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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가보는 수원 화성 (산악회 1월 모임장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대규 작성일08-01-15 19:44 조회9,630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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位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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案內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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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門(장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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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砲樓(북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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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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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公園(장안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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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西門(화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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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一雉(서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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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將臺(서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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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暗門(서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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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南暗門(서남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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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陽樓(화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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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達門(팔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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烽墩(봉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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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龍門(창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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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弩弓臺(동북노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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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空心墩(동북공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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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暗門(북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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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花柳亭(방화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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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虹門(화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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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城行宮(화성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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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旗(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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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龍門 一部(창룡문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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練武台(연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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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豊樓(신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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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豊樓前(신풍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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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豊樓의入口(신풍루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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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豊樓의 처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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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장면 展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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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漢閣(운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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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南軒(락남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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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西門(화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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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성입니다.

성도 구경하시고 친구도 만나고

쐬주도 일잔 같이 합시다.

 

 

 



수원화성 / 한국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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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wha_p2.jpg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frame_01.gif frame_02.gif frame_tit.gif frame_cloud.gif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frame_dot.gif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frame_dot.gif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frame_03.gif frame_04.gif


역사적 배경 / 화성축성이야기

 img_01.gif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 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 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ㆍ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특별과거인 별시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실시됐는데 수원과 인근의 유 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하도록 특별 배려했다.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 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1790년(정조 14)에 실시한 과거 때는 합격된 사람 들 중 3명이 수원 호적자가 아님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고, 이들을 징벌 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은 합격만 취소 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일도 있었다. 최홍규 교수에 따르img_012.gif면 "수원과 인근 지역민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매년 실시 되는 이 문·무과 특별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官界)와 군(軍)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고장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신 분 상승의 기회도 그만큼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예전에는 강제 징발된 부역군들이 공사를 맡았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팔달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은 팔달문 밖의 남시장(일명 성밖시장, 현 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일명 성안시장)이 섰다. 이렇듯 정조대왕의 애정과 특혜 덕분에 수원에는 많은 외지인들이 이주를 해오는데 특히 해남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원으로 이사를 해와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북부 보시동(현 북수동)에 형성된 8부자집은 전국에서 이주해 온 상공업자들이 상업활동을 벌인 곳이다. 이 때 서민과 소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해 줬다고 해서 보시동(普施洞)이 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이 상공업 뿐만 아니라 농업 진흥 정책도 적극 추진하였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을 일굼으로써 오늘날 수원이 농업과학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 화성축성이야기

img_0102.jpg '의궤(儀軌)'란 옛날에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났을 때 후세의 참고로 하기 위해 그 일의 경과 및 대책 따위를 상세하게 기록한 책을 말한다.
따라서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성의 전말과 건축에 동원된 사람의 이름, 자재, 예산규모 등 세세한 것을 모두 기록해 놓은 화성의 공사보고서로서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함께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인 것이다.

그런데 '화성성역의궤'만큼 귀중한 역사의 보물 창고가 또 있다. 다만 '화성성역의궤' 보다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따름이다.

정조대왕께서 모친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비)의 회갑연을 위해 행차했던 을 묘년(1795) 8일 간의 일정을 상세히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대왕의 주도 하에 진행된 을묘년 수원행차의 모 든 것을 기록 한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풍부한 기록 내용은 왕실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 을 전해 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과거의 문화유산 중 각종 음식과 옷, 그림, 조각, 기물, 용품, 노래, 춤, 의식 등 각 부 문별로 당시의 최고 수준을 반영하고 있던 궁중문화를 이 기록을 통해 생생 하게 만날 수 있다.이런 면에서 이 기록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이루었던 최고 수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유산이다.

정조대왕은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위한 수원행차에 따른 예비 논의, 경비 준비, 진행 과정 등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임했음이 이 책에 기록돼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역시 정조대왕의 깊은 관심과 배려 속에서 간행된 기 록물로서 수권 (首卷) 1책, 본책 5권 5책, 부편 4권2책 등 총 8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서적이다. 인쇄는 정리자(整理字) 금속활자를 사용했다. 1795년은 정조대왕에게 매우 뜻깊은 한해였다.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만60년이 되는 해(甲年)였으 며 동갑이었던 어 머니 혜경궁 홍씨 또한 회갑을 맞는 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 이 즉위한 지 20 주년이 되기도 했다.

