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유래 - 망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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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용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2-15 22:52 조회6,018회 댓글1건관련링크
본문
내고장유래 - 망경동
연혁
본래 진양군(晉陽郡) 섭천면(涉川面)의 지역으로서 남강(南江)의 앞쪽이 되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천전리(川前里)라 하여 내동면(奈洞面)에 편입되었다가 1939년 일제시대 명치정(明治町)으로 천전동(川前洞)에서 분할되었고, 1949년 망경동(望京洞)으로 개칭되었으며, 1954년 망경남·북동으로 분할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망경동으로 통합되었다.
주약동(株藥洞) 본시 진주군(晋州郡) 섭천면(涉川面) 약동(藥洞) 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에는 나동면(奈洞面) 주약리(株藥里)라 하였다. 1938년 7월 1일에는 진주읍(晋州邑)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 8월15일에는 주약동(株藥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9년 8월15일에는 주약동(株藥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경동(望京洞) 본시 진주군(晋州郡) 섭천면(涉川面) 천전동(川前洞) 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에는 내동면(奈洞面) 천전리(川前里)라 하였다. 1918년 5월 1일에는 진주면(晋州面)으로 편입되고, 차츰 도시화되면서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식 지명으로 개칭되어 명치정(明治町)이라 하였다.
1949년 8월 15일에는 망경남·북동(望京南·北洞)이 되고, 1990년 4월 1일에는 이를 통합한 망경동(望京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주약동 갓 골 : 동구 들머리에 있는 마을로 바깥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갓(變)골이라 이름하여 동민 소유의 마을회관이 있어 야학교의 역할도 하였고 음력 섣달 그믐에는 동민들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내고 골짜기의 고개는 당산이라 하여 여기서 제(祭)도 지냈다고 한다. 300년 묵은 포구나무가 있어 동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있으며 특히 297번지에는 박현주(朴賢柱) 스님이 세웠다는 보덕암(普德庵)이 있다.
나장골 : 애골 건너편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입구에는 200년이 넘는 느티나 무가 개울가에 있었으나 큰 수해가 있은 후 자연 고사(枯死)되어 없어졌다.
망진산 : 약골 서쪽에 있는 산이다.
법수골(法首谷) : 갓골 다음 골짜기인데 옛날 절골에 있었던 봉명암(鳳鳴庵) 을 드나드는 절 입구에 수호신 역할을 한 벅수(長丞)가 세워진데서 유래되었다.
새벼리 : 본도의 참새밋골과 다릿골에 걸쳐 있는 절벽(두원중공업 남단과 석류공원 북편 남강변)을 일컫는다.
구석다리 : 새벼리 입구에 있는 교량이다. 망성교라고도 함.
야싯골 : 지금의 한보은빛마을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짝마을로 옛날에는 이 골짜기에 숲이 짙어 여우가 아주 많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왜앵골 : 본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 골 : 본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여기에 절이 있었다. 옛날 산 중턱에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명암(鳳鳴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목탁소리가 새벽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고 하였으며, 암자가 위치한 자리가 명당이라 신도도 많았고 번창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도둑의 무리가 득실거려 약탈을 수없이 당하여 견디지 못하여 조선 말엽에 없어졌다고 하는데 몇 년전만 하더라고 약간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빈대가 많아서 절간을 없애버렸다고 하기도 하지만 도둑의 무리들을 빈대에 비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1938년에 박현주(朴賢柱)란 스님이 넓게 덕을 베푼다는 뜻에서 보덕암(普德庵)이란 암자를 이곳에 창건하여 운영하여 왔으나 6?25 동란을 전후하여 많은 수모를 겪다가 1956년경에 지금의 주약동 297번지로 옮겼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점쟁이가 세웠다는 조그마한 약선암이란 암자가 있을 뿐이며 골짜기 입구에는 나병도 고치고 땀띠도 없앤다고 하는 찬 약수터가 있어 옛날부터 시내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 주민들의 생수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애골(기왓골) : 본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여기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지금도 주약동 265번지 강수탁씨 집 뒤편에 기와가마가 있었는지 기와조각이 많이 나온다.
