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母曲(우리들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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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규현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4-09-23 18:36 조회12,739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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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母曲
이글은 나의 어머니에 관한 글이지만 어쩌면 우리 세대의 모든 어머님들의 삶이 라고도 생각되어 졸필이지만 우리 모두의 어머님께 드립니다.
우리 어머니는 6대 종손의 집안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때 사정 들이야 다들 그랬지만 스무살 어린나이에 국민학교 선배였던 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두메라 산골 진주시 금산면 장사리 안심방(안진벵이) 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오죽 두메 산골이었으면 산골짜기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하다 하여 동네 이름이 안심방(안진벵이) 였겠습니까?
면사무소가 십리, 진주가 삼십리.
종가집이라 하여 다른 친척들 보다야 다소 나은 살림살이였지만 워낙이 산골이라 자갈가득한 밭때기 몇평에 억지로 만든 논 몇마지기가 전부인데 제사가 아홉에 철따라 명절이라 찾아오는 손님은 많고 어느것하나 넉넉한게 없었습니다.
층층시하라 위로는 시조모, 시부모님 모시고 시누이 ,시동생 함께한 살림살이는 언제나 가난을 꼬리표처럼 달고다닌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시집 올 때 아홉명이었던 식구는 누나가 태어나고 내가 태어나고 동생들이 태어나니 금방 열둘이 되었고 작은아버님이 장가를 가고 고모들이 시집을 가면 식구가 줄어 들만도 한데
우리집은 항상 열둘이었습니다, 우리가 팔남매가 될 때까지, 우리어머니는 그런분이십니다.
겨울이면 먼지나는 솜타서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무명배 손수짜 열두식구 옷 해 입히고 여름에는 풀베어 모깃불 피워놓고 그래도 달겨드는 모기들 훠이훠이 손사레치며 삼베짜서 잠뱅이 해입힌다고 손끝엔 언제나 굳은살이 박혀있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못하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분이십니다.
그래도 정작 자기는 변변한 외출복 하나없어 시집올 때 해입은 색바랜 남색 치마를 십여년 입고 다녔는데 어느날 빨아 널어 놓은걸 소가 물어뜯어 못입게 되었을 때 그리도 오래 입었음 지겹기도 했으련만 걸레가된 치마 망연자실 쳐다보며 아까워하신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초봄이면 양식이 없어 쑥을 뜯어 밥해먹고 겨울에는 없이지낼 봄 생각하여 무채 썰어 밥해먹는데 위에 얹은 쌀 한움큼은 시아버지 몫이었고 차례대로 퍼다보면 정작 남는 것은 쑥과 무가 절반이라, 그래도 무밥은 소화가 잘된다고 근기없는 밥 간장에 비벼 맛있게 드시던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어머니들은 생선 대가리나 꼬리를 좋아하신다고 하는데.... 많은식구 건사덕에 숯불에 노릿하게 구운 생선대가리는 아버님 차지라, 어머님은 꼬리마져도 차지가없어 생선냄새 맡아가며 꽁보리밥에 김치 한조각 꾸역꾸역 밀어넣어시며 잘도 소화를 시키시던 우리 어머니는 그런분이십니다.