정조대왕이 심혈을 기울인 화성 축성 공사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에 행차해 어머니의 회갑연을 대대적으로 열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향한 추모의 정과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정을 만 천하에 알린 것 이다. 이와 함께 왕실의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해 수원에서 양로연, 구호 미 배급, 문·무 과 과거 실시 등 갖가지 행사를 병행했다.

또 한강 노량진 주교(舟橋:배다리) 설치, 어사(御射:임금의 활쏘기) 등 부 대 행사도 다채롭 게 펼쳤다. 이 을묘년 행차가 단순한 왕실 행사의 의미만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임 중 정치적 개혁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으며, 말년에 은퇴해 노후 를 보내고자 했던 수원땅 백성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한편 자신의 효심과 애민정신을 은연 중 각인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또 왕실의 근엄함과 막강한 정예군사의 통솔 능력을 과시해 정치적으로 반 대편에 서있었던 세력들을 심리적으로 압박, 자신의 이상을 원활하게 펼치려는 의도 역시 있 지 않았을까? 일종의 정치적 시위의 성격을 띄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수원시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는 화성문화제의 하 이라이트 '정조 대 왕 능행차 연시'의 기본 그림인 반차도(班次圖:나라의 의식에서 문무백관 이 늘어서는 차례 를 그린 그림)가 수록돼 있다. 반차도는 수원으로 행차하는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 총리대신 채제공을 비롯한 조정대신, 경기감사. 문무백관, 나인, 총·창·칼·활을 든 군사, 말, 수레 등이 차례로 그려 져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정치·군사제도·복식 등을 연구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자료 이다. 뿐만 아니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벌어진 국가적 이벤트인 봉수당진찬연 (奉壽堂進饌宴:혜 경궁 홍씨 회갑연)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다음에 각 권별 내용을 소개할 때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이 기록이 있음으 로 해서 화성문 화제 혜경궁 홍씨 회갑연의 무용과 음식, 상차림, 참석인사 배치, 복장, 기 물 등이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원행 행사가 모두 끝난 1795년 음력 윤2월27일에 정 조대왕의 명으 로 작업을 시작해 1797년(정조 21) 음력 3월24일에 완성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혜경궁 홍씨의 수원 화성행궁 회갑연에 관한 정조 대왕과 조정신료들간의 논의 과정, 행차의 세부적인 절차에서 물자 및 인원 의 동원과 같은 행정 체계를 비롯해 궁중 잔치, 궁중 음식, 긍중 음악, 궁 중 의식 등과 같은 궁중 문화, 그리고 군사훈련, 행차시의 국왕 호위, 국왕 의 의장행렬, 기물, 장신구, 물가, 인물 등 당시의 궁중문화 및 일반 생활 사의 면면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역사의 보물창고’로서 우리 조상들이 축적해왔던 문화의 최고 수준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원행을묘정리의궤 역시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할 귀중한 사료(史料)라고 믿는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규장각 도서로 15종이 소장돼 있으며 이밖에 국립도서 관 장서각, 국립박물관 등에도 소장돼 있다.

‘권수(卷首)’는 이 책의 첫 권으로서 택일(擇日)·좌목(座目)·도식(圖式) 으로 구성돼 있는데, 주된 내용인 도식은 행차시 중요 장면들을 판화로 정리 한 것. 화성행궁의 전경으로부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후 서울 홍화문에서 백성들 에게 쌀을 나눠주는 광경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그림들이 수록돼 있어 해당 부문의 연구 및 복원을 위한 아주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수원에서는 매년 벌어지는 화성문화제나,
올해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 회 문화관광축제 행사에서 실시될 이벤트 정조대왕 능행차연시나 혜경궁 홍 씨 회갑연, 양로연 등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 이다.
도식 편에 수록된 그림들은 당시 화원(畵員)들이 근무하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를 주도한 김홍도식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권1(卷一)’은 정조대왕의 명령과 대화인 전교·연설, 행차시 각종 행사 에 사용된 음악인 악장, 각종 행사에 이용된 글인 치사·어제, 활을 쏜 내 용인 어사, 정리사나 장용영 내·외사에 내린 훈령인 전령, 행사의 세부 내 용인 군령 등이 기록돼 있다.