지시골(智水谷) : 가지막골 건너편 골짜기로 내동면 지수마을로 넘어가는 골짜기라 하여 지수골이라 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예부터 칡덩굴이 무성하여 칡덩굴 기둥감도 생산되어 촉석루의 건축자재의 일부로도 활용되기도 하였을 정도로 칡덩굴이 울창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최영세씨 소유 대밭속에는 이름 모를 장군의 묘라고만 전해지는 묘 1기가 있는데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 때 어느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진터골 : 본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청 골 : 애골 건너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입구에 수령 500년을 전후한 느티나무가 있어 주약동의 역사를 한 몸에 간직한 듯 두루 50m를 넘게 가지를 뻗어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골짜기의 개울은 맑은 물과 검은 바위 반석이 깔려 있어 청골이라 하였다. 골짜기 안쪽에는 작은 절이 있는데 장홍권(법명:장종천)의 꿈에 희고 큰 수염을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흰 종이에 내천사(內泉寺)란 글을 써 주어 절을 세우라는 선몽이 있어 삼부신앙(三部信仰)으로 절을 세워 1989년 4월 8일 창건(創建)하여 개원식(開院式)을 가져 조계종 158-160호로 등록 승인되었다.
가지막골 : 공동묘지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울가에는 가재가 많아 어린이들이 잡으러 다니기도 한 곳으로 지금은 가재를 발견하기 힘들다.
봉화골(烽谷) : 망경산 남쪽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망경산에 봉화대가 있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봉화를 올렸다는 골짜기라 하여 봉화골이라고 한다.
망경동 관장골 : 망경산 등성이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골짜기로 산세가 좋고 물이 많이 옛날에는 관가의 높은 벼슬아치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관장못골 : 관장골 하단 부에 진주역이 세워지면서 기관차에 이용할 물을 저장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못이다. 지금은 진주역 부근의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그 부근은 일제시대에 일본군경이 사격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망경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금선암(金仙庵) : 섭천 남쪽에 있는 절로서 1947년에 세웠으며 단성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내리수 : 약새미골의 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망경산의 중앙부에 서 뻗어있으며 하단부의 관장골 못에 연해 있고 계곡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암반위를 맑은 물이 항상 흐르고 있어 빨래터와 여름철의 목욕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겨울철엔 많은 고드름과 얼음이 아주 두껍게 얼어 옛날 진주시내의 돈 많은 부자들은 이곳의 얼음을 떼어다가 저장하여 여름에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단성석조여래좌상(丹城石造如來坐像) : 금선암에 있는 미륵으로 높이 136m이다. 본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묻혀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물 371 호로 지정되어 있다.
덤 밑 : 망경산 북쪽 남강과 연해 있는 (지금의 망경양수장) 벼랑(덤)을 말 하는데, 내동면 독산마을로 통하는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국토개발계획에 의하여 진주~순천간의 철도가 놓여지고 진주~하동간의 자동차 도로가 되어 있다.
망경대 : 망경산에 있는 대(臺)인데 옛날 국상 때에 이 곳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고 망곡(望哭) 하였다.
망경산 : 망경동과 내동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옛날부터 서울로 연락하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봉수대는 1995년에 복원하였다. 방송국중계소가 세워져 있다. 정상 주변에는 무궁화 꽃동산을 가꾸어 두고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망운암 : 망경산에 있는 절이다.
망진산 : 섭천 서쪽에 있는 산이다.
미륵골 : 내리수 계곡 하단부의 북쪽 언덕에 연대미상의 1.5m 높이 미륵불이 서 있는데, 이 미륵으로 인하여 내리수 계곡을 미륵골이라고 한다. 50여년 전까지도 미륵불이 전각속에 들어 있었으나 정해진 관리자가 없어 관리의 소홀로 전각이 허물어져 없어지고 미륵불만 남아 있다.
박석거리 : 망경산의 제일 북동쪽에 있는 계곡으로 순 암반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흘러내려 빨래터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암반지대를 파 일구어 농토와 주택지로 변하고 그 흔적만 조금 남아있다. 계곡 너머가 남강이다.
반장못 : 반장골에 있는 못으로 1927년에 준공되었다.
산 정 : 망경산의 산주(山主)가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산막 겸 피서용 별장과 같이 건축한 한식가옥 한 채가 있는데, 이것을 산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산주의 후손이 살고있다.
