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진주성 (허남오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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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2-12 01:35 조회8,905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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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진주성 작사 허남오 작곡 이영선 노래 장옥정 촉석루 감싸안고 흘러가는 진주남강 의암바위 여기던가 물소리 구슬프다 쌍가락지 논개 논개 높은 그 절개 목숨바쳐 지켜낸 님들의 충절 아아아아 피보다 붉어 꽃이 피는 진주성아 정암무게 말나루 흘러가는 황강줄기 슬픈 역사 한이 맺혀 물새도 울고 가네 일만 용사 함성 소리 옛성터에는 푸르른 저 소나무 변함없구나 아아아아 그 누가 아리 꽃이 피는 진주성아 이 곡은 노래방 반주기에 15136번으로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노래방에 가시면 고향과 허남오 친구를 생각하면서 한번씩 불러 보세요. |
꽃 피는 진주성 | |
진주성, 용사일기(龍蛇日記) 펴낸 허남오 서울병무청장 | |
하재석기자, hjs@news-korea.co.kr |
최종편집일: 2006-08-15 오전 10:44:30 |
진주성을 돌아보며 ‘그날도 6월 29일이었다. 6만의 생명이 이슬처럼 스러져간 진주성전투. 400여 년 전, 숱한 주검들이 이 남강을 뒤덮어 흘러갔었다. 1987년 오늘, 4.13 호헌철폐를 외친 시민항쟁의 결과로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나는 십여 일 전 이 남강 다리 위에서 바라보던 진주성을 잊을 수 없다. 만여 명의 시위 학생들이 강남에서 진주 시내로 들어오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려 했다. 나는 겨우 진주경찰서 병력 100여 명을 이끌고 다리 중간에서 이를 저지했다. 전투였다. 돌멩이와 지랄탄이 오가는 전투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이 전투는 해질무렵까지 이어졌다. 물 한 모금, 밥 한 숟갈 들지 못하고 우리는 다리를 지켰다. 간간이 목이 마를 때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촉석루와 의암 그리고 진주성을 이루고 있는 절벽들. 무엇보다 나는 임진란 진주성대첩의 김시민 목사를 생각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순박한 충정, 이 한 몸을 던져 부하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눈을 치뜨게 했다. 당시 목숨을 바친 김시민 목사는 39세였다. 우연히도 경찰서장인 나와 동갑이었다. 그때의 일기다. 나는 그 후 김시민의 진주성대첩에 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기록과 논문을 섭렵했다. 소설 임진왜란도 여럿 읽었다. 그리고 진주성을 시간 나는 대로 둘러보았다. 촉석루에 걸려있는 3장사 시, 논개 사당, 정충단, 호국사와 창렬사를 훑었다. 낮에는 비장함이 깃들었고 밤에는 눈물이 스며들었다. 조선.명.일본 동양 세 나라가 이 전란에 휩쓸려 명.일본은 나라가 바뀌었다. 오히려 조선은 명맥을 유지했다. 그것은 바로 진주성이 지켜짐으로써 경상우도가 회복되어 전라도가 보전되었고 왜적의 후방을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 ||||
그가 전란 중 임명된 유일한 초유사로서 진주성에 둥지를 틀면서 성주, 고령, 상주 등 낙동강 서쪽의 우도를 모두 회복하게 만들었다. 그 바탕에는 곽재우.정인홍.김면 등 남명의 후예들이 일으킨 의병들의 전공이 깔려있다. 특히 진주목사 김시민이 종횡무진 적을 치자 왜적은 우도의 중심인 진주성을 치게 된다. 3만 대 3천. 6일간의 치열한 공격에도 적은 만여 명을 잃고 패주하고 만다. 일본이 임진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패배다. 그러나 격전 중에 목사는 총에 맞아 순절하고 만다. 김성일은 계속 진주성의 방비를 독려하지만 해를 넘기면서 격무로 목숨을 잃는다. 이듬 해 계사년 6월 왜적은 조선에 있는 총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친다. 작년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실은 전라도를 치기 위함이었다. 도원수 권율은 진주성을 비울 것을 명하면서 남원으로 도망간다. 김천일․최경회․황진 등 전라도 의병이 주도한 일부 병력만이 진주성을 지킨다. 10만 대 6천. 결국 성 안에 있던 6만의 생령들이 다 도륙을 당했다. 슬픈 진주성이었다. | ||||