‘권2(卷二)’는 출궁의식과 환궁의식의 절차를 기록한 의주(儀註)와, 부록 으로 의식의 업무 규식인 절목,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연·월·일별 로 정리한 계사 등이 수록돼 있다. ‘권3(卷三)’은 신하들의 보고서인 계목과 장계, 관공서 상호 간에 오고 간 문서인 이문과 내관, 직속상관에게 자필로 쓴 보고서인 수본, 상급관청에 서 내려온 공문인 감결로 구성돼 있다. ‘권4(卷四)’는 각종 식품의 내용과 조달에 관한 찬품(饌品), 봉수당 잔치 (진찬) 때의 소요물건과 준비에 관한 내용인 배설, 행차 때 사용할 각종 도구와 준비상황에 관한 내용인 의장, 행차 때 참가한 내·외빈과 각 부서의 수행관원 및 하급관리와 군병에 이르기까지 지급한 노자의 내용인 반전, 원행 때 정조대왕과 모친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갈 가마를 준비하는 내용인 가 교, 강을 건널 배다리를 놓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지시사항에 관한 내용인 주 교, 현륭원에 행차할 때 각 부서에서 거행할 사항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인 사복정례, 어가를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패용하는 표신과 수행원 정수에 관 한 내용인 장표 등이 기록돼 있다.

‘권5(卷五)’는 잔치 때 참여한 친·인척의 명단인 내외빈, 양로연에 참석한 15인의 대신과 374인의 수원부 선비·평민 등 노인의 명단을 기록한 참연노인, 임금을 호위하는 수행자 명 단인 배종, 서울에 남아 수비를 담당하는 관원의 명단과 임무인 유도, 연회 때 참석하는 악사(樂士)와 악공(樂工)·악생(樂生) 등 연주담당자와 복식을 기록한 공령, 왕의 화성행차 때문·무과 별시 합격자 명단인 방목, 화성 행 차에 참여한 관원과 군교·서리 등 모든 사람들에게 하사한 상의 내용인 상 전, 소요된 재정 일반에 관한 내용인 재용 등이 기록돼 있다. ‘부편(附篇)’은 모두 4편이 있다. 이는 화성 행차를 전후한 왕실의 중요행사에 대한 전교와 포상 등 제반 기록 을 담은 내용이다.

부편1 ‘탄신경하’는 1795년(정조19) 6월18일 수원의 화성행궁에 이어 서울 의 명정전(明政殿) 월대에서 열린 잔치의 의식에 관한 기록으로서, 전교· 연설·악장·치사·전문·의주·절목·계사·찬품·기용·배설·내외빈·상 전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부편2 ‘경모궁 전배’는 1795년 1월21일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정조대왕 이 사당에 참배한 기록으로서 전교·연설·의주·절목·계사·상전 등으로 되어있다.

부편3 ‘영흥본궁제향’은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의 탄신 8회갑을 맞아 신하 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한 내용을 중심으로 했다. 부편4 ‘온궁기적’은 1760년(영조20)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고 영 괴대비(靈槐臺碑)를 세운데 대한 기록이다. 한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수원행차가 모두 끝난 1795년 윤2월27일에 의궤를 편찬하라는 어명에 따라 곧바로 주자소에 의궤청이 설치돼 업무를 시작했다.
의궤청 총리대신은 좌의정 채제공이 맡았을 정도로 정조대왕의 깊은 관심 속 에 작업이 진행되어 같은 해 8월15일 교정을 끝내고 인쇄를 시작, 1797년(정 조21) 3월24일에 완성했다. 완성 즉시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규장각 서고, 화성행궁, 규장 각, 외규장각, 다섯 사고(史庫)를 비롯한 각처에 소장하는 한편 각 관서 및 총리대신 채제공이하 관계인에게 배부했다. 왕실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조선 후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수원의 행정체계, 방어체 계, 도로, 저수지 등을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자료이다. *참고자료:수원시사 부록



물자조달 / 화성축성이야기

img_0102.jpg '의궤(儀軌)'란 옛날에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났을 때 후세의 참고로 하기 위해 그 일의 경과 및 대책 따위를 상세하게 기록한 책을 말한다.
따라서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성의 전말과 건축에 동원된 사람의 이름, 자재, 예산규모 등 세세한 것을 모두 기록해 놓은 화성의 공사보고서로서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함께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인 것이다.

