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없으나 보고싶은 이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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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상철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5-07-28 07:08 조회11,6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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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IMES 월요일 신문 ( 7월 25일 )에 ‘한국인들 마지막 황세손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라는 기사가 있었읍니다.
1392년 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씨가 며칠전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장례행렬이 시작되는 사진이 실렸읍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드님인 순종이 즉위하자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Crown Prince)로 책봉했으며, 영친왕과 ‘마사고 나시모도 ( 이방자여사)’의 아드님인
이구씨는 황세손이 되었읍니다.
굴욕의 시기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성장했고, 미국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후
독일계 미국인인 Julia Mullock과 결혼하여 생할했기에 우리말 보다 영어와 일어에
더욱 능숙하다고 하네요.
좌절과 실의에 빠진 수 많은 날들을 보낸 그분은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홀로 생의 막을 내렸고 이틀후에 친척에 의해 발견되엇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만장 (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 )의 깃발은 더욱 쓸쓸히 보였읍니다.
이 신문기사를 읽으며 그리운 기억 하나가 저의 마음을 일깨워 주었으며 친구
이식천의 얼굴이 떠 올랐읍니다. 그러나 이런 글을 쓰도 괜찮나하고 조금 망설였읍니다.
모든 상처가 아물고 이제는 편안히 살아가고 있을 식천이 가족의 가슴에 혹시 새로운
아픔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람이 살다보면 새로운 계기나 방향전환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시간을 갖는 경우가
있읍니다. 식천이도 신세계 백화점을 퇴사하고 지방의 백화점 중역으로 자리를
옮기기전 미국 L.A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며 머무른 적이 있었읍니다.
저희 가족 4명이 L.A 시내의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어렵게 유학생활을 할때 식천이가
처음 저의 거처에 와서 마음이 뭉클하게 하는 따뜻한 말을 해주었읍니다.
‘상철아, 조금 있어보니 미국의 생활이 매우 삭막하던데 니 아파트는 정말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라고. 그때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사람 사는 냄새는 좋은 인간미로
해석했읍니다.
그날 저녁 마시다 조금 남아 있던 ‘잭 다니엘’ 위스키를 꺼내 한잔 하면서 나눈 이야기중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나 이런 말이 기억납니다.
‘나도 옛날에 태어 났으면 조선 황실의 일원인데, 먼 미국땅까지 흘러 왔네’ 라고.
식천이가 전주 이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읍니다.
그리고 며칠후 진주에 계신 아버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잠깐 고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식천이 처가가 대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때 자기 부인이 대구에 있다고 하며
미국에서 건강히 잘 있다는 내용을 꼭 전화로 전달하라 하여 진주에 도착하자 마자
식천이 부인에게 안부 전화를 한적이 있읍니다.
시간이 흘러 고국에 돌아가 백화점 중역을 하던중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왔을때 미국에 사는 우리가 저녁을 사야 한다고 했으나 옛날에 많은 신세를 졌다며
멋있는 식당에서 바닷가재 요리를 한턱 낸적이 있었읍니다.
수도원에 가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묘지의 묘비에 새겨 있다 합니다.
Hodie Mihi, Cras Tibi
(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
내일 혹은 내년에 닥칠지 모르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앞에 간 친구의 뒤를 따라갈 것이 틀림없읍니다.
단지 조금 일찍 가고 뒤에 가는 순서의 차이일뿐이죠.
먼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눈 깜짝할 만한 것이 우리 세상살이 인데.
어릴때 사구 멕인후 유리조각이 묻은 실로써 연날리기 싸움을 많이 했지요.
줄이 끊어져 허공에서 바람부는 대로 연이 떠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었읍니다.
오늘 식천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도는 연이 된듯한 기분이네요.
어릴때부터 장대동에서 보아온 식천이는 의리있고, 사교성 많아 친구들 주위에 많고,
다정다감 했으니까 틀림없이 좋은 곳에서 있으리라 굳게 믿읍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
무더위 잘 견디시기를 바랍니다.
