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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수필> 일러무삼 구자운의 가계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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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자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9-21 06:47 조회9,3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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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무삼 구자운의 가계 내력



나는 1224년(고려 고종11년) 송나라에서 신안 주씨 시조 주잠의 시종관으로 따라온 具存裕의 27대손이다.

시조 할아버지의 함자는 부유하게 존재해 있음을 갖추었음으로 그야말로 시조에 아주 적격한 이름이다.

시조 할아버지는 주잠의 따님과 결혼했기에 우리 綾城 具家는 신안 주씨와 결혼하지 못한다.

나는 도원수파(파조 具成老)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인 而栗 具致寬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조선시대 청백리는 임진왜란 이후엔 남발하였기에 알아주지 않고 그 이전을 알아주는데, 이율 할아버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지낸 양반이 돌아갔는데 장례비용이 없었으니 알조 아닌가.

이율 할아버지는 계유정란에 가담한 세조공신이며, 세조는 늘 ‘능성은 나의 만리장성이니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두터운 신임을 나타냈다.

이율 할아버지는 신숙주 바로 다음에 영의정에 올랐는데, 세조와 신숙주와 셋이서 나눈 다음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율 할아버지와 신숙주와의 사이가 불편한 것을 안 세조는 어느 날 하루 둘을 불러 화해시켜 주려고 술을 내면서 임금의 물음에 틀리면 벌주를 마셔야한다고 엄포를 놓으며,

먼저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나는 舊 정승을 불렀다며 구치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이번에는 신 정승! 하고 부르니 신숙주가 예! 하고 대답하자,

나는 新 정승을 불렀으니 틀렸다며 신숙주에게 술을 권했다.

벌주를 다 마시고 난 뒤 세조가 다시 구 정승! 하자 이번엔 신숙주가 예! 하니,

나는 具 정승을 부른 것이라며 신숙주에게 술을 먹이고,

또다시 신 정승! 하고 부르니 구치관이 예! 하자 申 정승이라며,

구치관에게 벌주를 마시게 하여 하루 종일 마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성 단본에 단 항렬로 LG 구본무 회장이 나의 조카뻘이다.

 

참고로 우리의 항렬을 열거하면,

喜(22대)祖然書會滋本謨敎祐齊林熙圭鍾洙相燮均鎭泳根炳重庚澤樂煥起宰(51대)

이다. 


우리 신산(승산 : 지수에 있는 산 이름) 구가는 약 320년 전(숙종 때)에 나의 9대조 省齋公 具槃 할아버지가 신산 허씨(김해 허씨)와 결혼해 살면서 부터이다.

우리가 지수에 오게 된 동기는 나의 10대조 禮谷 具文游 할아버지가 고령 현감으로 있으면서 여름휴가 때 과거급제 동기인 김해 부사를 만나러 말을 타고 가다가 지수에서 한밤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날 밤 대추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사는 허 부잣집에서 자면서 서로 사돈 맺기로 약조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구반 할아버지는 예곡 할아버지의 둘째아들로서, 몸이 허약하여 일찍 세상을 떴는데, 예곡 할아버지가 翊贊벼슬을 하며 세자를 호위하고 있을 때라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므로 지수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궁 묏자리 보는 지관을 내려 보내 묏자리를 봤기에 下嶺南(안동이남) 일대에서는 최고 명당이다.

구반 할아버지의 묏자리는 지수면 압사리 지수초등학교(옛날 송정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데,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으로 여의주 3개중 가운데에 해당하는 동그란 동산의 꼭대기에 구반 할아버지 묘 하나뿐이므로, 시사 모실 때 수백 아니 수천 명도 온 사방 360도에서 엎드려 절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사 때는 돼지를 잡는 것이 아니고 소를 잡는데, 그 돈은 LG에서 부담한다.


경상좌도(지금의 경상북도에 해당) 사람들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이고, 경상우도(지금의 경상남도에 해당) 사람들 역시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인데, 동인 중 특히 북인은 벼슬을 마다하고, 누가 시켜 주지도 않았지만,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읽는, 즉 주경야독하는 산림학파에 속한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들이 서인이며 인조의 어머니가 우리 구가고,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어머니가 우리 구가라서, 우리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이다.

그래서 LG 창업주 具仁會의 할아버지 具然鎬가 조선 말엽에 홍문관 교리 벼슬을 하였는데, 북인들이 대부분인 진주 향교에서 초시를 보지 않고, 다짜고짜 족보를 싸들고 예곡 할아버지의 큰아들 후손들이 살던 청와대 앞 효자동으로 막 바로 찾아가서 무료 기숙하면서 5년간 공부하여 과거에 대과급제하였다.


참고로 조선시대 과거의 대과에 대하여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초시(제1차 시험) ;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하고, 생원 진사 성균관 유생 중에서 340명을 합격시킴

복시(제2차 시험) ; 서울에서 실시하고, 초시 합격자 중에서 33명을 합격시킴

갑과 ; 3명, 을과 ; 7명, 병과 ; 23명

갑과 1등을 장원랑, 2등을 방안랑, 3등을 탐화랑이라 하고,

홍색의 종이에 성명과 갑과·을과·병과의 구분 등을 기입하고, 연·월·일의 연 밑에 어보를 찍은 홍패를 주었음.


나의 할아버지는 具英書로 성년이 될 때까지 서당에서 공부하였으나 조선이 패망하여 결국 과거를 보지 못하였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묘소는 남해안고속도로 남강휴게소에서 방어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중턱에 있는데, 지방 풍수가 봐준 묏자리 치고는 꽤 괜찮은 명당으로, 후손 중에 당상관(지금으로 치면 5급 이상)이 2명 나온다고 하였다.

실제로 나의 재종형 구자경은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기 바로 직전 마지막 진양 군수(4급)를 지냈고, 나는 산림청 과장(4급 연구관)을 역임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具鍾會로 서울대학교 농대 임학과를 나와 진주농고 임업과 선생을 하였다.


일러무삼 具滋雲은 경상대학교 임학과를 나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석사와 충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를 취득하였다.

내가 태어난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 평촌부락(들말)은 20호 정도의 크기로, 약 400년 된 팽나무(포구나무)가 마을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봐서 임진왜란 직후에 형성된 유서 깊은 동넨데, 마을이 생기고 나서 내가 맨 처음으로 198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로 林業을 하였으며, 1977년부터 2008년까지 32년간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에서 봉직하였고,

지금은 詩作에만 몰두하고 있다.

나의 詩才는 예곡 할아버지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다. 예곡 할아버지는 그 당시에 75세까지 장수하였으며, 詩에 能하였다.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 있는 신산 구가 재실 滄江亭에 예곡 할아버지의 文集 板木이 소장되어 있다.

나의 문집으로는 木園詩集Ⅰ~Ⅴ 5권이 상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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