그런데 '화성성역의궤'만큼 귀중한 역사의 보물 창고가 또 있다. 다만 '화성성역의궤' 보다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따름이다.

정조대왕께서 모친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비)의 회갑연을 위해 행차했던 을 묘년(1795) 8일 간의 일정을 상세히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대왕의 주도 하에 진행된 을묘년 수원행차의 모 든 것을 기록 한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풍부한 기록 내용은 왕실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 을 전해 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과거의 문화유산 중 각종 음식과 옷, 그림, 조각, 기물, 용품, 노래, 춤, 의식 등 각 부 문별로 당시의 최고 수준을 반영하고 있던 궁중문화를 이 기록을 통해 생생 하게 만날 수 있다.이런 면에서 이 기록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이루었던 최고 수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유산이다.

정조대왕은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위한 수원행차에 따른 예비 논의, 경비 준비, 진행 과정 등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임했음이 이 책에 기록돼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역시 정조대왕의 깊은 관심과 배려 속에서 간행된 기 록물로서 수권 (首卷) 1책, 본책 5권 5책, 부편 4권2책 등 총 8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서적이다. 인쇄는 정리자(整理字) 금속활자를 사용했다. 1795년은 정조대왕에게 매우 뜻깊은 한해였다.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만60년이 되는 해(甲年)였으 며 동갑이었던 어 머니 혜경궁 홍씨 또한 회갑을 맞는 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 이 즉위한 지 20 주년이 되기도 했다.

정조대왕이 심혈을 기울인 화성 축성 공사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에 행차해 어머니의 회갑연을 대대적으로 열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향한 추모의 정과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정을 만 천하에 알린 것 이다. 이와 함께 왕실의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해 수원에서 양로연, 구호 미 배급, 문·무 과 과거 실시 등 갖가지 행사를 병행했다.

또 한강 노량진 주교(舟橋:배다리) 설치, 어사(御射:임금의 활쏘기) 등 부 대 행사도 다채롭 게 펼쳤다. 이 을묘년 행차가 단순한 왕실 행사의 의미만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임 중 정치적 개혁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으며, 말년에 은퇴해 노후 를 보내고자 했던 수원땅 백성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한편 자신의 효심과 애민정신을 은연 중 각인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또 왕실의 근엄함과 막강한 정예군사의 통솔 능력을 과시해 정치적으로 반 대편에 서있었던 세력들을 심리적으로 압박, 자신의 이상을 원활하게 펼치려는 의도 역시 있 지 않았을까? 일종의 정치적 시위의 성격을 띄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수원시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는 화성문화제의 하 이라이트 '정조 대 왕 능행차 연시'의 기본 그림인 반차도(班次圖:나라의 의식에서 문무백관 이 늘어서는 차례 를 그린 그림)가 수록돼 있다. 반차도는 수원으로 행차하는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 총리대신 채제공을 비롯한 조정대신, 경기감사. 문무백관, 나인, 총·창·칼·활을 든 군사, 말, 수레 등이 차례로 그려 져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정치·군사제도·복식 등을 연구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자료 이다. 뿐만 아니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벌어진 국가적 이벤트인 봉수당진찬연 (奉壽堂進饌宴:혜 경궁 홍씨 회갑연)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다음에 각 권별 내용을 소개할 때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이 기록이 있음으 로 해서 화성문 화제 혜경궁 홍씨 회갑연의 무용과 음식, 상차림, 참석인사 배치, 복장, 기 물 등이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원행 행사가 모두 끝난 1795년 음력 윤2월27일에 정 조대왕의 명으 로 작업을 시작해 1797년(정조 21) 음력 3월24일에 완성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혜경궁 홍씨의 수원 화성행궁 회갑연에 관한 정조 대왕과 조정신료들간의 논의 과정, 행차의 세부적인 절차에서 물자 및 인원 의 동원과 같은 행정 체계를 비롯해 궁중 잔치, 궁중 음식, 긍중 음악, 궁 중 의식 등과 같은 궁중 문화, 그리고 군사훈련, 행차시의 국왕 호위, 국왕 의 의장행렬, 기물, 장신구, 물가, 인물 등 당시의 궁중문화 및 일반 생활 사의 면면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역사의 보물창고’로서 우리 조상들이 축적해왔던 문화의 최고 수준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원행을묘정리의궤 역시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할 귀중한 사료(史料)라고 믿는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규장각 도서로 15종이 소장돼 있으며 이밖에 국립도서 관 장서각, 국립박물관 등에도 소장돼 있다.

