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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기타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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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현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2-19 10:58 조회6,81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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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uerdos de la Alhambra
타레가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Francisco Tarrega Eixea [1852∼1909]



Sharon Isbin, 샤론 이즈빈

기타 음악으로서는 로망스와 함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에스파니아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타레가(1852~1909)의 작품입니다. 전통적으로 기타음악이 강세를 보이는 에스파니아에서도 이 음악은 클래식 기타의 표본이라 불리울 만큼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그라나다 >
“네가 남자처럼 이 왕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어라.” - 그라나다 마지막 무슬림 국왕의 어머니

마드리드에서 안달루시아의 보석 같은 도시 그라나다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마드리드에서 도둑맞고 좀도둑으로 몰리고 거짓말하는 사람 취급 받은 충격 때문에 먹어댄 아이스크림 한통과 초콜릿 한 상자 탓인지 속이 미식거렸다. 저녁 9시가 넘었는데 진짜 음식으로 위를 안정시켜야 잠이 올 것 같았다. 이번에 만난 작은 여관의 여주인은 아주 친절한 분이셨다. 그분은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꼼꼼하게 호텔 서비스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스페인에서는 9시부터서야 저녁식사를 주는 레스토랑이 열리니까 지금 나가도 하나도 늦지 않았다고 하며 내게 시내 지도를 꺼내 레스토랑 몇개를 표시해주셨다. 지도를 들고 그라나다의 밤거리로 나섰다. 분수가 불빛을 받으며 신비롭게 물을 뿜는 플라자의 저쪽 구석에 ‘케밥’이라고 쓰인 작고 초라한 식당이 보였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살람 알레이쿰”하고 인사를 하자 젊은 무슬림 식당 주인이 “알레이쿰 살람, 시스터”하고 나를 반겨주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센티멘탈해졌는지 그가 따뜻하게 웃으며 내게 “자매님, 당신에게 평화를”이라는 인사 한마디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터키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온 이민자라고 대답했다. 그에 의하면 안달루시아에서 몇백년을 살던 무슬림들은 결국엔 가톨릭으로 개종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라나다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무슬림 공동체는 없고 최근 10년 사이에 몰려온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민자들이 다시 무슬림 문화를 스페인에 뿌리내리려 애쓰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남부를 지배하던 이슬람왕국의 마지막 왕은 ‘종교와 재산을 지켜달라’며 가톨릭왕국에 무혈인계했지만 무슬림은 개종당하고 쫓겨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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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에서도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고 평가받는 ‘두 자매의 방’이다. 이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보게 된 그라나다의 옛 시가지는 마치 다시 부활된 무슬림 타운 같았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함브라 궁전, 헤네랄리페 정원, 알바이진 마을 모두가 무슬림 왕국에 의해 만들어진 유산이 다시 복구된 것이었다. 기념품을 파는 상점을 둘러보니 모로코와 터키에서 온 물건들로 가득했다. 가톨릭 왕국에 의해 1492년에 몰락한 이슬람 왕국이 지구화와 이민, 자본주의의 바람을 타고 500년만에 다시 안달루시아 지역으로 돌아왔다. 이번 회귀에는 막강한 왕권이 아닌 값싼 노동력과 물건들이라는 애매한 힘을 가지고 무슬림들이 안달루시아로 다시 온 것이다.

여성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옛 시가지를 걸어다니면서 유적들에 대한 설명들을 들었다. 그라나다의 무슬림 왕국의 몰락은 ‘무혈인계’였다고 한다. 그 때 무슬림 왕국의 지도자였던 보아브딜은 북쪽에서 치고 내려온 가톨릭왕 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수십만명이 넘는 무슬림인들의 종교와 재산권, 그리고 상권을 유지시켜달라는 조건으로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왕권을 넘겨주었다. 그 때 상황 속에서는 많은 무슬림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무슬림 왕으로서의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그러나 이 전쟁 없는 평화로운 무혈인계에 대해 크게 노하여 아들에게 “네가 남자처럼 이 왕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어라”는 말을 남기고 궁전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유럽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왕국을 넘겨줘야 했던 왕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가 ‘마초’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권을 넘겨주면서 수만명의 무슬림 생명들을 건진 것은 아닐까? 세계의 대세에 따라 밀려나면서 쓸 데 없는 전쟁을 하여 수많은 죄없는 양민들을 잃는 것보다 무혈인계가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이지만 남성들의 마초성을 남성성으로 규정하며 남자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이런 여왕벌·독거미 같은 어머니들, 여성들을 ‘가부장적 여성들’로 본다. 그리고 그들이 남성들의 에고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이런 조종을 혐오한다.

추방자의 후예 무슬림들이 500여년만에 그 땅을 다시 밟는다.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은 왕권이 아닌 값싼 노동력으로, 기념품으로 부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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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 전경
알함브라 궁전은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궁전 중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13~14세기에 걸쳐 세워진 이 궁전은 무슬림인들이 생각한 천국을 묘사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많은 이슬람 건축양식이 그렇듯이 밖은 아주 수수하지만 궁 안으로 들어가면 그 섬세한 미감에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어디서나 생명을 상징하는 물의 흐름을 보고,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게 디자인된 이 궁전은 아름다운 정원들과 기하학적 무늬들로 가득찬 신비로운 높은 천정들로 인해 신전이나 사원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주다.

무혈인계의 약속들은 겨우 7년 정도밖에 지켜지지 않았고 그 뒤 많은 무슬림들은 안달루시아 지역을 떠나 북아프리카로 대량 이민을 하거나 강제적으로 개종을 해야만 했다. 실크로드와 연결돼있고 고급 실크 생산지였던 그라나다는 이 대량이민에 의해 아주 가난한 지역으로 한동안 몰락하여 다시 일어나는 데 거의 20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 알함브라 궁전도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19세기에 발간된 미국인 워싱턴 어빙의 책 <알함브라 궁전의 이야기>에 의해 다시 국제무대에 부상하게 되었고 스페인 정부는 이 궁전을 국가의 기념물로 복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건축양식의 꽃인 것 같다. 하루종일 알함브라 궁전과 그곳에 연결된 헤네랄 리페라는 정원을 거닐면서 캐런 암스트롱이 <이슬람>이라는 책에 서술한 내용을 생각해보았다. 중세기의 이슬람들은 유럽의 척박한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알함브라 궁전을 보러왔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그 궁전을 보며 이슬람 문화의 고도의 세련됨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크리스천 유럽에게 학문적,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그 이슬람 문화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500~60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이슬람 문화들이 서구 기독교 문화가 장악한 세계지도 속에서 계몽주의를 따라잡지 못한 것은 뒤처지고 보수적이고 비이성적인 듯 말해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무엇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은 세계의 과학, 의학, 학문, 예술을 선도하던 자리에서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집단으로 여겨지며 힘을 잃게 되었을까?

수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이 이슬람 평화순례가 끝날 때쯤 그 질문에 해답을 얻기를 아니면 잘못된 질문 자체를 수정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떼 알함브라 궁전을 걸어나왔다. 다시 한번 찬란한 이슬람 문예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이 생에서 보고 싶은 나의 소원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인샬라!

 
 

댓글목록

이현판님의 댓글

이현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상철이 글 보고 듣고 싶어.....
혼자 듣자니 야박한 맘이 들어
여기 올립니다. 
감미로운 정통 통기타의 매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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