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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외로운 섬 소록도를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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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용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1-20 22:00 조회6,78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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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 가는 길          -한 하 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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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의 해라고 모두들 올해는 기필코 행운이 올거라고 믿는

임진년 새해를 맞이 한지도 벌써 2주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몇몇 친구들과 함께 1박2일 동안 2013년 세계 정원 박람회가 열리는 순천만과

2012년 세계 엑스포가 열리는 여수,

아직도 일제의 잔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는

민족의 애환이 서린  외로운 섬 소록도와

 

최근에 연육교 인 거금대교가 놓여 육지와 한층 더 가까워진

우리나라 10번째로 큰 섬 거금도 

 

광양에서 여수를 가로 지르는 이순신 대교 건설 현장을 둘러 보고 왔습니다.

 

벌써 여러번 다녀 온 낯 익은 곳이지만

이번 방문은 저에게 새로운 것을 느끼게 한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2012년 5월12일부터 8월12일까지 4개월에 걸쳐 열리는

2012 여수 세계 엑스포 건설현장에서 웅비하는 여수의 역동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금년들어 최고의 추위라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메인 행사장에서는

강추위도 잊은 채 건설의 기계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여수의 어느 남루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주인인 노파 부부에게 이번 엑스포로

여수의 발전을 20년은 앞당기겠다고 하니까

노파부부는 여수 시민들은 30년은 앞당길수 있다는

자긍심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있고

 

내달부터는 행사 진행 리허설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시민들까지 모두가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여수의 세계 엑스포가 성공하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양에서 여수로 가로 지르는 동양 최대의 높이로 건설된다는

이순신 대교의 건설현장에서는

또 한번 웅비하는 호남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 같아

상대적으로  박탈감이랄까 약간의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진주는 r깊은 잠이라도 자는 듯

너무나 고요했기 때문입니다.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흑룡의 해인 임진년에도

우리 동기님들께서는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소원 성취하시길 빕니다.  

 

* 이순신 대교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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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대교에 대한  개요입니다.

[개요]
- 위치 : 전남 여수시 묘도동 ~ 광양시 금호동 현수교
- 국내 최대 규모,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능가하는 초대형 세계 4위 현수교
- 여수세계 박람회가 열리는 2012년 4월까지 준공 목표

[건설개요]
- 왕복 4차로
- 총연장(교량길이)은 양쪽 측경간장 길이 715m(357.5m×2)를 포함 2,260m
- 주탑과 주탑 사이 주경간장 길이는 1,545m, 세계 4위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년인 1,545년을 기념해 주경간장 길이를 1,545m로 설계
- 양쪽 주탑의 높이는 덴마크의 그레이트 벨트교(해발 254m) 보다 높은
   세계 최고 규모인 해발 270m
- 세계로 도약하는 해양한국의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탑의 비례적 형상으로 디자인

 

 
 
 
 
 
 
 
 
 
 
 
 
 
 
 
 
 
 
 
 
 
 
 
 
 
 
 
 
 
 
 
 
 
 
 
 
 
 
 
 
 
 
  * 소록도 이야기(옮긴 글)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 아닌 듯
사뭇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목사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저에게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
그 아이가 열 한 살 때였지요"
"......"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세째, 네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 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 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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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먼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 거금도는?

 

작은 섬 소록도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소록도보다 스무 배나 큰 거금도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록도 바로 밑에 손에 닿을 듯 한 거리에 있는 거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열번 째로 큰 섬이다. 인구도 5000여명으로 요즘으로 치면 웬만한 면단위를 능가하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고향이 고흥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구체적으로 거금도라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드물고, 명창 동초 김연수의 고향이 거금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거금도가 외부에 알려진 것은 김일 선수의 덕이 크다.

김일의 고향 사랑은 남달랐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에피스드는 유명하다.

1968년 어느 날 세계 타이틀을 획득하고 귀국한 김일을 박 대통령이 불렀다.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소원을 묻자 김일은 주저없이 “고향 마을에 전기를 넣어 달라”고 요청했고 곧바로 섬에 전기가 들어왔다.

내륙인 녹동보다 전기가 먼저 들어 온 섬에 대한 주민들의 자긍심은 지금까지도 대단하다.

국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동초 선생도 거금도의 자랑이다.

그는 동편제의 우람함과 서편제의 애잔함을 융합한 ‘동초제’를 창시했다. 판소리에다 연희(演戱)적인 요소를 가미한 ‘창극 판소리’ 창법을 만든 이도 동초다.

아름다운 풍경과 김을 비롯한 풍부한 해산물은 거금도의 매력을 더한다.

 2.4㎞의 은빛 모래가 펼쳐진 익금해수욕장과 팔영산 다음으로 높다는 적대봉에 오르면 제주도가 눈 앞에 펼쳐진다.

북 칼럼리스트 최보기씨는 최근 출간한 ‘거금도 연가’에서 고향에서 보낸 유년의 추억을 생생하게 엮어냈다.

거금도에 빅이벤트 2개가 연달아 열리면서 주민들이 들떠있다.

2011년 12월 16일 거금대교가 9년만에 개통되고 17일에는 김일기념체육관이 문을 연다.

관광객에겐 숨겨진 거금도의 속살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주민들은 섬 생활에 따른 불편이 사라지고 관광 수입도 늘어날테니 ‘윈-윈’인 셈이다. 

댓글목록

김용규님의 댓글

김용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여수 세계박람회 때문에
그쪽 동네가 많이 좋아지겠군요
과투자가 없이......... 끝나도 잘 이용이되는것들 이어야하는데
궁민 쌩돈만 들어가는것 아잉가 모르겠다...

김용현님의 댓글

김용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행사장 진입로 교통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들었고 공사도 아직 미진한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잘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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