‘권수(卷首)’는 이 책의 첫 권으로서 택일(擇日)·좌목(座目)·도식(圖式) 으로 구성돼 있는데, 주된 내용인 도식은 행차시 중요 장면들을 판화로 정리 한 것. 화성행궁의 전경으로부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후 서울 홍화문에서 백성들 에게 쌀을 나눠주는 광경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그림들이 수록돼 있어 해당 부문의 연구 및 복원을 위한 아주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수원에서는 매년 벌어지는 화성문화제나,
올해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 회 문화관광축제 행사에서 실시될 이벤트 정조대왕 능행차연시나 혜경궁 홍 씨 회갑연, 양로연 등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 이다.
도식 편에 수록된 그림들은 당시 화원(畵員)들이 근무하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를 주도한 김홍도식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권1(卷一)’은 정조대왕의 명령과 대화인 전교·연설, 행차시 각종 행사 에 사용된 음악인 악장, 각종 행사에 이용된 글인 치사·어제, 활을 쏜 내 용인 어사, 정리사나 장용영 내·외사에 내린 훈령인 전령, 행사의 세부 내 용인 군령 등이 기록돼 있다.

‘권2(卷二)’는 출궁의식과 환궁의식의 절차를 기록한 의주(儀註)와, 부록 으로 의식의 업무 규식인 절목,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연·월·일별 로 정리한 계사 등이 수록돼 있다. ‘권3(卷三)’은 신하들의 보고서인 계목과 장계, 관공서 상호 간에 오고 간 문서인 이문과 내관, 직속상관에게 자필로 쓴 보고서인 수본, 상급관청에 서 내려온 공문인 감결로 구성돼 있다. ‘권4(卷四)’는 각종 식품의 내용과 조달에 관한 찬품(饌品), 봉수당 잔치 (진찬) 때의 소요물건과 준비에 관한 내용인 배설, 행차 때 사용할 각종 도구와 준비상황에 관한 내용인 의장, 행차 때 참가한 내·외빈과 각 부서의 수행관원 및 하급관리와 군병에 이르기까지 지급한 노자의 내용인 반전, 원행 때 정조대왕과 모친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갈 가마를 준비하는 내용인 가 교, 강을 건널 배다리를 놓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지시사항에 관한 내용인 주 교, 현륭원에 행차할 때 각 부서에서 거행할 사항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인 사복정례, 어가를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패용하는 표신과 수행원 정수에 관 한 내용인 장표 등이 기록돼 있다.

‘권5(卷五)’는 잔치 때 참여한 친·인척의 명단인 내외빈, 양로연에 참석한 15인의 대신과 374인의 수원부 선비·평민 등 노인의 명단을 기록한 참연노인, 임금을 호위하는 수행자 명 단인 배종, 서울에 남아 수비를 담당하는 관원의 명단과 임무인 유도, 연회 때 참석하는 악사(樂士)와 악공(樂工)·악생(樂生) 등 연주담당자와 복식을 기록한 공령, 왕의 화성행차 때문·무과 별시 합격자 명단인 방목, 화성 행 차에 참여한 관원과 군교·서리 등 모든 사람들에게 하사한 상의 내용인 상 전, 소요된 재정 일반에 관한 내용인 재용 등이 기록돼 있다. ‘부편(附篇)’은 모두 4편이 있다. 이는 화성 행차를 전후한 왕실의 중요행사에 대한 전교와 포상 등 제반 기록 을 담은 내용이다.

부편1 ‘탄신경하’는 1795년(정조19) 6월18일 수원의 화성행궁에 이어 서울 의 명정전(明政殿) 월대에서 열린 잔치의 의식에 관한 기록으로서, 전교· 연설·악장·치사·전문·의주·절목·계사·찬품·기용·배설·내외빈·상 전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부편2 ‘경모궁 전배’는 1795년 1월21일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정조대왕 이 사당에 참배한 기록으로서 전교·연설·의주·절목·계사·상전 등으로 되어있다.

