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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후회. 그리고 아버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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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5-12-30 11:24 조회9,364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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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흘리개 어린시절 저는 제일 부러운 일이 방학동안에 또래의 아이들이 버스타고 외갓집 나들이나 기차타고 여행가는 모습 이였습니다. 커가면서 그것은 수학여행으로 변했고 수염이 나기시작하자 무전여행으로 바뀌었습니다. 해외여행이나 유학은 애초부터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잘난 장손에다 독자라고 할머님께서 과보호 해주신 덕에 개울가에서 수영한번도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할머님의 칭병을 핑계 삼아 군 생활 중에 관보(전보)를 청해 해질녘에 고향집에 도착하니 정말 할머님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천추의 불한당으로 가슴속에 족쇄를 차고 다녔습니다. 그런 세월이 흐른 뒤 식솔을 거느린 입장에서 힘들고 뜻대로 안 되는 세상사를 탓하며 어리석게도 조상님들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간 사람도 없나?”

“복 없는 늠 제사 많다더니 땅이나 물려주시지.”

“귀신 없나요? 딱 한번만 봐주세요.”


말 같잖은 내 푸념을 들으신 시골의 숙모님께서 “귀신 있으면 너희들 안 잡아 간 것만도 다행인줄 알거라.” 든 말씀이 요즈음 두고두고 생각납니다.

이제야 어른이 되려는지 머리가 혼란스럽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 고향선산(先山)을 찾아갑니다. 며칠 전에도 산가마귀가 울어대는 계곡을 따라 휘몰아치는 칼바람을 맞으며 조부님 산소아래쪽을 서성거렸습니다. 마침 몇 마장 건너편에도 어떤 이가 종이를 펴들고 고개를 가우등거리며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다. 산중에서 만난 둘은 금세 동행자가 되었습니다.


“허 참, 모르겠네요.”

“임야 지번 찾으십니까?”

“아니오. 아버님 산소요.”

“작년 에는요?”

“외국 떠돌기 삼십년 만에 왔습니다. 죽일 놈이지요.”

“어딘가에 계실 겁니다. 저보다야 낫습니다. ”

“예?! 형씨는?”

“여기다 뿌렸습니다.”

“멀리 보면 그게 좋지 않을까요?

“마음이 편하질 않아서요.”


20여 년 전 어느 날 의원을 운영하는 친구로부터 아버지의 병세가 CANCER 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종합병원에서도 같은 진단으로 통원치료와 자택가료를 하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만 차마 당신께는 알려 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랬지만 당신은 굳은 의지로 담당 의사를 열심히 찾으셨고 그럴 때마다 저와 의사는 말을 맞추었습니다. 별것 아닌 오래 걸리는 감기라고. 당신은 병원에서 처방해준 소화제와 진통제를 치료약인줄아시고 열심히 복용하셨지만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기력은 쇠잔해갔습니다.

당신께서 또 용하다는 한의원을 직접 찾아 가신다기에 미리연락해서 보약을 지어오시기도 했습니다. 허약해진 체력인지라 투병의지 하나만으로 병원약과 한의원 탕제를 함께 드시며 토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미어지고 당신을 속이는 죄책감으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러시면 서도 계속 약을 복용하시며 고통을 되풀이 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처연했습니다.

장래의 내 모습을 미리 보는 것이라고 가슴을 쓰려 내렸습니다. 참다못한 저는 괴로워서 당신의 자매 두 분 고모님들께 연락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오빠, 좋은 세상이지만 맘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답니다.”

“내가 뭐라고 하든?”

“마음 편하게 자시고 맛있는 거 청해 드세요.”

“그래 잘 먹어마. 감기가 지독해.”

“오빠, 우리 또 올게요.”