한여름 자갈 주워가며 콩밭 맬땐 고단함이 땀이되어 흘러내리면 삼베적삼 수건삼아 쓱-한번 문지르고 중천에뜬 해 쳐다보며 한고랑이라도 더맬 욕심에 아픈허리 일으켜 휘적휘적 손길은 더욱 빨라지고 점심지을 시간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시원찮은 아침밥에 허리가 접치고
쉰 보리밥 찬물에 헹궈 훌훌들이키곤 점심으로 때우셨던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쑥떡배 짜서 교복 해입힌다고 어눌한 솜씨로 교복바지 만들었는데 해마다 해 입힐 여유없어 바지가랭이가 허리통만하고 허리는 강호동이 입으면 맞을 정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도 싫어 하지 않고 입고 다닌 자식위해 까만새벽 일어 나셔 성냥 한개피 아까워 화로에서 숯불한톨 건져올려 갈비얹어 호호불어 아궁이에 불지펴 청솔가지 꺾어 넣어 보리쌀이 절반도 넘는 밥지을땐 고단함이 눈물되어 됫박이나 흘렀어도 그래도 그건 연기때문이라고 얼버무린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진주라 삼십리. 멀기도 한데, 이틀, 이레 진주 장날에는 장보러 간답시고 무거운짐 머리에 이고 장에가서 반쯤은 팔고 반쯤은 그냥주고 고등어 한손사고 팔남매 신발사서 돌아오는길,십오원 버스비 아까워 말티고개넘어 삼십리 걸어 오면 노루꼬리만한 겨울해는 벌써 까만 밤이되었고 휴---내뱉는 한숨소리는 열두식구의 무게만큼 무거웠습니다.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한평반도 안되는 작은방, 뚜꺼운 솜이불 하나에 다섯명 누운 자식들은 부채살이되고 정작 누울자리없어 자신은 문풍지되어 엄동설한의 북풍을 온몸으로 막아내니 차라리 언몸 일으켜 일함이 편할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내가 고등학교에 시험본다고 예비소집 하는날 전날내린 눈으로 질퍽한 교정 걸어가며 까마귀떼 처럼 까맣게 몰려드는 학생들에 기가 질릴만도한데 아무런 내색않고 그져 자식 얼굴 믿음으로 쳐다보며 없는 살림에 논밭팔아 자식공부시킬 걱정하시고 대학교에 들어갔을땐 학비 걱정에 교육대학에 가지않는다고 야단치시던 아버님을 조금 덜쓰고 덜입고 밀어주자고 아버님을 말리시던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장남을 월남전에 보내고 밤잠을 이
이글은 나의 어머니에 관한 글이지만 어쩌면 우리 세대의 모든 어머님들의 삶이 라고도 생각되어 졸필이지만 우리 모두의 어머님께 드립니다.
우리 어머니는 6대 종손의 집안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때 사정 들이야 다들 그랬지만 스무살 어린나이에 국민학교 선배였던 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두메라 산골 진주시 금산면 장사리 안심방(안진벵이) 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오죽 두메 산골이었으면 산골짜기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하다 하여 동네 이름이 안심방(안진벵이) 였겠습니까?
면사무소가 십리, 진주가 삼십리.
종가집이라 하여 다른 친척들 보다야 다소 나은 살림살이였지만 워낙이 산골이라 자갈가득한 밭때기 몇평에 억지로 만든 논 몇마지기가 전부인데 제사가 아홉에 철따라 명절이라 찾아오는 손님은 많고 어느것하나 넉넉한게 없었습니다.
층층시하라 위로는 시조모, 시부모님 모시고 시누이 ,시동생 함께한 살림살이는 언제나 가난을 꼬리표처럼 달고다닌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시집 올 때 아홉명이었던 식구는 누나가 태어나고 내가 태어나고 동생들이 태어나니 금방 열둘이 되었고 작은아버님이 장가를 가고 고모들이 시집을 가면 식구가 줄어 들만도 한데
우리집은 항상 열둘이었습니다, 우리가 팔남매가 될 때까지, 우리어머니는 그런분이십니다.
겨울이면 먼지나는 솜타서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무명배 손수짜 열두식구 옷 해 입히고 여름에는 풀베어 모깃불 피워놓고 그래도 달겨드는 모기들 훠이훠이 손사레치며 삼베짜서 잠뱅이 해입힌다고 손끝엔 언제나 굳은살이 박혀있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못하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분이십니다.
