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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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홍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6-27 15:16 조회10,7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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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항일정신이 깃든 전통 한옥마을 -네이버 백과
전주시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걸쳐 700여 채의 한옥으로 이루어진 전주 한옥마을은 1977년 한옥마을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우리 전통의 가옥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한옥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930년대로,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가 생기면서 전주부성이 허물어지자 서문 밖 천민 거주지역에 모여 살던 일본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 상권을 형성하여 세력이 커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한옥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오목대에 올라 한옥마을 전경을 굽어보면 회색의 빌딩과 적산 가옥이 둘러싼 가운데에 팔작지붕에 검은 기와가 멋스러운 한옥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둥그레당실 ♬ (play click)
♣ 오목대 부근에서 조망하는 전주한옥마을 전경
♣ 거리 풍경과 맵시 있는 한옥들
♣ 경기전 입구의 여름화단
♣ 경기전(慶基殿)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네이버백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등의 유적이 있다. 1442년(세종 24)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불렀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있으며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 풍남문(豊南門)
풍남문-네이버백과
전주부성(全州府城) 4대문 중 남문(南門)으로,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다. 1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99.27㎡), 2층은 정면 3칸, 측면 1칸(39.45㎡)의 중층문루(重層門樓)에 팔작지붕이다. 전주부성은 고려 말 도관찰사(都觀察使) 최유경(崔有慶)이 축성하였다는 내용이 1734년(영조 10)에 이 부성을 대수축(大修築)한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의 기록에 보인다.
수축 당시 남문은 3층 문루(門樓)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부르고, 동·서·북문은 2층으로서 각각 판동문(判東門)·상서문(相西門)·중차문(中車門)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한다. 그 뒤 1767년의 대화재로 남·서 두 문이 소실되자, 이해 9월에 도임(到任)한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이 중건하여 풍남문·패서문이라 이름을 지었다.
풍남문 양측에는 포루(砲樓)와 종각(鐘閣)이 있었다 하는데, 1980년 정비공사에서 옹성(甕城)과 함께 복원되었다. 이 문은 화강암으로 문루를 쌓고 기부(基部)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는 2층 문루를 올려세웠다. 2층루의 남면에 ‘豐南門’이라는 편액이, 북쪽에는 ‘湖南第一城(호남제일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편액의 글씨는 1842년(헌종 8)에 부임한 감사(監司) 서기순(徐箕淳)이 쓴 것이라 한다.
♣ 전동성당(殿洞聖堂)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네이버백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전동성당은 호남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순교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영화 「약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텅 빈 성당에서 슬픈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성당 내부의 둥근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우며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외관과 중앙 종탑을 중심으로 작은 종탑들을 배치한 상부의 조화로 웅장함이 느껴진다. 성당 앞의 하얀 그리스도상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한국 최초 순교터’ 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 전주향교(全州鄕校)
전주향교(全州鄕校)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향교는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세워지자 1410년(태종 10) 향교에서 경기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여 전주성의 서쪽 6·7리 되는 황화대 아래 현재의 화산동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이 향교에는 여러 훌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7호)을 비롯해 동무·서무, 계성사,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인 명륜당 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전국 향교 중 유일하게 공자 ·맹자 ·증자 ·안자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한 계성사(啓聖祠)가 있고, 대성전 ·동무(東廡) ·서무(西廡)에 51선현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또 장판각(藏板閣)에는 《주자대전》 《성리대전》 《사기평림(史記評林)》 등 9,600여 점의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우리의 옛 교육시설을 둘러 볼 수 있는 이곳은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기능은 없어졌다. 그러나 봄·가을에 공자께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는 향을 피우고 있다.수령 250~400년된 거대한 보호수(은행나무) 다섯그루가 저마다 전설을 안고 있으며,가을이면 단풍이 장관을 이룬다.-네이버 발췌
♣ 차창너머 밤꽃향(공주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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