두 분 고모님이 가신 후 당신은 바로 식음을 전폐하시고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은 저에게 그동안 모아두셨던 병원 진통제를 던져주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을 당신, 얼마나 자식 놈이 원망스럽고 야속했을까요. 차라리 알려드리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사셨을 아버지였습니다. 좁은 소견으로 저는 당신께서 선진교육을 받은 분이라 생사관에 대한 철학과 죽음에 대한 정리가 대범하고 분명하실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당신을 고향선산에 모시려고 준비하는 와중에 주변에서 ‘중병앓은 주검을 매장하면 후손에게 좋지 않다’는 그 속설에 귀가 쫑긋해져서 제 자식을 위하여 당신을 화장해서 조부님 곁에 뿌렸습니다. 장제에 관한 습속은 시대와 사회관념, 각자의 종교관에 따라 다를지라도 지 자식늠만 생각했던 얄팍한 제 마음속엔 오늘도 천근의 무게가 짓눌려옵니다.


“그 아드님은 대단한 효자겠네요?”

“허허허!!! 글쎄요.”

“다들 키워보셨잖아요. 그렇죠?!”


저는 어릴 적에 아버지로부터 두 번을 회초리로 맞아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번은 동네 방앗간에서 막 끝난 정미기 속의 따스한 싸라기를(?) 꺼내먹다가 들켰을 때이고, 또 한번은 명주이불에 오줌을 싸서 챙이(?) 쓰고 이웃에 소금을 얻어왔을 때 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절 회초리로 때린 후에 안고 팔베개를 해주시며 홍 난파의 ‘울밑에 선 봉선화’ 를 불러주셨습니다. 눈에는 물기도 있었습니다. 왜 아버지께서는 당시 제게 그 노래를 불러주셨는지 한참동안은 몰랐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육신을 찢기며 낳아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이라지만 머리 커지면서 부모의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고 부모는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자식 키워봐라. 그놈이 앙물하면 부모 맘을 알 것이다.” 라고 저에게 체념하시던 당신. 자식늠에게 내몰리기도 전에 벌써 당신의 금언을 새기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소나무가 저 뿐인 줄 알았습니다. 바보같이 제가 밟고 서있던 태산은 아버지 등마루였습니다. 천방지축 삼십 때에 서울 가는 절 불러 세우며 “길 건널 때 차 조심하라.” 시던 모습이 그립습니다.     


세월은 끊어진 연줄처럼 앙상한 가지 끝에 걸렸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새해를 기대해보는 오늘이지만 작금의 세상일들은 양심과 야심, 지성과 잔꾀로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었다가 절망의 나락까지 몰아갑니다. 무엇이 부러워서일까요? 이 혼탁한 세태에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세상의 자식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생전에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요행과 죽어서도 살아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바람으로 아래에 글을 새겨봅니다.

이글은 세상에 항상 돌아다니는 내용입니다. 모든 아버지들이 다 알고 계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입니다만 감히 구슬같이 모아서 꿰매어 보았습니다.

                                                   ***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딸의 학교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상자로 돼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곳(직장)은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말 하시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엄청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닯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제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 때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 때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 때 아빠와 선생님 중에 누가 더 높을까? 12세 때 아빠는 모르는 것이 없고 14세 때 우리 아버지요? 세대차이가 나지요. 25세 때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같습니다. 30세 때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때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 봅시다. 50세 때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 때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자상한 조언(助言)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야 더욱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아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두 배쯤 농도가 진하다. 아버지의 울음은 열배쯤 될 것이다. 아들과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겠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 같은 것을 외우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 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에는 가을과 겨울이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


 
 
 

댓글목록

김상철님의 댓글

김상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우리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고, 생각만 하여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찡하는 존재가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다.
즐거운 새해 맞이하고 가족 모두 건강하기를 바란다.

김평원님의 댓글

김평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작년 10월에 나 또한 아버님을 보냈지만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 였다오.

년말 모임이 서로 바쁜 관계로 신년회로 바뀌었다오.
부재중 전화도 연락못한 실례를 어찌해야할지?

1월 8일 오후 2~3시경 송정 바닷가에서 재부 진주중고1438
합동 신년회 모임이 있을 예정이오.

상세한 일정을 다시 연락드릴 것이니 시간 비워두시게나.

강재우님의 댓글

강재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찡한 마음 가눌길 없는
불려도 대답없는.. 아버지/어머니..
따스한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
이제 손자를 거닐 나이니..
세월무상하오 새해엔 건강들 하시게나
자주들 만나 술한잔 기울고 옛 얘기나 나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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