부편3 ‘영흥본궁제향’은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의 탄신 8회갑을 맞아 신하 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한 내용을 중심으로 했다. 부편4 ‘온궁기적’은 1760년(영조20)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고 영 괴대비(靈槐臺碑)를 세운데 대한 기록이다. 한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수원행차가 모두 끝난 1795년 윤2월27일에 의궤를 편찬하라는 어명에 따라 곧바로 주자소에 의궤청이 설치돼 업무를 시작했다.
의궤청 총리대신은 좌의정 채제공이 맡았을 정도로 정조대왕의 깊은 관심 속 에 작업이 진행되어 같은 해 8월15일 교정을 끝내고 인쇄를 시작, 1797년(정 조21) 3월24일에 완성했다. 완성 즉시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규장각 서고, 화성행궁, 규장 각, 외규장각, 다섯 사고(史庫)를 비롯한 각처에 소장하는 한편 각 관서 및 총리대신 채제공이하 관계인에게 배부했다. 왕실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조선 후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수원의 행정체계, 방어체 계, 도로, 저수지 등을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자료이다. *참고자료:수원시사 부록





     임금지불 / 화성축성이야기


옛날 국가나 지방관청에서 시행하는 공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을 뿐 만 아니라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혹독하게 일을 부려먹어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탐관오리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강제부역으로 가혹하게 착취 했기 때문에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 정조대왕이 명하여 공사에 들어간 화성 축성 때는 이런 일들이 결단코 없었다.
또박또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임금님의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 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줬으며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 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따라서 기록에 보면 화성 공사 및 수원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금의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백성을 징발해 노동에 종사케 하는 것을 부역(賦役) 노동이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부역노동을 하는 대신 현물로 대납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화성 축성공사가 시작되면서 채제공 역시 지금까지의 관례를 들어 부역을 주장했다.
`정조실록' 권40, 정조18 년 5월 조에 기록된 기사를 보자.
"성인인 공자 역시 `백성을 시기에 알맞게 부린다'고 했지 언제 백성을 부리지 말라고 한적이 있습니까? 이번 화성 성역(城役)은 국가의 대사이므 로 나라가 백성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 수 없으며 백성의 도리로 나라를 위 하여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너무 아낀 나머지 한사람이라도 노역에 지치는 폐단이 있을까 싶어 아직까지 백성 을 적절히 부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계시니,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시켜 야 한다는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승군(僧軍)의 경우 더욱 더 이런 곳에 쓰기에 합당합니다.
신의 생각은 백성과 승군으로 하여금 거리와 수효를 균등하게 하여 며칠동안 축성 공사에 부역하도록 징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합니다" 승군과 백성을 부역의 형태로 징발해 사역을 시키자는 것은 비단 채제공만 의 주장이 아니었다. 우의정 이병모도 성역에 투입할 일꾼들을 각 도에 분배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밖에 좌의정 김이소, 행판중추부사 김희, 행예조판서 정창순, 행사직 홍 양호, 전참의 윤행임, 좌참찬 홍수보, 판돈녕부사 김지묵 등 대부분의 신하 들도 부역론에 동조했다.
그러나 정조대왕은 강제부역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임금을 지불해 백성들 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화성성역의궤'의 `화성기적비' 기록에 따르면 화성공사에 인부가 70여만 명이 투입됐는데,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성왕(聖王) 정치이념을 바탕 으로 인부는 모두 노임을 주고 부리며, 백성들에게는 단 3일간의 의무적인 부역이라도 면하도록 했다. 모두 품삯〔고가:雇價〕을 주고 사역했고 백성들 의 강제적인 부역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화성을 축성하면서 석수와 목수, 단청공기와 및 벽돌장, 미장, 대 장장, 조각장 등 반드시 필요한 전문노동력들에 한해서 부역으로 징발했다.
그러나 이 역시 모두 품삯을 지급했을 뿐 더러 일반 단순노동자들보다도 더 많은 액수를 지급함으로써 전문 장인(匠人)에 대한 예우를 했다.
일반 인부의 경우 매일 돈 2전5푼 정도가 지급된 데 비해 목수와 미장이, 조각장, 화공, 수레장 등의 경우는 매일 돈 4전2푼씩이 지급됐다고 '화성성 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당시 물가로 쌀1섬(15말)은 5냥 정도에 거래됐다.
석수는 보조 1명을 포함, 매일 돈 4전5푼과 쌀6되를 지급했다.
화성 축성에 동원된 장인들은 모두 1천821명으로서 연311만1천131일을 공 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장인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은 12만8천735냥4전3푼이었는데 이 가 운데 석수에게 지급된 금액이 7만3천164냥으로 52.3%를 차지했고, 미장이에 게 2만4천419냥7전(19%), 목수 1만3천381냥(10.4%), 대장장 1만745냥8전7푼 (8.3%) 등의 순이었다.
한편 전문 기술자들인 장인 외에 잡역부인 모군(募軍)에게는 11만7천520냥 8전7푼이, 목재나 돌을 운반하는 담군(擔軍)에게는 5만8천561냥5전7푼이 지 급되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총 품삯의 액수는 30만4천817냥8전 4푼에 달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목재 석재 등의 총액이 39만201냥1전1푼임을 감안하면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의 비중을 알 수 있다.
한편 멀리서 온 일꾼들을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등 축성 공사장 인근과 돌 뜨는 곳이었던 숙지산, 여기산과 목재 다듬는 곳이었던 구포(현재 화성 시 비봉면) 등지에 임시 가옥을 설치했다.
또 일꾼들이 질병에 걸릴 경우 성밖에 막사를 치고 진료해 주었으며 치료 기간 중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매일 쌀 1되, 돈 1전씩을 지급했다.