그래도 정작 자기는 변변한 외출복 하나없어 시집올 때 해입은 색바랜 남색 치마를 십여년 입고 다녔는데 어느날 빨아 널어 놓은걸 소가 물어뜯어 못입게 되었을 때 그리도 오래 입었음 지겹기도 했으련만 걸레가된 치마 망연자실 쳐다보며 아까워하신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초봄이면 양식이 없어 쑥을 뜯어 밥해먹고 겨울에는 없이지낼 봄 생각하여 무채 썰어 밥해먹는데 위에 얹은 쌀 한움큼은 시아버지 몫이었고 차례대로 퍼다보면 정작 남는 것은 쑥과 무가 절반이라, 그래도 무밥은 소화가 잘된다고 근기없는 밥 간장에 비벼 맛있게 드시던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어머니들은 생선 대가리나 꼬리를 좋아하신다고 하는데.... 많은식구 건사덕에 숯불에 노릿하게 구운 생선대가리는 아버님 차지라, 어머님은 꼬리마져도 차지가없어 생선냄새 맡아가며 꽁보리밥에 김치 한조각 꾸역꾸역 밀어넣어시며 잘도 소화를 시키시던 우리 어머니는 그런분이십니다.
한여름 자갈 주워가며 콩밭 맬땐 고단함이 땀이되어 흘러내리면 삼베적삼 수건삼아 쓱-한번 문지르고 중천에뜬 해 쳐다보며 한고랑이라도 더맬 욕심에 아픈허리 일으켜 휘적휘적 손길은 더욱 빨라지고 점심지을 시간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시원찮은 아침밥에 허리가 접치고
쉰 보리밥 찬물에 헹궈 훌훌들이키곤 점심으로 때우셨던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쑥떡배 짜서 교복 해입힌다고 어눌한 솜씨로 교복바지 만들었는데 해마다 해 입힐 여유없어 바지가랭이가 허리통만하고 허리는 강호동이 입으면 맞을 정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도 싫어 하지 않고 입고 다닌 자식위해 까만새벽 일어 나셔 성냥 한개피 아까워 화로에서 숯불한톨 건져올려 갈비얹어 호호불어 아궁이에 불지펴 청솔가지 꺾어 넣어 보리쌀이 절반도 넘는 밥지을땐 고단함이 눈물되어 됫박이나 흘렀어도 그래도 그건 연기때문이라고 얼버무린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진주라 삼십리. 멀기도 한데, 이틀, 이레 진주 장날에는 장보러 간답시고 무거운짐 머리에 이고 장에가서 반쯤은 팔고 반쯤은 그냥주고 고등어 한손사고 팔남매 신발사서 돌아오는길,십오원 버스비 아까워 말티고개넘어 삼십리 걸어 오면 노루꼬리만한 겨울해는 벌써 까만 밤이되었고 휴---내뱉는 한숨소리는 열두식구의 무게만큼 무거웠습니다.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한평반도 안되는 작은방, 뚜꺼운 솜이불 하나에 다섯명 누운 자식들은 부채살이되고 정작 누울자리없어 자신은 문풍지되어 엄동설한의 북풍을 온몸으로 막아내니 차라리 언몸 일으켜 일함이 편할 우리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내가 고등학교에 시험본다고 예비소집 하는날 전날내린 눈으로 질퍽한 교정 걸어가며 까마귀떼 처럼 까맣게 몰려드는 학생들에 기가 질릴만도한데 아무런 내색않고 그져 자식 얼굴 믿음으로 쳐다보며 없는 살림에 논밭팔아 자식공부시킬 걱정하시고 대학교에 들어갔을땐 학비 걱정에 교육대학에 가지않는다고 야단치시던 아버님을 조금 덜쓰고 덜입고 밀어주자고 아버님을 말리시던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십니다.
장남을 월남전에 보내고 밤잠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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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교님의 댓글
김삼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장규현동기! 훌륭하십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다 그랬으나, 장규현 동기 어머님의 인생을
한폭의 그림으로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
요즈음도 시골에 계신지요?
살아계실때 효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장규현 동기의 용기에도 찬사를 보냅니다.
소주 한잔 생각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삼교 올림
장규현님의 댓글
장규현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김삼교 동문!
끝까지 읽어 주시고 댓글 까지 올려주셔 감사합니다.
부산에 동생이 살고 있는 옆에 아파트를 사드렸는데 시골에 남
동생(외삼촌)계시고 여동생(이모)계시고 시동생이 계시니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부산에 계시는 세월보다 진주에 계시는 시간이 더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