 남았던지 조문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도 자식을 키워 결혼시켜 보낼 때 허탈해서 한동안 불면에 시달렸고, 자식을 위한다면 어떤 일도 감내할 오늘날의 부모가 되어보니 J모친의 간절했던 마음이 헤아려졌습니다. 다 안고 가시는 마지막 길이었는데 나는 참 속 비좁고 옹졸한 처신을 했습니다.

     

이런 애증(愛憎)의 사연들이 얽힌 친구B의 아들 결혼청첩장을 받고 나는 며칠동안을 사우나와 이발소를 번갈아가면서 떼 빼고 광낸다며 신경을 썼습니다. 수학여행 떠나는 전야의 학생처럼 밤은 길고 시간도 느렸습니다. 결혼식장인 진주로 출발하는 날 아침, 나는 책상서랍과 앨범 수납장을 뒤적이며 머뭇거렸습니다. 옆지기는 내 기색을 살피면서 하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내가 챙겨뒀던 그녀J의 사진이었습니다.


“이거 찾아요?

“뭔데?”(시침 때고)

“사진 되게 젊더라? 깐돌이 큰엄만지.”

“이게 젊은 거야?! 어릴 때 사진 갖고.”

“못 잊고 있은 거네. 누군지 좋겠다.”


그 당시 고물카메라로(아사이 판텍스) 남강철교 난간에서 내가 찍어주었던 J의 교복사진과 그녀의 아이 때 사진이 빛바랜 앨범 속에 무쳐있어서 이번 기회에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특별한 의미보다는 30여 년 전의 아름다운 추억을 휴지통 버리듯 지우기엔 내인생사의 행적들이 너무 의미 없고 건조해서 껍데기뿐이라는 허무감과 또 J와의 해후에서(?) 지나간 세월의 간극을 어색하지 않게 연결해주는 매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옆지기는 ‘따라 갈까? 한번 보고 싶다’ 라며 어정쩡한 내 반응을 떠보았습니다. 숨겨온 상처가 비수에 찔린 느낌이었습니다.


“가. 심심한데. 첫순이를 봐야지(대범하게).”

“혼자 갔다 와요. 넥타이는 이게 심플해요.”


이럴 경우 오지 말라면 누구라도 기를 쓰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옆지기는 특유의 직관으로 사리를 분별했습니다. 나들이에 여자는 머리도 매만져야하고 패션과 치장에도 신경써야하지만 J와 자신이 비교된다는 긴장감과(?) 나를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됐습니다. 진주톨게이트로 진입할 때 한 친구로부터 속보라며 전화가 왔습니다.


“속보! 발전할 수 있겠어. 축하해.”

“뭐가 또?” 싱거운 사람아!

“J언니는 일찍 과부됐고, 몇 년 전에 J도 사별했대.”


순간, 내 가슴에 못을 박던 J의 언니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사라졌습니다. J자매의 불행이 응어리졌던 내 마음 한 곳에 보복심리가 버무려진 인과응보라는(?) 비열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편에는 ‘아픈 세월을 어떻게 헤쳐 왔을까’ 하는 연민과 원망의 두마음이 내 의식 속에 잠재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나를 떠나간 여인! 내가 잊지 못했던 여인! 그 사람이 나보다 더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세월 따라서도 변함없는 내 진심이었을까를 반문해보았습니다.      


결혼식장을 향해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처음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말은 경어를 써야하나? 어떻게 변했을까? 내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까? 만나자고 하면 응해줄까? 하는 설렘과 궁금증으로 맥박이 점점 빨라지고 얼굴은 화끈거렸습니다. 많은 하객들 틈에 떠밀리며 혼주인 친구B와 축하덕담을 나누웠지만 가식과 건성이었습니다. 그일 이후로 둘 사이에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속마음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B도 내가 온 속내를 순수하게 받아드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친구B를 의식하며 예식장안을 살폈습니다. 그렇지만 J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찾을 수도, 알 수도 없었습니다. J의 사진을 꺼내보며 ‘몽타주’라도 상상해보았지만 39년이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인지 생각할수록 그녀에 대한 이미지와 형상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었습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같은 그림 한 조각이라도 재현해 달라고 모든 신들께(?) 바랐지만 추억은 생생한데 시각적인 기억은 인화(印畵)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고속도로 휴게실 쓰레기통 앞에서 J의 사진봉투를 버려야 하나, 가져갈까를 망설였습니다. 불현듯 결혼식장에서 전화를 걸거나 구내방송을 했더라면 J를 대면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요령을 생각지 못한 자신이 의아했습니다. 아쉽다거나 미련 같은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옆지기 생각을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된장찌개 해뒀는데. 첫사랑 어땠어요?”

“끝사랑 뿐이야!”


몸은 마음같이 따라주지 않고, 의욕과 패기는 간곳없이 포기와 체념으로 움츠려 든 무력했던 일상에서 며칠동안의 탈출이었습니다. 고목나무에 수액이 퍼져 오르고 꽃망울이 돋았습니다. 온몸엔 따뜻한 피가 감돌았고 가슴은 두근거렸으며 주름진 얼굴이 팽팽해지는 기분도 느껴보았습니다.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아직도 내속에 남아있을까? 아듀! 첫사랑.    

                                                              -끝-

 

홈피 새 단장을 위해 헌신해주신 이종원님, 김대규님과 관계자여러분의 노고에 찬사를 드립니다. 1438친구여러분! 해가 바뀌어서 5가 6이 되는 중압감에 위축되지 않으시겠지요?

상황(上皇)으로 밀려나는 세월이 조금은 허전하지만 불명예는 아니랍니다.

나이 들어 함께 할 친구가 있다면 행운이라고 깨닫고 있습니다.

흔히들 미래가 희망이라지만 우리의 과거에도 보석이 묻혀 있습니다.

그 시절 여러분의 환희와 좌절, 성공과 실패. 치열했던 삶의 노하우와 불꽃같았던 열정의 순간들을 반추하시며 새 홈피 인테리어(?)를 위해 공개하시면 어떨까싶네요.

삼류 만화 같은 저의 에피소드를 먼저 올려보았습니다. 유치할지, 어떨지.

                                                                  -




       


댓글목록

김상철님의 댓글

김상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첫사랑,
언제나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진주 중.고등학교 친구들 모두 표현은 하지 않지만 한번의 경험을 했을
귀중한 사랑을 재미나게 글을 쓴 친구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기를.


copyright © 2017 http://61.105.75.163 All rights reserved.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