하다’라는 기사가 있었읍니다.
1392년 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씨가 며칠전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장례행렬이 시작되는 사진이 실렸읍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드님인 순종이 즉위하자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Crown Prince)로 책봉했으며, 영친왕과 ‘마사고 나시모도 ( 이방자여사)’의 아드님인
이구씨는 황세손이 되었읍니다.
굴욕의 시기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성장했고, 미국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후
독일계 미국인인 Julia Mullock과 결혼하여 생할했기에 우리말 보다 영어와 일어에
더욱 능숙하다고 하네요.
좌절과 실의에 빠진 수 많은 날들을 보낸 그분은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홀로 생의 막을 내렸고 이틀후에 친척에 의해 발견되엇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만장 (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 )의 깃발은 더욱 쓸쓸히 보였읍니다.
이 신문기사를 읽으며 그리운 기억 하나가 저의 마음을 일깨워 주었으며 친구
이식천의 얼굴이 떠 올랐읍니다. 그러나 이런 글을 쓰도 괜찮나하고 조금 망설였읍니다.
모든 상처가 아물고 이제는 편안히 살아가고 있을 식천이 가족의 가슴에 혹시 새로운
아픔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람이 살다보면 새로운 계기나 방향전환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시간을 갖는 경우가
있읍니다. 식천이도 신세계 백화점을 퇴사하고 지방의 백화점 중역으로 자리를
옮기기전 미국 L.A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며 머무른 적이 있었읍니다.
저희 가족 4명이 L.A 시내의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어렵게 유학생활을 할때 식천이가
처음 저의 거처에 와서 마음이 뭉클하게 하는 따뜻한 말을 해주었읍니다.
‘상철아, 조금 있어보니 미국의 생활이 매우 삭막하던데 니 아파트는 정말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라고. 그때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사람 사는 냄새는 좋은 인간미로
해석했읍니다.
그날 저녁 마시다 조금 남아 있던 ‘잭 다니엘’ 위스키를 꺼내 한잔 하면서 나눈 이야기중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나 이런 말이 기억납니다.
‘나도 옛날에 태어 났으면 조선 황실의 일원인데, 먼 미국땅까지 흘러 왔네’ 라고.
식천이가 전주 이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읍니다.
그리고 며칠후 진주에 계신 아버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잠깐 고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식천이 처가가 대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때 자기 부인이 대구에 있다고 하며
미국에서 건강히 잘 있다는 내용을 꼭 전화로 전달하라 하여 진주에 도착하자 마자
식천이 부인에게 안부 전화를 한적이 있읍니다.
시간이 흘러 고국에 돌아가 백화점 중역을 하던중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왔을때 미국에 사는 우리가 저녁을 사야 한다고 했으나 옛날에 많은 신세를 졌다며
멋있는 식당에서 바닷가재 요리를 한턱 낸적이 있었읍니다.
수도원에 가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묘지의 묘비에 새겨 있다 합니다.
Hodie Mihi, Cras Tibi
(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
내일 혹은 내년에 닥칠지 모르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앞에 간 친구의 뒤를 따라갈 것이 틀림없읍니다.
단지 조금 일찍 가고 뒤에 가는 순서의 차이일뿐이죠.
먼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눈 깜짝할 만한 것이 우리 세상살이 인데.
어릴때 사구 멕인후 유리조각이 묻은 실로써 연날리기 싸움을 많이 했지요.
줄이 끊어져 허공에서 바람부는 대로 연이 떠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었읍니다.
오늘 식천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도는 연이 된듯한 기분이네요.
어릴때부터 장대동에서 보아온 식천이는 의리있고, 사교성 많아 친구들 주위에 많고,
다정다감 했으니까 틀림없이 좋은 곳에서 있으리라 굳게 믿읍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
무더위 잘 견디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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