허남오 서울병무청장 의 진주성 출간을 많은분들이 축하해주었다. ⓒ 하재석 역사는 기록에 의한다. 그리고 흔적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진주성 서문 언덕 아래 창렬사가 있다. 이 사당은 계사년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장수들을 모신 곳이다. 전몰 2년 후인 1595년에 감사 정사호가 사당을 세웠으며 1607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때 서원을 통폐합할 때 성안의 충민사를 헐면서 거기에 모신 충무공 김시민 목사를 이곳으로 옮겨 함께 모셨다. 정사에는 진주목사 김시민,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장윤, 복수의병장 고종후, 종부시 주부 유복립 등 7위가 제향 되어 있고, 동사에는 공조좌랑 양산숙, 거제현령 김준민, 분의병 부장 강희열, 도탄의복 대장 강희보, 진해현감 조경형, 판관 최기필․박승남, 수문장 장윤현, 의병장 유함, 생원 이욱, 학생 하계선․최언양 등 13위를 제향하고 있다. 서사에는 적개의병 부장 이잠, 김해부사 이종인, 우병영 우후 성영달, 첨정 윤사복, 보령현감 이의정, 의병대장 손승선, 주부 정유경, 수문장 김태백, 선무랑 양제, 학생 박안도․이인민 등 11위를 제향하고 있으니 모두 31위다. 그 후 사제비(賜祭碑)에 새겨진 당진현감 송제, 김개, 김덕련, 송건도, 가배량권관 주대청, 수문장 박세항 등 6위와 주몽룡, 정대보를 합한 8위를 추가 배향시켜 모두 39위가 되었다. 또한 창렬사에는 무명의 장관들의 공훈을 기리고 그들의 넋을 달래는 임금의 제문이 새겨져 있다. | ||||
먼저는 1592년 임진 10월의 진주성대첩이고 뒤는 1593년 계사 6월의 진주성전투다. 진주성대첩은 목사 김시민의 수성과 감사 김성일의 외원 등 관군이 주도한 싸움이며, 진주성전투는 김천일 등 전라도 의병이 중심이 된 백성 주도의 싸움이었다. 먼저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승첩은 명백한데, 뒤는 성이 무너지면서 사람도 기록도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뒤의 기록은 산발적으로 남아있다. 전라도 의병을 기록한 「호남절의록」이나 화살받이로 살아난 광양 선비 임우화의 구술을 토대로 한 「진주서사」는 호남인 중심으로 진주성전투를 그리고 있다. 정작 진주는 슬픈 진주성 이후 피폐하여 경상우도조차 없어져버렸고 그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정인홍 이하 남명의 맥을 잘라버린 역사의 흐름도 진주성의 흔적을 마르게 했다. 왜적의 분탕 외에도 이러한 관군과 의병, 호남과 영남, 북인과 남인의 알력 속에서 잊혀진 임진란의 진주성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가 그래도 있었다. 이로의 「용사일기()」, 이탁영의 「용사일록()」, 정경운의 「고대일록()」 등이다. 의령의 문관 이로는 초유사 김성일을 보좌하면서 임진․계사의 동물인 용(龍)․사(蛇)를 딴 「용사일기」를 남겼다. 감사의 군관 이탁영은 일기체로 「용사일록」을 썼고 함양의 선비 정경운도 고향 집 땅 이름을 딴 「고대일록」을 기술했다. 그 중에서도 「용사일기」는 김성일이 초유사로서 둥지를 틀고 감사로서 기거했던 진주성이 어찌 살고 어찌 죽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는 한 두 영웅의 기록이 아닌 뭇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었다. 이 기록 외에도 전란 후 4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숱한 인사들이 진주성대첩과 진주성전투를 회상해왔다. 이런 기록들을 거의 그대로 옮겨 여기 <진주성, 그 용사일기>는 만들어졌다. | ||||