거중기 / 화성축성이야기

img_01052.jpg 조선후기 정조시대에 왕의 명령아래, 수원화성을 쌓으려면 엄청난 길이에 과학기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동이 편리하고,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기기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안한 것이 거중기 이다.

그 당시의 토목기술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수려하고 견고하면서 비교적 적은 경비로 2년 반이란 짧은 기간에 성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계획 당시부터 실학자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등의 경륜과 지혜를 참작하고 지게에서 거중기 등 우리 고유의 각종 기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 기술의 장점을 응용하였고, 거중기 같은 기계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한편 다량의 석재를 가까이에서 채취하고 벽돌(전돌)을 구워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특히, 정조는 축성기술을 얻기 위하여 중국 가는 사신에게 명하여 구하고자 했던 "사고전서"는 구하지 못했지만 "고금도서집성" 5,022권을 거금 2150양을 주고 들여와 이중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5000근이나 되는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근대 실학 정신을 투영해 성벽중 특히, 주요 방어시설을 모두 벽돌로 쌓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축성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손수 점검하고 결정하면서 무엇보다도 민폐가 없는 인화와 장인 솜씨를 발휘토록해 아름다운 벽돌성이자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 불리우는 수원화성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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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호 (수원시 학예연구사)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특히 올해 7월 1일에는 우리나라 '조선왕조 의궤' 833종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중에서도 화성 건설의 전 과정이 기록된 『화성성역의궤』와 1795년 윤 2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화성과 관련된 뛰어난 기록유산이다. 경기도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및 세계인이 화성과 이러한 모든 문화유산에 대해 자랑과 긍지를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세계문화유산 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인식을 갖고 있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천도설'이다. '천도설'은 정조대왕이 노론의 권력기반인 한양을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기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일부 노론 세력들 사이에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 원침을 천봉하고 수원에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5.7km에 달하는 성곽을 축조하는 행위가 혹시 수도를 옮기고자 하는 정조의 깊은 뜻이 아닐까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큰 하천이 없는 수원의 지형적 특성과 화성행궁 자체가 소박하고 서울의 궁궐 건축과는 그 규모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는 등, 이러한 추측은 과장된 것이었다. 정조대왕은 순조가 15살이 되는 갑자년(1804)에 왕위를 물려주고 아버지가 묻힌 화성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내려와 노후를 보내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고자 하는 정치적 기지를 상정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화성이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주장이다. '세계 최초'라는 단어는 매우 듣기 좋은 말이긴 하나 우리는 항상 사물과 사안에 대한 판단은 냉정하고 실사구시적으로 해야할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규모면에서 평양, 경주, 개성, 한양 등의 도시도 계획된 신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우리 익히 아는 도시들은 거의 계획된 신도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동안 수천 년의 누적된 우리의 성제와 각국 성제의 장점을 따서 건설한 '계획된 신도시'라는 규정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자랑할 만한 것은 신도시를 건설하고 총체적인 '공사보고서'가 남아있는 유일한 도시라는 데 있다.
세 번째는 1796년 10월 거행된 낙성식에 정조가 불참한 상황 설명이다. 그동안 정조대의 모든 사안들은 대부분 정치적 해석과 정치 논리로 해석되었다. 즉 '노론 벽파' 와의 긴장된 정국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조가 오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마침 9월에 옹주가 천연두를 앓자 7살 난 순조를 데리고 거처를 이문원으로 옮기는 긴박한 상황 때문이었다. 왕위를 이을 세자의 보호가 낙성연보다 중요하였던 것이다.
 