섭 천 : 해새미 주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연하여 있는 마을로 천전지구에서 가장먼저 취락이 형성된 곳이며, 남동쪽으로 기울어진 등성이에 주택지를 이루고 있고, 북쪽은 대밭(竹林)으로 강을 건너 진주성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기에 섭천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현재 망경북동과 망경남동의 망경산 동편 산자락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섭천골 : 섭천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섭천못 : 섭천 마을의 동남쪽 어귀에 위치한 자연 못으로 연꽃이 장기간 만발하여 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현재는 완전 매축되어 현 망경초등학교 운동장과 주변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섭천못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화에 옛날 진주에 철도가 놓이지 않던 시절에 섭천못 가에 철길이 놓일 것이라는 어느 예언자가 섭천못에 세 [쇠(鐵) 또는 소(牛)가 진주지방의 사투리로 세(牛)라 하며 쇠(鐵)를 세 또는쎄라 하였다]가 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진주에 철도가 놓여져 기적소리가 울리게 되니, 쇠가 울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소가 운다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솔밭등 : 관장못골의 북방에 들러져 있는 조그만 등성이로 옛날엔 송림이 울창했으나 지금은 고목 20여 주가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주택지가 되어있다.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진주의 제2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했었다고 하며, 日人들이 세운 재봉기술학원이 이 등성이의 정상에 있어 재봉학교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으나 광복후 학원은 없어져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고 그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수원지 : 섭천 북쪽에 있는 상수도 수원지이다.
숭솔박 : 섭천 남쪽에 있는 바위이다.
숭솔백이 : 일명 식송암(食松岩)으로 섭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새미골 : 관장골의 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계곡으로 옛날 이 계곡의 중간지점에 약물이 솟는 약샘이 있었다고 한다.
양 달 : 섭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은곡(魚隱谷) : 일명 에엔골로 섭천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옴 달 : 섭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총림사 : 섭천 서쪽에 있는 절로서 1939년 심경재(沈鏡宰)가 세웠다.
큰새미 : 솔밭등의 북쪽 등성이 너머 하단부에 섭천마을의 남쪽 중앙지점에 위치한 인공우물로 만든지가 60여년 되었으며 우물의 직경이 2m, 깊이가 10m의 큰 우물이다.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해새미 : 박석거리 계곡의 맨 하단부에 수백년 묵은 고목 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둘레가 4m가되는 홰나무(회화나무의 준말로 진주지방 사투리로 해나무로 발음함)뿌리 쪽에 맑은 물이 나와 샘(우물)을 만들어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하였으며 이 물을 마시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홰나무에 해(害)를 끼치는 사람은 생명의 위험이 닥친다는 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둘레 50cm 정도의 새끼 홰나무와 같이 우물이 남아있으나 식수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닭 목 : 내동면 독산으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마을의 생긴 모양이 닭 목과 같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처음에 닭목 골짜기에 모여 살게 된 것이 망경동의 시초이다.
망경대 : 망경산의 꼭대기이다. 진주 명승지의 하나로서 고려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와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늘 이 산에 올라와 멀리 북쪽(서울에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제 방 : 남강변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둑으로 수차 보수하여 안전하게 되어져 있다.
죽 림 : 남강 남쪽 연변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대숲으로 제방과 아울러 여름철 유원지로 좋은 곳이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을뿐 “문화거리”로 명명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나장골 : 애골 건너편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입구에는 200년이 넘는 느티나 무가 개울가에 있었으나 큰 수해가 있은 후 자연 고사(枯死)되어 없어졌다.
망진산 : 약골 서쪽에 있는 산이다.
법수골(法首谷) : 갓골 다음 골짜기인데 옛날 절골에 있었던 봉명암(鳳鳴庵) 을 드나드는 절 입구에 수호신 역할을 한 벅수(長丞)가 세워진데서 유래되었다.
새벼리 : 본도의 참새밋골과 다릿골에 걸쳐 있는 절벽(두원중공업 남단과 석류공원 북편 남강변)을 일컫는다.
구석다리 : 새벼리 입구에 있는 교량이다. 망성교라고도 함.
야싯골 : 지금의 한보은빛마을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짝마을로 옛날에는 이 골짜기에 숲이 짙어 여우가 아주 많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왜앵골 : 본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 골 : 본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여기에 절이 있었다. 옛날 산 중턱에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명암(鳳鳴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목탁소리가 새벽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고 하였으며, 암자가 위치한 자리가 명당이라 신도도 많았고 번창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도둑의 무리가 득실거려 약탈을 수없이 당하여 견디지 못하여 조선 말엽에 없어졌다고 하는데 몇 년전만 하더라고 약간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빈대가 많아서 절간을 없애버렸다고 하기도 하지만 도둑의 무리들을 빈대에 비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1938년에 박현주(朴賢柱)란 스님이 넓게 덕을 베푼다는 뜻에서 보덕암(普德庵)이란 암자를 이곳에 창건하여 운영하여 왔으나 6?25 동란을 전후하여 많은 수모를 겪다가 1956년경에 지금의 주약동 297번지로 옮겼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점쟁이가 세웠다는 조그마한 약선암이란 암자가 있을 뿐이며 골짜기 입구에는 나병도 고치고 땀띠도 없앤다고 하는 찬 약수터가 있어 옛날부터 시내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 주민들의 생수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애골(기왓골) : 본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여기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지금도 주약동 265번지 강수탁씨 집 뒤편에 기와가마가 있었는지 기와조각이 많이 나온다.