진주를 알고자 하는 이는, 진주 사람을 알고자 하는 이는, 경.의를 알고자 하는 이는, 역사에 빠지고 싶은 이는 진주성을 돌아보라. 오늘도 빛나는 창렬사 봉향대제, 논개 제전 그리고 진주검무를 보라. 사람이 빠져죽지 않으면 새라도 빠진다는 그런 슬픈 날에 진주성을 돌아보라. 2. 책 마지막 구절 세월이 흘렀다. 한국전쟁의 혼란이 남아있던 1955년, 따로 8명의 위패가 창렬사에 몰래 봉안된 사건이 일어났다. 8명의 위패란 송제, 박세항, 주몽룡, 김개, 김덕련, 송건도, 정대보, 주대청이었다. 창렬사에서 이를 철수하였으나 5․16 쿠데타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다시 투입되더니 1971년 문화부의 지시로 또 다시 몰래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패가 봉인된 경위야 어찌되었건 목숨을 바친 그 분들의 순절에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욱 경건해진다. 영정에 안 올려진 숱한 무명 장령들의 공훈을 또한 기리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후예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400년 하고도 10년이 더 지난 오늘, 나는 창렬사 앞에 서서 진주성대첩과 진주성전투의 영웅들을 향해 합장을 올린다. | ||||
졸고는, 진주성대첩이라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한 부분을 통해 당시의 국제적 상황, 국내적 정쟁과 함께 전쟁의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출판계에서는 아직 이런 사실에 근거한 역사 전쟁을 다룬 서적이 없습니다. 졸고는, 산재한 기록을 통하여 거의 100% 사실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여 임진왜란을 왜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고 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주성을 지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졸고는, 따라서 시체에 부응하는 Faction 형식이며 오늘날 유행하는 역사, 문화, 전쟁을 함께 어우르는 저서가 될 것입니다. 4. 서점에 나온 서평 진주성, 용사일기(龍蛇日記) 임진왜란. 불과 4백 10여 년 전 왜적은 우리 선조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조선땅 전체를 피로 물들였다. 이때 분연히 일어선 의병들이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켜냈다. 이순신이 남해바다를 지킬 때, 땅에서는 김성일을 중심으로 곽재우, 정인홍, 김면, 정기룡 등 숱한 용장들이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거름강, 황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러 적의 육로를 막았다. 1592년 임진 10월에는 3만 대 3천. 압도적인 왜적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김시민 목사의 지휘 아래 왜적 1만여 명을 사살한, 청사에 빛나는 진주성 대첩을 이루어냈다. 이듬해 1593년 계사 6월. 왜적은 당시 조선에 와 있던 10만 병력을 총동원해서 진주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이때 명과 조선군은 멀리 남원으로 피해갔다. 성 안에는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을 중심으로 최경회, 황진, 김준민, 강희보, 이종인, 장윤 등 6천여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외부의 지원 없이, 9일간 왜적과의 처절한 사투 끝에 결국 진주성은 떨어지고 성안 백성을 포함한 6만여 생령들이 모두 핏빛 꽃으로 사라져갔다. 저자는, 그 전투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이로의〈용사일기〉, 이탁영의〈용사일록〉, 하명의〈진주성일기〉를 바탕으로, 무너진 진주성에 아로새겨진 병사들의 한(恨)을 낱낱이 밝힌다. 허남오 지음⁄신국판⁄288쪽⁄값 9,000원 지구문화사 刊 그외 세계일보.한국일보.국민일보.인터넷신문e-조으뉴스 등에서 호평을 올려 주었다. 지은이 소개 허남오는 194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중.고를 거쳐 동아대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 일찍이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진주.영암.서울동부경찰서장 등을 지냈고 대통령비서관을 거쳐 현재 서울병무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환경의 법이념을 찾아서>(넥서스, 1996) <한국경찰제도사>(동도원, 1998) <너희가 포도청을 어찌 아느냐>(가람기획, 2001) <단원 김홍도, 환쟁이새 전설>(어문각, 2003.7) <나는 대한민국 남자다.>(자유문화사, 2005) 연락처는 http://허남오 namohur@hanmail.net 011-380-4954 등이다. | ||||