네 번째는 1794년 1월부터 화성성역을 시작해서 1796년 9월까지 총 33개월 중 가뭄이 들었던 1794년 6개월간 성역을 중단했다는 설이다. 물론 실록에는 불볕더위와 흉년, 재정 부족 등의 이유로 화성 성역을 중단하도록 명한 일이 있었다. 몇 번에 걸쳐 화성 성역 중지를 명하였지만 실제는 논의만 무성하였지 성역은 계속되었다. 성역은 1795년 윤 2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맞물려 있었으며 회갑연은 군사훈련, 양로연, 과거시험 등 화성을 진흥시키고 정조의 위용을 과시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대단히 중요하고 연기할 수 없는 행사였다. 이 회갑연에 맞추어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과 남쪽문인 팔달문은 행사 이전인 1794년 하반기에 완성되었고 임금이 오고가는 길목인 북쪽 성벽과 군사훈련의 최고 지휘부인 화성장대도 이미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정조 '독살설' 이다. 정조는 화성이 완성된 지 약 4 년만인 1800년 6월 28일 사망하였다. 정조 독살설이 유행하거나 정설화된 것은 정조가 기운이 다 떨어져 들릴 듯 말 듯 정순왕후가 거처하는 '수정전'을 가리킨 것과 정순왕후가 청심환을 직접 들고 정조에게 들어간 후 막바로 사망한 정황과 관련되어 있다. 수정전을 가리킨 것은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건강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독살'이지, 이미 죽어가는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 일부러 무엇 때문에 큰 일을 도모하겠는가. 『실록』에 의하면 정조는 이미 5월경에 등쪽을 비롯하여 여러 종기를 앓아오다 의술에 정통한 본인이 직접 처방을 하면서 6월 28일이 되면 이미 기력이 떨어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극적인 일을 좋아하는 비역사가적 안목이 빚어낸 상상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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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균님의 댓글

이균 작성일

대규친구!
언젠가 먼발치서 화성의 성벽만 보았을 뿐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과 위용있는 건축물인줄은 몰랐다네.
모두가 대규친구가 다양한 사진과 관련참고 문헌까지
챙겨주셨기때문에 맛볼 수 있는 기쁨이라오.
다시 한 번 대규친구의 정성과 자상함이 참으로 놀라울뿐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성환님의 댓글

서성환 작성일

스포츠도 룰을 알고봐야 재미있듯, 수원성의 역사를 이렇게 소상히 알려주니 하루 한바꾸씩 하는
워킹이 보다 의미있다. 오를때마다 타임머신 타고 정조의華城을 순시하는 착각에 빠지곤하지만
보면 볼수록 참 예쁘게 만든 성이다. 균이가 먼발치서 봤다는것이 노친네 문병왔을때 였던가보다.
요번에는 친구들위해 울산 돌문어 한마리 삶아 올 의향없나? 천두도 데리고 오면 더더욱 좋고..

이동락님의 댓글

이동락 작성일

문화유산 해설사를 어떻게할까하였더니 김 대규박사께서 미리 소상히 예습을 다시켜서 걱정 없이 그냥 둘러만 보고
즐겁게  점심먹으면서 한잔 하면되겠구려.

김대규님의 댓글

김대규 작성일

친구들 고맙소.
자료만 그냥 모았을 뿐인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자료는 암만 보아도
실제로 가서 보는 것 보다 못하지 않겠소?
아름다운 성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우리 모두 멋진 시간을 같이 즐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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