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고 살 만큼 살다가 떠날 때도 홀로 간다.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어울러 살면서도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독신 수행자는 주어진 여건 자체가 홀로이기를 원한다. 한곳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도 저마다 은자처럼 살아간다.
서로 의지해 살면서도 거기에 매이거나 얽혀들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묶여있지 않는 들짐승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숲 속을 다니듯, 독립과 자유를 찾아 혼자서 간다.
불교의 초기 경전《숫타니파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절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만난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니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와 같은 동반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차피 저마다 자기식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똑같이 살라는 법은 없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을 때 전체인 자기의 있음이고,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부분적인 자기이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단지 혼자 지낸다고 해서 과연 ‘홀로 있음’인가.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가르침은 홀로 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즉, 개체의 사회성을 말한다.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 바다위에 외롭게 떠 있는 섬도 뿌리는 대지에 이어져 있듯.
고독과 고립은 전혀 다르다. 고독은 옆구리께로 스쳐 지나가는 시장기 같은 것. 그리고 고립은 수인처럼 갇혀 있는 상태다. 고독은 때론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하지만, 고립은 그 출구가 없는 단절이다.
다코다 족 인디언 오히예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홀로 있을 때 우리와 더 가까이 있다. 홀로 있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 존재와 대화하는 일이 인디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배이다. 자주 자연 속에 들어가 혼자 지내 본 사람이라면 홀로 있음 속에는 나날이 커져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과 맞닿는 즐거움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관리가 철저해야한다.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기 마련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누가 밖에서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누가 홀로 가는가’ ‘태양이 홀로 간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베다경전에 나오는 문답이다.
내가 소싯적부터 즐겨 외는 청마선생의 <심산深山>이란 시가 있다.
심심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 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