그는 일찍이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진주경찰서장을 역임하였고 대통령 민정비서관을 거쳐 30여 년간을 고위공직자로서 계신 분이다. 그가 역사학자나 문학가 누구도 엄두를 못 낸 진주성의 처절한 역사를 그려 오늘의 후손에게 교훈을 일깨워주는 역저를 낸 것이다. 허긴 그의 저서는 한둘이 아니다. 김홍도의 일생을 그려낸 3권짜리 ‘환쟁이새 전설 단원 김홍도’나 조선시대 경찰을 그린 ‘너희가 포도청을 어찌 아느냐’ 등 예술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식견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더욱 놀랄 일은 이번 책이 나오면서 주제가도 같이 나온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 주제곡은 있어도 저서의 주제가는 들어본 일이 없다. 책에 반한 어떤 분이 곡을 만들어 그에게 작사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꽃피는 진주성’이라는 이 곡은 어느새 노래방의 단골메뉴가 되어있으니 진주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된 것이다. 고위공직자가 어찌하여 이런 문화향기를 가졌을까만 그의 이력을 보면 대충 그 폼을 알 수 있다. 그는 진주 지수면에서 한국동란 1년 전에 태어났다. 돛골에 하나뿐인 도동초등학교를 나와 선학산을 넘으며 진주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를 다니다 월반하여 동아대학교에 입학한다. 서울대 최창조 교수가 일렀듯이 지수는 재벌 명당인데도 허 청장은 고시의 길로 나아갔다. 바로 경찰에 입문한 그는 629 선언 무렵, 고향 경찰서장을 하며 동향 학생들을 선처하기로 유명하였다. 후에 청와대에서 민정비서관을 하며 폭넓은 식견을 쌓고 현재 병무청까지 섭렵하여 그의 인맥은 거의 안 미치는 데가 없을 지경이다. 중앙부처에서는 정부부처의 차관 급을 비롯하여, 정책결정 그룹에 지인이 많고 기업체에도 같은 일족인 LGGS를 비롯하여 여러 재벌의 핵심과 친하게 지낸다. 또한 대교눈높이(강영중), 미스터피자(정우현), 현대자동차(김동진), 삼성전자(이현봉) 등이 다 동기다. 그의 역량은 이러한 국방치안 등 국가적 식견은 물론 환경법학박사로서 환경에, 경찰청 교통과장 3년 근무로 교통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가 책 저술에서 보듯이 예술역사에 대한 치열한 열정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허 청장은 평소 깨끗함을 즐긴다. 진주에서 그를 아는 분들은 경찰서장 시절의 강직하고 청렴한 이미지로 그를 각인한다. 그들이 간혹 묻는다. ‘꿈은 무엇입니까?’ ‘진주를 문화예술교육의 도시며 역사관광의 도시로 특화하여, 가보고 싶고 살고 싶은 대한민국의 중심이 되는 고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용암처럼 분출되는 후진들이 뻗어나가도록 서울 등 출향인사와의 가교 역할을 하여 빼어난 인물을 많이 키울 것입니다.’ 이날 기자가 만나본 허남오 청장은 앞으로 우리 경남의 발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칠만한 충분한 분임을 주변의 많은분들의 평가를 통해 느낄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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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글은 권성영 친구의 요청으로
작성 하였습니다.
음악 소스 구한다고
좀 고생했습니다.
원체 귀한 음악이라...
할 수 없이 돈주고 소그를 구했습니다.
어떤 자료라도 요청해 주시면
지구 끝이라고 디져서
찿아 올리겠으니
많이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원표님의 댓글
이원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허박사
추카하요
고생마이했네 그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