지시골(智水谷) : 가지막골 건너편 골짜기로 내동면 지수마을로 넘어가는 골짜기라 하여 지수골이라 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예부터 칡덩굴이 무성하여 칡덩굴 기둥감도 생산되어 촉석루의 건축자재의 일부로도 활용되기도 하였을 정도로 칡덩굴이 울창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최영세씨 소유 대밭속에는 이름 모를 장군의 묘라고만 전해지는 묘 1기가 있는데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 때 어느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진터골 : 본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청 골 : 애골 건너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입구에 수령 500년을 전후한 느티나무가 있어 주약동의 역사를 한 몸에 간직한 듯 두루 50m를 넘게 가지를 뻗어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골짜기의 개울은 맑은 물과 검은 바위 반석이 깔려 있어 청골이라 하였다. 골짜기 안쪽에는 작은 절이 있는데 장홍권(법명:장종천)의 꿈에 희고 큰 수염을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흰 종이에 내천사(內泉寺)란 글을 써 주어 절을 세우라는 선몽이 있어 삼부신앙(三部信仰)으로 절을 세워 1989년 4월 8일 창건(創建)하여 개원식(開院式)을 가져 조계종 158-160호로 등록 승인되었다.
가지막골 : 공동묘지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울가에는 가재가 많아 어린이들이 잡으러 다니기도 한 곳으로 지금은 가재를 발견하기 힘들다.
봉화골(烽谷) : 망경산 남쪽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망경산에 봉화대가 있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봉화를 올렸다는 골짜기라 하여 봉화골이라고 한다.
망경동 관장골 : 망경산 등성이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골짜기로 산세가 좋고 물이 많이 옛날에는 관가의 높은 벼슬아치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관장못골 : 관장골 하단 부에 진주역이 세워지면서 기관차에 이용할 물을 저장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못이다. 지금은 진주역 부근의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그 부근은 일제시대에 일본군경이 사격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망경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금선암(金仙庵) : 섭천 남쪽에 있는 절로서 1947년에 세웠으며 단성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내리수 : 약새미골의 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망경산의 중앙부에 서 뻗어있으며 하단부의 관장골 못에 연해 있고 계곡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암반위를 맑은 물이 항상 흐르고 있어 빨래터와 여름철의 목욕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겨울철엔 많은 고드름과 얼음이 아주 두껍게 얼어 옛날 진주시내의 돈 많은 부자들은 이곳의 얼음을 떼어다가 저장하여 여름에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단성석조여래좌상(丹城石造如來坐像) : 금선암에 있는 미륵으로 높이 136m이다. 본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묻혀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물 371 호로 지정되어 있다.
덤 밑 : 망경산 북쪽 남강과 연해 있는 (지금의 망경양수장) 벼랑(덤)을 말 하는데, 내동면 독산마을로 통하는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국토개발계획에 의하여 진주~순천간의 철도가 놓여지고 진주~하동간의 자동차 도로가 되어 있다.
망경대 : 망경산에 있는 대(臺)인데 옛날 국상 때에 이 곳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고 망곡(望哭) 하였다.
망경산 : 망경동과 내동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옛날부터 서울로 연락하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봉수대는 1995년에 복원하였다. 방송국중계소가 세워져 있다. 정상 주변에는 무궁화 꽃동산을 가꾸어 두고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망운암 : 망경산에 있는 절이다.
망진산 : 섭천 서쪽에 있는 산이다.
미륵골 : 내리수 계곡 하단부의 북쪽 언덕에 연대미상의 1.5m 높이 미륵불이 서 있는데, 이 미륵으로 인하여 내리수 계곡을 미륵골이라고 한다. 50여년 전까지도 미륵불이 전각속에 들어 있었으나 정해진 관리자가 없어 관리의 소홀로 전각이 허물어져 없어지고 미륵불만 남아 있다.
박석거리 : 망경산의 제일 북동쪽에 있는 계곡으로 순 암반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흘러내려 빨래터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암반지대를 파 일구어 농토와 주택지로 변하고 그 흔적만 조금 남아있다. 계곡 너머가 남강이다.
