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경남도청이 진주에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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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자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29 12:17 조회13,88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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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청이 진주, 충남도청이 공주에?
- 김영철 - 조선닷컴 블로그뉴스(2012.05.28.)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 모습. 24년 11월 15일자>
철도가 바꾼 진주ㆍ공주의 운명
“경남도청 이전 문제는 금(今)에 시(始)한 사(事)가 아니오, 도청이전 문제가 운(雲)과 여(如)히 기(起)하고 무(霧)와 여히 소(消)하야, 문제가 기할시마다 진주 재유민(在留民)의 경악됨이 일재(一再)에 부지(不止)한 설(說)이로다.철도가 개통되면 본 문제는 자연 소멸될 것시로다.” (1921년 1월 5일자)
진주에 있는 경남도청 이전 문제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안개처럼 사라져,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주민들이 크게 놀란 게 한두번이 아니었는 데,이 문제는 (진주까지)철도가 연결되면 자연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도청이전은 없다’고 밝힌 경남지사의 발언을 담은 기사다.
경남 도청이전은 1905년 경부선이 운행되면서 필요성이 제기된 뒤, 근 10여년 이상 계속 제기됐고, 그 때마다 총독부는 ‘불가’ 방침을 밝혀왔다. ‘도청 이전설’이 계속 나오자 진주 부민들은, 부산의 ‘운동’ 때문이라고 보고, 부산과의 상거래를 거부한다는 ‘선전포고’까지 했다.(1921년 8월 5일자)
잠시 뜸한가 싶던 도청이전 문제는 1924년 들어 재점화 됐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주민들은 7월 26일 진주 청년회관에서 ‘도청이전 결사 방지’를 다짐하는 주민대회를 개최했다.(1924년 7월 28일자)
“자는 귀에 물 붓는 폭거”
그럼에도 총독부는 1924년 12월 8일자 관보를 통해, 경남도청의 ‘1925년 4월 부산 이전’을 확정했다.
도청의 부산이전이 확정되자, 진주와 부산에선 총독부 총감에 전보를 보냈다. 진주에선 총독부에 전보를 보내 ‘도텽을 이뎐한다 함은 자는 귀에 물 붓는 폭거’라며 취소를 요망했고, 부산은 도청 위치 변경을 결정한 부령 제16호는 ‘시정상 일대 영단으로 디방 행정의 쇄신과 일반의 복리 증진을 도모하는 뎌으로 보와 경하키를 마지 안는 바’라고 경의를 표했다.(1924년 12월 10일자)
진주에선 총독부에 파견한 상경 진정위원은, ‘오만의 일본인을 위하야서, 일백 삼십만 조선인을 무시’한 일선차별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인을 본위로 하는 경제라면 부산편이 만흘는지 모르나, 조선인의 경제로 보면 이편이 얼마가 만흔터”요, “교통으로 보면 몃몃 총독부 관리가 왕래하는 데는 부산이 편할지 모르나 적어도 인민을 본위로는 당연히 도의 중심지에 있어야”한다며, 굳이 옮기려는 것은 “저편은(부산) 일본 사람이 오만명이나 살고, 이편은 몃천명 밧게 안 사닛가 소수인 일본인을 위하야 다대수인 조선인의 생사를 무시함”이라는 것이다.
‘도청이전은 철저한 일선(日鮮) 차별’ 정책이라며, 원상회복을 요구하면서, 관철되지 않을 경우, ‘납세 불납’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불과 몇달 전, ‘도청이전 반대 진주시민대회’가 열렸을 때, 하야 총독은 상경한 진주 진정위원에게 “안심하고 사업을 진행하라” 했다기 때문에 진주시민들의 배신감은 더했다. 그래서 “백성을 속이는 정치에는 복종할 수 업다”며 더욱 반발했다.(12월 11일자 조ㆍ석간)
도청 이전에 진주 시민 총파업
12월 13일, 장날을 맞아 전 진주 시민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수만 군중이 ‘제각기 붉은 기를 들고 선뎐 비라를 돌리며 종을 치며 시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련일 살긔충텬한’ 진주 시가는, 전쟁상태나 다름없었다.
“일흔 아츰부터비분강개한 문자를 대서특서한한 자리대기를 선두로 혹은 군악으로 혹은 풍물로 혹은 자동차로시민대회 연다는 것을 선전하야 흡하히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가티 비상하얏다.
시민대회연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시간도 되기전에 물미듯이 대회 장소인 진주좌에 몰려와서 혼잡한 상태를 일우엇다.
예뎡한 오후 2시가 되자 빈틈업시 들어찬 수천 민중의 산이 문혀지는 듯한 박수소래와 함게 진주면장의 사회로 진주의 생사가 달린 진주 시민대회는 열렷는 데,
일반 민중의 총독부에 대한 비분강개한 부르지즘은 가히 긔록할 수 업거니와, 모든 부르지즘을 종합하면 총독부에서 이미 민중을 속이고 횡포한 행위를 거침업시 단행하니, 우리도 부득이 힘으로써 싸화야 되겟다는, 폭력은 폭력으로 대항치 아니할 수 업다는 의견이 일치되야, 실행방법을 토의한 후 도텽이뎐 방지실행위원 36인을 선뎡하고, 도텽이뎐 중지교섭위원 12인을 선뎡하야 9일 오후 3시에 출발 상경케하고 , 그밧게 별동대를 조직하야 각 방면으로 활동케 하고, 이번 문뎨가 속히 해결되지 아니하는 때는 세금불납동맹을 하자는 것과, 각 면리원의 총사직할 것까지 대략 의론되얏고, 또 부산으로 동정하는 6,7군을 제한 1부 12군과 함께 일치 행동을 취하야, 사긔(詐欺)행정을 하는 총독부와 끗까지 싸호자는 뜻으로 저물도록 의론을 마치고 페회하얏더라”(1924년 12월 14일자)
도청이전 반대 시위는 인근 사천,통영,고성 등으로 확대돼 나갔다.(1924년 12월 16일자)
그러나 근 20여일간 계속되던 반대 시위는 해를 넘기면서 경찰이 ‘이전 반대’ 동맹회 간부들을 사전 검속ㆍ유치하고, 집회를 철저히 차단하면서 흐지부지 됐고(1925년 1월 6,15,28일자 등), 1925년 4월 11일 부산에선 도청이전 축하음악회가 개최됐다.
<부산으로 이전한 경남도청 청사 모습. 25년 4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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