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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정담

만추(晩秋)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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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5-11-12 01:40 조회8,918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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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엔 바람이 조금 살랑거렸습니다.

새벽잠에 깨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집 앞 공터에 질펀한 연극이 벌어졌습니다.

허황한 가로등 불빛을 조명삼아 관객 한 명 없는 노천무대에서 지늠들 끼리  저마다 이 가을의 주연배우라며 피나게 딩굴고 있었습니다.

얽히고설키고 뭉쳐서 구르기도 하고 성질 급한 늠은 삐쳐서 날아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덩치 큰 놈은 지풀에 꺾여 동강이 나기도 하고  어떤 늠은 고운 때깔 옷이 다 찢겼습니다.

몸서리치는 가을향연을 버티지 못한  제비 같은 한 늠은 창가로 날아와 내게 가을아편을 뿌려대며 동참을 애원했습니다.

난들 감독도 연출자도 아닌 만추무대의 소품과 소도구같은 신세라 늠들보다 더 마음이 공허하고 쓰라렸습니다.

서슬 퍼런 바람이 다른 공연장으로 가버리자 몸살 앓든 배우늠들은 파김치가 되어 업치고 덮쳐서 우아하고 단아했던 자태들은 한 순간에 처참한 모습으로 대접받았습니다.

무심한 청소부아저씨가 은행잎들을 쓸어 담았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가고 말 것을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가?...

책상위에 처분만 기다리는 은행잎과 엑스트라도 못된 위인은 상처받은 추심(秋心)을 서로에게 토로해봅니다.


“서러워마라. 내년이면 넌 또 오잖니?”

“아저씬 안와요?”

“장담 못하지만 오늘 나는 아니거든.”

“모두를 울리고 애태우는 가을, 아저씬 어때요?”

“시뻘겋게 발작하는 산하가 나는 무섭다.”

“아저씨, 가을발정하는구나.”

“쉬잇-, 누가 들을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습니다.

공원 산책로엔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단풍이 마지막 가을 지조를 지키느라 애처롭게 떨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저렇게 바동거리는지....

사람들은 서늘한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만큼 가을의 전설을 새기고 있겠지만 저는 지리산 자락에서 시월의 마지막 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떨리는 가슴으로 그날을 그려봅니다.

40여년 만의 친구들. 세상의 훌륳한 보석이 되어 모여들었지만 저마다 빛깔과 모양, 무게와 크기가 다르니  화려했지만 서먹서먹했습니다.


“누구에게 말을 걸어볼까,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 이런가?,

아니야, 저쪽에도 지들끼리 모여있네 뭐.”


물속의 기름처럼 둥둥 떠 있는 기분일 때 이 명상 회장님이 교가를 선창해줬습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 움켜진 주먹손을 흔들며 그 시절로 빠져들었습니다.

예행연습 없이 불러보는 교가였지만 가사와 멜로디는 정확하게 우렁찬 하머니가 되어 지리산 자락을 뒤흔들며 순식간에 온몸이 뜨거운 전율로 감돌아 목이 메여왔습니다 .

더 악을 쓸수록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현실은 집에 두고, 근심걱정 다 잊고 왔는데 왠지 서러웠습니다.


보아라! 하늘 높이 솟은 지리산.

만고의 푸른빛이 가심이 없다.   

임진의 그 옛날의 남강에 젖은

그 마음 이었노라 젊은 가슴에

배움을 닦아 조국을 지고  나가는

진주중학 탄탄하여라.


저만 바보같이 울먹였던가요? 촌스럽고 주책없이 나이 값도 못하게.....

그렇지는 아닐 겁니다. 얽매인 삶의 틀 속에서 발버둥치며 살아온 세월 속에  마주보는 주름진 얼굴에서  물처럼 흘러가버린 40여년을 ‘앗-하’ 하고 탄식하며 실감했기 때문 아닐까요.

억울해서 , 몸이 아파서, 분하고 서러워서 통곡했던 그런 눈물이 아닌 태고의 신비같이 순수했던 어릴 적 자신의 근원을 찾아낸 회한과 감동 같은 것이었습니다. 모천회귀 본능을 따라 돌아온 연어처럼 말입니다.


순식간에 우리는 융합반응을 일으키며 오랜 세월의 단절을 허물어 버렸고  따뜻한 우정 속에  어릴 적 얄개전 무용담으로 밤을 지새우며 배꼽을 잡았습니다.

진주의 김 천두군은(진주축구협회부회장) 20년 만에 상봉하는 서울 서 성환 군을 위하여 갈치요리를 준비, 지리산 자락에서 가을 특미식을 제공했습니다.

덕분에 밤잠을 설친 서울의 이 태현군은 한적한 곳에서 잠시 사모님과 눈을 부치려다가 진주 허 봉수군의 시달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 너거 이리 와 바라! 태현이 요서 뭐 할라쿤다!”

“봉수 이거는 평생 도움 안 되는 늠잉기라.”

“아요, 하루를 모참아 이라나?!

“니가 내 친구가?!”

“나는 니 땜에 서울대도 못 갔다! 한참 중요한 고삼 때 꼬이가꼬 제주도 한달 도망갔다.”

“니가 정말 친구늠이라면 날 못 가게 말렸어야지. 자슥아!”

“순진한 날 꾀긴 늠이 친구야?! 죽일늠이지.”

“죽어도 지 잘났다고 개다리 털며 대드는 저늠 땜에 담임한테 죽도록 맞았네.”


뿐만 아니라 말 안 듣는 피교육생들(?) 통제에 애를 태운 교관들을 위해 분위기를 잡아준 부산 우 태석군의 명강의(?)는 피가 되고 살이 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압축되었지만 이해는 백배로 빨랐고 상상력은 확대되었습니다. 옆지기는 ‘미개봉 반품’을 지리산 선물로 듣고는 배꼽을 잡고 한참동안을 굴렀습니다. 

 

귀찮고 일 많아서 내 집일도 남의 손을 빌리는 세상입니다.

뜻 깊은 만남을 위하여  물심양면 세세한 부분까지 애써주신 서울의 이 명상 회장님과 이 영백 총무님, 정 용덕 , 강 재우 부총무님께 때늦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진주, 부산의 회장단과 강 기준 원장님, 동기 여러분, 아름다운 가을 소나타로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창원의 유 병영군, 아련한 내 기억들을 새겨주어서 고맙습니다.

자, 우리는 다시 연어처럼 대해(大海)로 나갑시다! 건강하세요!

                                                          -


           







댓글목록

김상철님의 댓글

김상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이균친구는 그냥 말하듯이 글을 편안하게 재미나게 쓰네요.
흩날리는 낙엽들이 등장함은 이제 계절이 가을의 끝자락에
와있나 봅니다.  멋있는 글 잘 읽었고 계속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친구의 건강을 빕니다.

서성환님의 댓글

서성환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과연 작가의 글은 차원이다르네. 그날 천두가 끓여준갈치국을
먹으면서 그 정성에 목이메이고..  축구는 열서너명이 했는데
벌써 저세상 간 친구도 있고 행방이 불명인 친구들...
달랑 네명만 모였으니 이게 우리나이를 말하는가 싶어 참
서글프다. 살아있는 우리라도 건강하게 오래살자. 그리고
천두야! 고맙다.

허종룡님의 댓글

허종룡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그 사람 얼굴은 잊었지만 , 내가슴속에 가을을 남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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