반장못 : 반장골에 있는 못으로 1927년에 준공되었다.
산 정 : 망경산의 산주(山主)가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산막 겸 피서용 별장과 같이 건축한 한식가옥 한 채가 있는데, 이것을 산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산주의 후손이 살고있다.
섭 천 : 해새미 주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연하여 있는 마을로 천전지구에서 가장먼저 취락이 형성된 곳이며, 남동쪽으로 기울어진 등성이에 주택지를 이루고 있고, 북쪽은 대밭(竹林)으로 강을 건너 진주성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기에 섭천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현재 망경북동과 망경남동의 망경산 동편 산자락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섭천골 : 섭천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섭천못 : 섭천 마을의 동남쪽 어귀에 위치한 자연 못으로 연꽃이 장기간 만발하여 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현재는 완전 매축되어 현 망경초등학교 운동장과 주변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섭천못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화에 옛날 진주에 철도가 놓이지 않던 시절에 섭천못 가에 철길이 놓일 것이라는 어느 예언자가 섭천못에 세 [쇠(鐵) 또는 소(牛)가 진주지방의 사투리로 세(牛)라 하며 쇠(鐵)를 세 또는쎄라 하였다]가 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진주에 철도가 놓여져 기적소리가 울리게 되니, 쇠가 울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소가 운다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솔밭등 : 관장못골의 북방에 들러져 있는 조그만 등성이로 옛날엔 송림이 울창했으나 지금은 고목 20여 주가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주택지가 되어있다.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진주의 제2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했었다고 하며, 日人들이 세운 재봉기술학원이 이 등성이의 정상에 있어 재봉학교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으나 광복후 학원은 없어져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고 그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수원지 : 섭천 북쪽에 있는 상수도 수원지이다.
숭솔박 : 섭천 남쪽에 있는 바위이다.
숭솔백이 : 일명 식송암(食松岩)으로 섭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새미골 : 관장골의 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계곡으로 옛날 이 계곡의 중간지점에 약물이 솟는 약샘이 있었다고 한다.
양 달 : 섭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은곡(魚隱谷) : 일명 에엔골로 섭천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옴 달 : 섭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총림사 : 섭천 서쪽에 있는 절로서 1939년 심경재(沈鏡宰)가 세웠다.
큰새미 : 솔밭등의 북쪽 등성이 너머 하단부에 섭천마을의 남쪽 중앙지점에 위치한 인공우물로 만든지가 60여년 되었으며 우물의 직경이 2m, 깊이가 10m의 큰 우물이다.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해새미 : 박석거리 계곡의 맨 하단부에 수백년 묵은 고목 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둘레가 4m가되는 홰나무(회화나무의 준말로 진주지방 사투리로 해나무로 발음함)뿌리 쪽에 맑은 물이 나와 샘(우물)을 만들어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하였으며 이 물을 마시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홰나무에 해(害)를 끼치는 사람은 생명의 위험이 닥친다는 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둘레 50cm 정도의 새끼 홰나무와 같이 우물이 남아있으나 식수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닭 목 : 내동면 독산으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마을의 생긴 모양이 닭 목과 같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처음에 닭목 골짜기에 모여 살게 된 것이 망경동의 시초이다.
망경대 : 망경산의 꼭대기이다. 진주 명승지의 하나로서 고려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와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늘 이 산에 올라와 멀리 북쪽(서울에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제 방 : 남강변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둑으로 수차 보수하여 안전하게 되어져 있다.
죽 림 : 남강 남쪽 연변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대숲으로 제방과 아울러 여름철 유원지로 좋은 곳이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을뿐 “문화거리”로 명명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 망경동/이정애(055-749-2632)
댓글목록
김용현님의 댓글
김용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망진산에 대한 유감 -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때까지 망경산이라고 불렸는데 최근 망진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유인즉슨 망경산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서울이 보이는게 아니고 진주가 보인다는 주장하는이들 때문에
망진산이라 해야 옳다는 말을 들었다.
망경산에 올라 서울이 안보이고 진주가 내려다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것만 말한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삭막할 것 같다. 서울이 보이지는 않지만 산에 올라 서울을
마음속으로 상상할수 도 있지 않는가!
옛 혼례식에서는 북향재배라는 것이 있었다. 북향재배는 임금이 보이지는 않지만 임금님께 절하는거라고 했다.
망경산 옛 이름을 되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